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미래를 위하여

김인환 비평집

김인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3년 3월 26일 | ISBN 9788932014005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72쪽 | 가격 14,000원

수상/추천: 팔봉비평문학상

책소개

[책머리에]

현대는 과학 특히 자연과학이 올바른 생각의 대명사가 되어 있는 시대이다. 자연과학이 잘못 이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수한 DNA의 구조를 발견하여 고등 동물만이 합성하는 효소를 하등 동물에게 합성해내도록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실험이 어떤 항생 물질로도 죽일 수 없는 미생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사회적 오용과 자연과학의 방법적 탐구는 구별되어야 한다. DNA의 위험성은 생화학의 구조 체계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가 아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실험에서 얻은 완강한 사실을 단순한 수학적 질서로 환원하는 과정에서의 누락 또는 착오가 문제될 뿐이다. 공해의 원인을 과학의 발달에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반대로 환경 화학의 발달이 없다면 공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한 곳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다른 곳의 엔트로피를 더 급격하게 증가시키는 것이 되므로 계(系) 전체의 공해 정도를 리사이클링으로 낮출 수는 없다. 현대 사회의 운명은 이윤율과 생산 능률의 유지에 달려 있고 이윤율과 생산 능률의 변화는 기술 수준의 향상에 달려 있고 기술 수준의 향상은 자연과학의 발달에 달려 있다.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 미분 개념 또는 한계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도 현대를 변화와 동의어로 인식하는 데 있다. 기업가들은 어쨌든 지속될 수익과 비용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고 현재 변화하고 있는 한계 수익과 한계 비용에 대해서만 고심한다. 과거에 이익을 보았거나 손해를 보았거나 하는 것은 무시해야 하고, 미래에 이익을 볼 것이라거나 손해를 볼 것이라거나 하는 것도 무시해야 한다. 기업은 현재의 사업이지 과거의 사업이나 미래의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영원한 진리도 없고 절대적인 가치도 없다. 해괴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토록 같은 집에서 살다가 죽으리라는 믿음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사업은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로 향하는 도상에서 그때그때 현재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순환의 원주는 확대될 수도 있고 축소될 수도 있으나 기업가는 항상 답보와 반복을 피하여 편력의 길로 나서야 한다. 자본가의 정신은 산만하게 이것저것 쫓아다니며 다양한 대상을 탐닉하는 호기심 많은 정신이다. 기업가는 어떤 대상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을 따라 전진한다. 기업가는 본질적으로 모험하며 실험하는 인간이다. 보편 존재보다 개별 존재가 우위에 있는 사업의 세계에서 하나의 시도는 하나의 유혹이다. 기업가는 세계라는 커다란 기업체 속에 왜 들어왔는지 그 안에서 어디에 머물러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는 외로운 단독자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염려하고 계획하며 나날의 일을 볼 뿐이다. 미래는 그에게 분쇄와 몰락과 자폭의 암호이다. 그는 부채와 파산, 불안과 공포, 우연과 유한의 염려 속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사업은 좌절의 연속이다. 모든 사업 속에는 각각 고유한 절망이 깃들어 있다. 어떠한 사업도 완성되지 못한다. 사업은 미완성의 진행형으로만 자신을 표현한다. 사업가의 능력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단하고 책임지는 데서 발휘된다. 급격히 변화하는 상황에서는 깊이 숙고하는 이성적 판단에 앞서 거의 반사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의 결단은 다른 것에 대한 체념과 부정을 수반하며, 때로는 앞뒤의 맥락을 잃은 모순된 선택까지도 용인한다. 자본가의 정열은 파괴에의 정열이고 자본가의 의지는 맹목적인 의지이다. 최선의 것도 분쇄되고 마는 사업의 세계에서 기업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재 이 순간에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다. 그는 선택을 위해 선택하며 결단을 위해 결단한다. 그의 가슴에 벌레처럼 도사린 부채와 고뇌, 결핍과 공허가 그에게 맹목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결핍은 동적인 연관의 구조이기 때문에 이미 되어 있는 정적인 상태에 고착되지 않는다. 결핍을 메우기 위한 선택의 여정에는 자기의 입장을 수정하며 긴장을 푸는 휴식이 없다. 자본가는 자기의 한계를 자각하는 데서 얻는 휴식을 모르고,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이 선사하는 겸허를 모른다. 그는 헛된 수고, 부질없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도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영원히 실패를 거듭하는, 목적 없고 내용 없는 자본가의 세계에 있는 것은 오직 굶주리는 자유, 자살하는 자유, 거기에 있는 자유뿐이다. “원죄란 내가 타인들이 사는 세계에 태어났음을 말한다”는 사르트르의 명제는 세계가 폐허이고 격전장이라는 의미이고 자본주의 사회가 빈곤과 기아, 살육과 학살의 장소라는 사실이다. 타인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나는 자신이 도구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나의 근원적인 타락은 타인의 존재에 원인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가변 자본의 흐름과 불변 자본의 흐름을 미분 계수로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개별 수입의 흐름과 은행 융자의 흐름을 미분 계수로 나타낸다. 