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배달된 두툼한 편지,
그 안에는 인간의 진실과 사랑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앙리의 문학 수업』은 이왕에 출간된 『내 친구는 국가 기밀』의 속편이다. 프랑스 대사의 딸 아나이스와 남미에 있는 라드마케르 섬의 독재자의 숨겨진 아들 에밀리오의 연애를 틀로, 라드마케르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한 기록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액자 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편이 아나이스와 에밀리오의 만남과 헤어짐이 주된 이야기였다면, 『앙리의 문학 수업』은 아나이스와 헤어진 뒤, 에밀리오가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아나이스에게 쓴 편지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 편지 속에는 지진으로 인해 숨가쁘게 전개되는 적나라한 참상들, 유일한 희망인 아나이스에 대한 사랑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스페인 어로 씌어진 편지를 번역해 주며 또 하나의 책을 구상하는 어린 작가 앙리의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어른들의 생각의 허를 찌르기까지 한다.
이 한 권의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어른들이 보기엔 우스울 수도 있지만 너무 진지한 사춘기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 남아메리카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리로 내몰린 한 소년의 슬픈 운명과 지진의 참상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소년의 진지하고도 깊은 통찰이 엿보이는 문학 이야기.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 같은 이 복잡하고도 진지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이 되는지 글을 읽다 보면 작가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는 프랑스에 있는 아나이스에게 배달된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 어른들 못지않은 아이들의 진지한 사랑과 성장
라드마케르 섬에서 겪은 별난 이야기를 책으로 써낸 앙리의 아빠와 그 덕분에 책에 홈빡 빠져 책 속의 내용을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프랑스 소녀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이 년 전, 라드마케르 독재자의 아들 에밀리오를 뒤로 한 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런 아나이스 앞에 어느 날 두툼한 편지가 배달된다. 그건 너무나 그리워하던 에밀리오에게서 이 년 반 만에 온 편지다. 편지 봉투가 찢겨져 있는 것으로 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편지에는 에밀리오가 겪은 지진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또한 유일한 희망인 아나이스에 대한 에밀리오의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들의 진지하고도 솔직한 이야기를 어느 누가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또 하나의 조금은 특별한 어린 연인이 등장하는데 스페인 어로 씌어진 편지를 번역해 주는 앙리와 그의 여자 친구 드니즈. 말처럼 드센 드니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드니즈를 사랑하는 앙리가 벌이는 사랑의 줄다리기도 그저 애들만의 소꿉장난이 아니라 성숙한 연인들처럼 감정의 치유 과정을 거치며 아름답게 익어 간다.
■ 편지 속에서 숨가쁘게 전개되는 지진의 적나라한 참상들
독재자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기에도 벅찬 에밀리오에게 그것보다 더 큰 위기가 닥친다. 라드마케르 섬에 일어난 엄청난 지진이 바로 그것이다. 지진으로 인한 온갖 참상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에밀리오는 자기 안에 있던 진실,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의 출생을 둘러싼 의문들, 한 극장의 유명한 가수였던 엄마와 나라의 일인자였던 아빠의 만남, 거기서부터 시작된 불행, 독재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고작 한 달에 몇 번만 아빠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자신의 현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은 에밀리오는 어느 새 이런 모든 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나이스가 책을 통해 에밀리오를 만나지 못하는 슬픔을 잊으려 했다면, 에밀리오는 긴 편지를 쓰면서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를 줄여 나갔을 것이다. 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들, 가족을 잃고 절규하는 사람들, 모든 삶의 터전을 집어 삼켜 버린 땅 앞에서 말이다.
■ 어린 작가의 눈을 통해 본 문학이란
스페인 어로 씌어진 기나긴 편지를 번역하게 된 앙리. 작가를 꿈꾸는 어린 작가 앙리는 편지를 읽으며 또 하나의 책을 구상한다. 전업 작가인 아빠에게 이번 일만큼은 양보하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편지를 현실의 일이 아니라고 믿는 엄마와 여자 친구 드니즈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을 책 속으로 끌여들여 감동의 장으로 안내한다. 글 쓰는 것에 대해, 글의 소재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던 엄마와 드니즈는 그런 앙리에게 계속 현실을 일깨워 주려 하지만 오히려 앙리는 문학에 대한 고정 관념에 반발하면서 자기 나름의 문학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 나간다.
‘문체라는 게 여러 문장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라면, 그래서 자기의 문체를 주장하기 위해 문장 선택에 몇 시간씩 골치를 썩어야 한다면 난 차라리 문체를 갖지 않고 아무 문체도 없는 작가로 남고 싶다. 그저 에밀리오 외삼촌의 차로 어서 돌아가 두 발을 다친 쥐스토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싶을 따름이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할 것인지, 예고한 대로 지진이 또다시 일어날지를, 단 일 초도 문체 문제로 머뭇거리지 말고 되도록 빨리 알고 싶다.’(본문 95~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