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해설]
이번에 소개하는 단편 모음집 『러시아 인형』은 인간사에 일어나는 자잘한 이야기가 비오이 까사레스라는 대가의 손을 거치면서 어떻게 우리를 기이한 환상의 세계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는 총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비오이의 미학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가 운명을 달리하기 얼마 전에 출판된 최신작에 속한다. 이 모음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우리를 숨 가쁘게 불안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잔인함에 진저리 치게도 만들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환상 속의 세상을 거닐게도 한다. 또한 현실을 전복하는 예기치 않은 스토리 전개와 그로테스크한 묘사, 완벽한 이야기 구조와 독특한 문체로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이 책은 비오이 소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오이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책은 출판된 지(1991년 3월) 3개월 만에 3쇄를 찍어야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서 시장의 현실은 이 책을 소개하는 데 10년이 걸리게 만들었다.
첫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러시아 인형」은 불안과 초조 속에서 현실을 전복하는 그로테스크한 내용과 기법으로 예기치 않은 결말과 환상적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독자들에게 멋진 결말을 선사하고 있다. 「로취에서의 만남」에서는 작가가 어떻게 독자를 황당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 일을 위해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물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카토」는 예술과 정치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쓰라린 아이러니로 묘사하며 우리에게 인간은 사회적이자 정치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여행자가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가다」는 짧은 내용의 글이지만 몽환적 느낌과 아주 야릇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단편 작가이자 환상문학 작가로서의 그의 역량을 눈부시게 보여준다.「우리들의 여행」은 남성과 여성 간의 묘한 서로 다른 이해 구조를 밝히는 이야기지만 전혀 설명적이지 않다. 그저 웃음을 흘리며 읽다 보면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인 듯하다. 여기에 비오이 특유의 아이러니컬한 유머가 있다. 작가 자신의 여성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나 집착은 바로 이런 면에서인지도 모른다. 작품 구조가 특이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자면, F. B.라는 사람이 고인이 된 자기의 친구 루이스 에레라의 여행 일기 중의 몇 개를 발췌하고 거기에 자신의 서언과 결어를 붙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가 창조해낸 루이스 에레라라는 인물은 살아생전 여성들 때문에 마음 고생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며 죽은 뒤조차 그 여성들에게 버림을 받는 인물로 우리는 그에게 왠지 모를 씁쓰레함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물 아래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극치에 도달한 느낌이 든다. 너무나 인간적이자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에 은근슬쩍 풍겨나오는 유머와 환상적 사건 설정으로 비오이 작품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마르가리따 또는 철분 플러스의 힘」에서 다루는 소재는 평범한 것 같으나 다른 모든 작품들에서처럼 작품 속에 드러난 이야기보다 그 간단한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더 많은 내용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글이다. 이런 경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정도는 그 진폭을 달리한다. 「어떤 냄새」에서는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는 작가의 재주가 참으로 기발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작가가 설정한 사건 자체도 기막히지만 그 사건을 두고 움직이는 인물들의 행동이 절묘하다. ‘3편의 작은 환상 작품’ 중 마지막 작품 「패배한 사랑」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아주 간단한 표현으로 남성의 사랑관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작가의 재주가 특출하다. 한마디로 이 작품집은 참을 수 없는 웃음에서 불안, 초조, 경악, 공포까지 아우르는 그의 절묘한 글쓰기 기법과 무궁무진한 작가의 창의력, 그리고 미로를 헤매다가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정확하게 보여줌으로써 비오이의 문학 세계 및 환상문학의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집은 우리나라에 환상소설의 원형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리고 현실감이 있는 환상소설의 길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소개하는 대표작으로 전혀 손색이 없으리라고 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비오이가 왜, 중남미 환상소설의 대가인지를 그의 글솜씨가 정말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비오이 까사레스가 보르헤스와 함께 집필 편집한 『돈 이시드로 빠로디를 위한 여섯 가지 문제들』과 『환상문학 선집』과 『모렐의 발명』 및 『판타지 이야기』(1972), 『여성들의 영웅』(1978), 『태양 아래 잠들다』 등과 같은 빼어난 환상문학 작품들도 곧 한국 문단에 소개되기를 바란다.
러시아 인형
로취에서의 만남
카토
여행자가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가다
우리들의 여행(일기)
물 아래에서
세 편의 작은 환상 작품 :
마르가리따 또는 철분 플러스의 힘
어떤 냄새
패배한 사랑
옮긴이 해설
작가 연보
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