이 미분 계수가 나날의 노동을 순수한 노동력의 흐름으로 바꾸고 수입과 융자를 순수한 자본의 흐름으로 바꾼다. 돈이 돈을 낳고 가치가 가치를 낳는다. 가치의 흐름은 흐름의 잉여 가치를 낳아서 흐름의 수위는 끊임없이 높아진다. 수입의 흐름과 융자의 흐름을 동일한 단위로 측정하고 하나의 미분 계수로 통합하는 것은 희극적 사기이다. 기업의 대차 대조표에 기재되는 융자는 봉급 생활자의 수입과 동일한 돈이 아니다. 융자는 자본의 힘을 표시하는 수단이고 수입은 사용 가치에 지불하는 수단이다. 은행의 신용은 돈의 순환을 비물질적인 어음의 순환으로 대체한다. 융자의 흐름은 기업의 무한 부채에 자본의 형태를 부여하고 한 번도 실제로 적용된 적이 없는 태환(兌換) 가능성의 환상을 화폐에 부여한다. 돈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수입의 흐름과 융자의 흐름을 미분 계수로 통합하는 자본주의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일종의 망상 체계이다. 별들의 거리와 전자(電子)들의 거리를 통합하는 미분 계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을 규제하고 사회를 규격화된 벽돌들로 짜 맞추려고 한다. 자본주의에는 규제되지 않는 흐름이라면 어떤 것도 흐르게 하지 않으려는 군주적 통일의 원리가 내재한다. 자본주의는 무의식의 리비도가 부착하는 대상들의 모서리를 깎아 반듯하게 다듬고 싶어한다. 생산 양식에 맞추어 욕망들을 규격화함으로써 억압적 질서에 순종하는 온순한 신하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이다. 돈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교사,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목사 ―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경비병들이다. 자본주의는 결핍과 실업과 원하지 않는 노동을 존속시키는 생산 양식이다. 그러나 아무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자본의 창고에 저장할 수 없는 욕망의 낯선 흐름을 고갈시키지 못한다. 욕망은 결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욕망은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철벽에 틈을 낸다. 인간은 먹는 것과 섹스를 욕구하고 사랑과 미움과 무관심을 언어로 표현한다. 욕구는 행위로 충족되고 요구는 언어로 표현된다. 인간이란 존재론적 결여로 규정되는 동물이다. 인간은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니며 항상 ‘아직 없다’이다. 이 존재론적 결여에서 욕구와 요구를 뺀 것이 욕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욕망을 채울 수 없고 어떤 언어로도 욕망을 표현할 수 없다. 라캉은 중세에는 윤리를 지혜+용기+절제 또는 건강+재산+친구와 같이 합산 형식으로 생각했으나 근대에는 윤리를 주체-비본질적인 것들=선험적 주체와 같이 감산 형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라캉에 의하면 사드는 욕망과 쾌락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최초의 윤리학자였다. 욕망의 소단위 대상들을 따라가면서 자본주의의 통계학적 담론에 대항함으로써 군주적 통일의 원리를 거짓된 것으로 드러내 보이는 작업이 인문학 연구이다. 인문학은 자본주의 통계학의 큰 단위들과 무관한 미립자와 파동과 진동을 연구한다. 인문학은 욕망의 물리학이다. 자본주의는 사실을 논리로 바꾸고 논리를 도덕으로 바꾼다. 도덕이란 지배 계급에게 잉여 가치와 과잉 억압을 유지하도록 보장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인문학은 논리와 도덕을 무시하고 욕망의 불신봉주의를 따른다. 목표와 근거, 원리와 규준이 없이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항복하지 않고 자기 연민이란 어리석은 감상에 떨어지지 않으며 자본주의를 견뎌내고 자본주의에서 탈주하는 것이 인문학의 작업이다. 전체를 궁극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과학주의자들의 확신은 비과학적인 미신에 불과하다. 과학적 증명의 힘은 영향의 범위가 너무도 좁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는 무슨 이론 장치 대신에 먼저 아무런 엄호도 받지 않고 물으면서 자리 잡고 견뎌나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운명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만 인문학자는 근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열된 현실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정직한 욕망이다. 욕망만이 인간에게 사실을 시인하는 겸손과 미지의 영역으로 자신을 개방하는 용기를 선사한다. 욕망은 있음이 아니라 넘어서서 있음이다.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욕망의 훈련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면서 욕망을 계산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라고 비난하는 자본가들은 욕망이 모든 한계를 넘어서서 묻는 인내임을 모른다. 독단주의와 허무주의라는 파시즘의 근원악은 현실의 질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지식에서 나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명의 본래 모습을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였다. 지식 체계, 개념 구조, 이론 모형 같은 기관은 신체가 필요해서 만들고 쓰고 바꾸고 버리는 것들이다. 강을 건너고서도 뗏목이 아까워 자기 길을 떠나지 못하는 바보처럼 어쩌다가 한번 얻은 지식이 아까워 기관 있는 신체를 물화된 실체로 고정시키는 것은 인문학의 타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본 사회의 분열상이 우리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운명이 미래를 과거로 더럽힘으로써 생명의 자연스러운 율동을 응고시킨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비록 출구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라고 단정할 권한이 없다.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엉터리 7언시를 지어 인문학 공부의 방향에 대하여 가르친다. 이것은 물론 평측도 없고 운도 없으므로 시는 아니다. 다만 기억의 편의를 위해 시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보았을 따름이다.

