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건국 신화의 역사와 논리

조현설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3년 4월 28일 | ISBN 9788932014012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484쪽 | 가격 22,000원

책소개

[책머리에]

신화는 상징의 언어에 속한다. 신화가 상징이라는 말은 신화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화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런데 어떤 유형의 신화는 스스로 그 다의성을 차단한다. 다양한 의미의 흐름을 하나의 홈으로 수렴한다. 수렴과 차단의 힘, 권력의 담론 혹은 담론의 권력은 여기서 생성된다. 건국 신화는 다양한 집단들이 지닌 신화들의 다기한 의미를 포획하여 하나의 의미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권력의 담론이다. 건국 신화는 이질적인 것들을 불러모아 동일성을 주조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필자가 이미 ‘낡은 텍스트’인 한국의 건국 신화를 불러내어 다시 연구하려고 했을 때 지닌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문제는 이 권력의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리고 구성된 담론은 어떤 방식으로 효과를 발휘하여 이념적 동일성을 제조하고, 역사의 추이에 따라 담론 자체를 재구성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건국 신화의 일반적 원리에 대한 탐색이었고 탐색을 위해서는 비교 연구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연구를 시작할 당시 필요한 자료를 국내에서 구하기는 어려웠다. 필자의 중국행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1995년 9월, 베이징외국어대학 한국어과의 초빙을 받고 베이징에 닿았다. 거기서 우리의 말과 역사, 문학과 문화를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베이징대학교 비교문학문화연구소의 방문학자 자격을 얻어 자료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에는 언제나 적잖은 에피소드가 따르게 마련인데 티벳 관련 자료를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 라싸의 한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책을 받았던 일, 몽골 관련 자료를 구하러 내몽골 후허하오터까지 가서 책을 한 짐 싸들고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발견한 베이징의 모 서점에서 그 대부분의 책을 만났던 일이 뇌리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여행에 관한 한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자료를 찾은 것이 아니라 자료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물론 자료를 찾아 도서관과 서점을 무수히 답파했지만 그 자료들은 오랫동안 거기서 한 학인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즐거운 경험을 필자는 자전거를 밟는 무릎으로 파고드는 베이징의 날카로운 바람과 교환했다.

하나둘씩 쌓이는 자료 더미들 속에서 단군이나 주몽 같은 건국 신화의 주인공들이 나타났다. 만주의 포고리옹순, 몽골의 알란 고아 혹은 칭기즈 칸, 티벳의 섭적찬보 등이 그들이다. 필자는 이들의 건국 이야기를 검토하면서 이야기 안에 내재해 있는 어떤 보편적 원리를 모색했다. 건국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달리 말하면 건국이라는 신화적 담론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리고 건국 신화는 역사적 조건의 변동에 따라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이런 질문에 매달린 끝에 구축한 가설이 ‘신격 기능 체계론’이다. 건국 신화는, 시조 신화의 2기능 체계와 달리, 3기능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파견자 기능을 통해 지고신의 위대한 뜻을 천명하고, 중개자 기능을 통해 새로 구성된 집단의 혈연적인 혹은 이념적인 동질성을 구현함으로써 집단을 통합하고, 실현자 기능을 통해 건국주를 통합의 표상으로 내세운다. 개인은 끊임없이 시조 신화의 공동체로 돌아가 거기 머물려고 하지만 국가는 개인을 부단히 건국 신화라는 동일성으로 호명한다. 이런 점에서 건국 신화는 이데올로기적인 담론이라는 것이 신격 기능 체계론의 주요 내용이다. 나아가 이 이론적 틀은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을 설명해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건국 신화의 주인공들에게 여행은 필수적이다. 그들은 대부분 나라를 세우기 위해 길을 떠난다. 주몽은 북부여를 떠나 엄시수를 건넜고 포고리옹순은 어머니를 떠나 배를 타고 내려갔다. 섭적찬보는 설산을 넘었고 부르테 치노는 텡기스 해를 건넜다. 이들의 여행은 나라를 세우기 위한 모험과 만나는 길이었고 자신에게 부여된 신성한 소명을 확인하는 길이었다. 물론 여행은 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시조 신화의 주인공들도 구멍으로부터 나오거나 홍수에 출렁이거나 짝을 찾아 먼 길을 떠나고 무속 신화의 주인공들도 신성을 획득하기 위해 여행자의 고난을 감내한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주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과감한 비유가 허락된다면 건국 신화의 이론을 찾아 나선 필자의 과업 역시 서해를 건너는 여행에서 구체화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베이징외국어대학 전가루(專家樓)의 구석진 방, 쌓인 서책들과 함께 떠난 또 하나의 여행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1997년에 제출한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에 관한 연구: 티벳 몽골 만주 한국 신화를 중심으로」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릇된 글자들을 바로잡고 논지의 미진함을 가다듬었으며 체제를 조정했다. 그리고 이론적 논의의 확장을 위해 대하 남조 대리의 건국 신화를 다룬 7장을 새로 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진한 점이 없지 않고, 일본이나 베트남의 건국 신화를 다루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책을 통해 다하지 못한 작업은 숙제로 남겨두고 이쯤에서 닻줄을 풀어 학계의 질정을 구하기로 한다. 누추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몇 마디 감사의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도교수인 김태준 선생님을 마음의 언덕에 올린다. 이 저술을 가능하게 한 중국행을 충동하고 인도해주신 선생님의 은덕과 학력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의 길을 이끌어주신 동악의 여러 교수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특히 석사 시절 글쓰기를 일깨워주신 홍기삼 선생님, 자료에 대한 천착을 강조하신 임기중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하고 편달을 아끼지 않으신 여러 교수님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돌이켜보면 여러모로 힘겨웠던 중국에서의 이태 동안 적지 않은 은혜를 입은 베이징외국어대학의 묘춘매 교수님, 베이징대학교의 위욱승 교수님과 비교문학문화연구소에도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빛을 볼 수 있도록 밀어준 서남재단과 문학과지성사에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머리글을 마치면서 재주 없는 필자에게 늘 도남(陶南)을 상기시키시며 공부의 뒷길을 지켜주신 고향의 엄친을 생각한다. 아마도 이 책을 받아들고 가장 기뻐하실 것이다.

2003년 4월 조현설

목차

서남 동양학술총서 간행사
책머리에

서론: 건국 신화의 논리와 비교 신화학의 새로운 구상
제1장: 티벳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
제2장: 몽골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
제3장: 만주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
제4장: 한국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
제5장: 동아시아 건국 신화 형성의 논리
제6장: 동아시아 건국 신화 재편의 논리
제7장: 대하 남조 대리 건국 신화의 형성과 신격 기능 체계론의 이론적 확장
결론: 건국 신화의 3기능 체계와 국가 이데올로기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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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조현설 지음

1962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86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8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건국 신화의 형성과 재편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교 방문학자, 베이징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교수, 이화여대 중문학과 박사후 연구원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조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8년 제8회 나손 학술상을 수상했다. 주요 논문으로 「남성 지배와 장화홍련전의 여성 형상」 「고려 건국신화 고려세계의 신화사적 의미」 「웅녀 유화 신화의 행방과 사회적 차별의 체계」 「한중일 신화학의 여명과 근대적 심상지리의 형성」 「동아시아 창세 신화의 세계 인식과 철학적 우주론의 관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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