[작가의 말]
가끔씩 내가 경험한 것들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내 몸의 흉터조차 누군가 새겨 넣은 문신처럼 여겨지는 그런 날이 있다. 이제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미워해야겠는데, 나는 아직도 당신이 붉은 꽃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다 무너진 듯 슬프다. 어떤 나무는 어떤 새의 아버지이고, 어떤 지옥은 어떤 양떼를 잠재우는 음악이다. 고작 이따위 말장난 같은 진실을 알기 위해, 나는 주로 밤에서 아침까지 일했고 낮에는 죄를 지으며 돌아다녔다.
기조는 유지하되 전형에 묶이지 않으려는 노력은 비단 작가에게만 국한된 어려움이 아닐 것이다. 나는 내가 목격하는 다른 이들의 삶이 무서웠고, 또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내 삶이 더 무서웠다. 하여 나는 내게 불멸을 준대도 감사하지 않는다. 다만 고백할 뿐이다. 나는 유리창을 베어내는 검(劍)의 차가운 선(線) 같은 문장을 터득하고 싶었다. 나는 늙어서는 희극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간 이 무지막지한 세계와 정을 떼고자 했던 나는, 몇 가지의 서러운 능력을 얻은 만큼 몇 가지의 희망에 관하여서는 완벽한 불모에 이르렀다. 나는 안전제일주의자들의 눈치를 살피는 스스로를 깨달을 적마다 혐오의 극한을 맛보았다. 화를 내면 내가 부서지고, 참고 있자니 외로움만 쌓여갔다. 하지만 사랑은 그 사랑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나는 어두웠던 나를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조촐한 치료는 가장 비열한 패배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과거의 나는 고통을 비유했으나, 앞으로의 나는 그 고통 안에서 내가 모르던 나라를 발견할 것이다.
나는 죽기까지 내 마음 어디에도 나의 사원(寺院)을 세우지 않을 작정이다. 대신 여기 짐승을 화두로 삼은 아홉 편의 소설들이, 인간이라는 물음표를 괴로워했던 내 청춘의 면벽을 두고두고 증명할 것이다. 부질없는 속세의 판단은 이미 나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책 한 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지금의 이 기쁨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2004년 봄
이응준
초식 동물의 음악
그 침대
해시계를 상속받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
무정한 짐승의 연애
길과 구름과 바람의 적
오로라를 보라
짐승의 편지
뚱뚱하고 날씬한 물고기 잔치
해설: 촛불의 욕망과 사랑의 상대성 원리 _정과리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