資本論精神分析
漢文英語獨佛日
版本評傳文學史
恒不忘集中細部

나는 인문학자들이 서양에서 나오는 새 이론들을 너무나 부지런히 따라다니는 것에 대하여 마땅치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연구가 마치 뉴욕이나 파리에 먼저 뛰어갔다 오는 사람이 이기는 경주처럼 되어서야 그것을 어떻게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학생들에게 “『자본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보았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말한다. 직업이 다른데 언제까지 할 일과 무관한 책들을 따라다녀야 할 것인가? 정신 분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분야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정신 분석을 모르고 인문학을 연구하는 데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을 것이다. 라캉은 죽은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미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여전히 토론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정신 분석도 기본 개념을 불교나 유학 같은 우리의 전통 사상과 연관지어 수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가능하면 무의식과 화엄 공동체를 관통하는 욕망의 근거를 찾아보고 싶다. 그 다음은 언어 문제인데 요즈음의 인문학자들의 어학 능력은 선배들의 그것보다 많이 떨어진다. 교토 대학 교육학과를 나온 최현배 선생은 한문과 일어와 독일어를 잘하였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양주동 선생은 한문 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잘하였다.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겨우 영어 하나로 버티려 하니 보는 시각이 애초부터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문을 읽지 못하는 것은 인문학자로서 아마 치명적인 결함이 될 것이다. 판본 연구와 평전 연구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기 부끄러울 정도로 업적이 미약하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 학자들의 책을 보고 무모하게 거창하다는 말을 한다. 세부에 집중하는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글에 공을 들이는 간절한 정성이 약해지는 것이다. 최현배 선생은 일제의 취체를 피하려고 하루에 쓴 원고를 매일 밤 땅에 묻었다. 양주동 선생은 향가를 연구하다 급성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부인이 걱정하니 “염려 말라. 하느님이 이 나라를 영원히 망하게 할 생각이라면 나를 죽이겠지만 백 년 후라도 다시 세울 생각이 있다면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공부할 사명감과 긴급한 과제가 있었다. 국어국문학 분야에서 『우리말본』과 『고가 연구』를 이을 세번째 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이 책이 후학들에게 세번째 책을 내도록 격려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2003년 3월
김인환

목차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의 통합과 확산

실학과 허학

만세 전후

정념과 거리 ― 나도향 주요섭 채만식의 소설

여성주의 소설의 미학

현실과 도덕 ― 조세희론

조지훈론

2002년의 작가 상황

소설 산책
1. 열어놓고 지키기 ― 한무숙
2. 객주의 시대 ― 김주영
3. 귀환의 의미 ― 문순태
4. 모순의 시학 ― 백시종
5. 부활하는 새 ― 윤후명
6. 특별한 기준 ― 김형경

현대 시화
1. 비유의 힘 ― 이장희
2. 형식의 윤리 ― 김춘수
3. 경험의 지혜 ― 신경림
4. 기억의 놀이 ― 김영태
5.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6. 작은 것의 소중함 ― 김지하
7. 한 시인의 외면과 내면 ― 오세영
8. 여자와 남자 ― 김혜순·이영유

작가 소개

김인환 지음

김인환은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평단에 나왔다. 지은 책으로 『언어학과 문학』 『비평의 원리』 『상상력과 원근법』 『한국고대시가론』 『동학의 이해』 『문학교육론』 『문학과 문학사상』 『다른 미래를 위하여』 『기억의 계단』 『의미의 위기』 『현대시란 무엇인가』 『The Grammar of Fiction』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로스와 문명』 『주역』 등이 있다. 2001년 김환태 평론문학상, 2003년 팔봉비평문학상, 2006년 현대불교문학상, 2008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며 2015년 현재 우송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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