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도움말]
아스테릭스가 영국으로 가져간 이상한 풀이 영국 홍차의 기원이 되었다?
사실 영국인들이 차를 수입한 것은 중국이었습니다.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동양으로 진출한 유럽인들은 중국인들이 달여 마시는 풀잎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유럽으로 가져간 것이죠. 영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차를 받아들였을 때에는 녹차의 비율이 홍차의 비율보다 높았으나, 점점 홍차가 더 많이 애용되었다고 해요. 영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홍차가 뿌리내리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고 합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대륙 사람들이나 미국인들이 커피를 즐겨 마시는 데 비해 영국 사람들은 홍차를 더 즐겨 마십니다.
아침에 일어나 모닝 티를 마시고, 오전 11시경 티 브레이크Tea Break 시간을 가지며, 오후 3~4시경 과자나 간단한 케이크를 곁들여 홍차를 마시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를 즐기는 영국인들에게 차 마시는 시간은 가히 신성의 시간이라 할 만합니다. “한 잔의 홍차를 마시기 위해 잠시 일손을 놓는다”는 영국 노래 가사가 말하고 있듯이, 티 타임에는 모든 것을 잠시 멈추는 영국 사람들. 로마군과의 전투도 잠시 멈추는…… 그런데, 영국 사람이 마시는 홍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용하는 방식으로 홍차에 레몬 조각을 띄운 것이 아니라 홍차에 우유를 탄 밀크 티입니다.
홍차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번 모험에는 영국 사회와 영국인들의 특징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안개가 자주 끼는 날씨라든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화나는 상황에서도 점잖은 영국 신사, 이와 대비되는 럭비에 열광하는 그들의 모습을 들 수 있겠죠. 정열적인 라틴족의 피를 물려받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사람들에 비해, 영국인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만사에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침착한 영국인들의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는 축구에 열광하는 영국인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기도 하죠. 영국 ‘훌리건’(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무리)은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훌리건이 생긴 것도, 축구에 대한 영국인들의 절대적이고 열광적인 지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축구와 럭비가 생겨난 곳도 영국이고, 테니스나 골프 같은 운동을 근대적인 스포츠로 만든 사람들도 영국인들입니다. 럭비는 영국에서 아주 인기 있는 스포츠로 1823년 한 학생이 축구를 하던 중에 공을 손으로 잡고 상대방 골대를 향해 뛴 것이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이번 모험에서 볼 수 있는 영국의 명물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잔디, 2층 버스, 비틀스, 좌측통행을 하는 영국의 자동차들, 그리고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인 런던탑이 있군요. 그런데 이들 영국인의 조상은 누구였을까요? 골 정복을 마친 카이사르가 브리튼 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었던 민족은 켈트족이었습니다. 켈트족은 고대 유럽 전체에 퍼져 살던 민족으로, 그중 지금의 프랑스 땅에 살던 켈트족이 바로 골족입니다. 이 책 p.10에서 “브르통인들은 골 사람들과 닮았다. 많은 브르통인들은 브르타뉴에 정착하기 위해 골로부터 온 종족들의 후손이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은 서로 ‘사촌’인 셈이죠. 켈트족의 일파였던 골족인,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가 로마군에 대항해 싸우는 그들의 ‘사촌’을 도우러 간 이야기가 바로 이번 모험이죠.
로마군들은 템스 강가에 런더니움(런던의 어원)이라는 요새를 짓고 영국을 지배하게 되죠. 로마군의 영국 지배는 5세기, 게르만족의 침입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함께, 그 일파인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영국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은 켈트족을 험한 산악 지대로 몰아내고 섬 중앙의 평야 지대를 차지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란 앵글로족이 사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영국은 바로 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의 4개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 왕국으로 그 공식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입니다. 복잡하죠?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국을 단일 국가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 영국은 4개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 국가입니다. 이들 4개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영국인British이긴 하나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방에 대한 소속감과 자긍심이 강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불러주기보다는 잉글랜드인, 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북아일랜드인으로 불러주길 원한다고 합니다. 잉글랜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앵글로색슨족의 자손들이 많고, 그 나머지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켈트족의 자손들이라고 해요. 그런데 2000년 전에 있었던 켈트족과 게르만족 사이의 갈등이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듯, 지금까지도 이들 사이에는 종교·정치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유럽에 속하면서도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위치하는 섬나라 영국. 하지만 먼 옛날에는 영국 땅이 유럽 대륙에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프랑스 땅과 붙어 있었던 거지요. 지금은 도버 해협의 지하를 관통하는 해저 터널이 영국을 다시 유럽 대륙에 연결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이 터널이 건설되기까지 26번이나 계획안이 작성되었다 폐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합니다. 건설 계획이 최초로 제기된 것은 프랑스 루이 15세의 집권기인 1751년이었습니다. 당시의 한 지질학자가 기원전 7~8천 년 전 영국이 대륙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면서 터널로 대륙에 다시 연결하는 구상을 제안했습니다. 1802년에는 한 광산 기술자가 마차용 해저 도로의 터널 계획을 나폴레옹에게 제출하여 승인까지 받았으나 구체적인 건설은 보류되었습니다. 1891년에는 공사가 시작되기도 했으나,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이 영국을 타락시키고 국방상의 위협 가능성이 있다는 반대에 밀려 영국에서 공사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무산되었죠. 결국 1986년 두 나라는 최종 합의에 이르게 되고, 공사는 1987년 시작, 터널은 1994년 개통되었습니다. 오랜 산고 끝에 태어난 터널이라 할 수 있겠죠? 유러터널의 역사만큼이나,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도 복잡하게 얽히면서 발전해왔습니다. 때로는 적대관계로 때로는 동맹관계로 항상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면서 지내왔죠. 마치 형제들 간의 관계가 가장 친하면서도 가장 많이 토닥거리며 싸우듯 말입니다.
우리는 이번 시리즈에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역사적 관계와 영국의 지리와 풍습에 대해서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벨릭스와 아스테릭스의 좌충우돌하는 모험이 더욱 신나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