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의 현상학

원제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M.메를로-퐁티 지음| 류의근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2년 12월 20일 | ISBN 9788932013770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716쪽 | 가격 42,000원

책소개

[옮긴이의 말]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현대 철학의 고전으로, 근대 철학의 고전인 헤겔의 『정신의 현상학』에 비견되는 명저이다. 후자가 정신의 자기 운동과 그 구조를 상설한 것이라면, 전자는 신체의 자기 체험과 그 구조를 기술한 것이라고 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후자를 의식 중심주의로 대변되는 근세 철학의 완성본으로, 전자를 그 완성의 역전판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든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의식 일변도의 서양 철학의 눈길과 발길을 신체로 되돌려놓는 신기원을 이룩한 역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철학의 자기 변형을 초래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로티의 언어적 전회처럼 ‘신체적 전회’라고 이름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전회는 후설의 후기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하나의 사건으로서 현상학적 사유의 막힘 없는 개방성을 실증함은 물론,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리면, “현상학을 실천하는 대로 존재하게 하면서” 서양 철학의 케케묵은 근본 문제, 즉 경험주의와 주지주의의 기나긴 대립을 해결하는 데 빛을 던져주었다. 즉 원자론, 행동주의, 고전 심리학과 같은 경험주의와 철학적 관념론, 선험적 관념론, 내성주의와 같은 주지주의의 대립은 신체의 자기 체험과 운동성에 주목함으로써 시나브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세계의 신비와 이성의 신비로 점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비를 신체성에서 해명해갈수록 인간의 삶과 경험은 철두철미 대지에 붙박고 있다는 것을 계시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 점을 확대 반성하면 할수록 ‘세계-에로-현전’하는 것이 이 신비를 풀어나가는 매듭이요, 고리요, 열쇠임이 부각된 것이다.
‘세계-에로-존재’는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적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삶의 자리 또는 현장, 상징화해서 대지에서 찰나라도 벗어나 있을 수 없다는 이 사실fait이야말로 우주가 인간에게 분수하는 몫, 즉 운명의 신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신을 모독하고 대지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를 메를로-퐁티는 반복, 공명한다.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생을 현상학적 운동사 또는 실존적 현상학의 역사에서 메를로-퐁티만큼 역설하고 거듭 강조한 이는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그 어느 누구보다도,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보다도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삶과 경험의 실존성을 현상학적·이론적으로 철저하고 미세하게 또한 극도로 유연하게 그리고 긴장감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다. 비록 그가 실존성을 몸으로 사는 치열성에서는 사르트르보다 뒤떨어진다는 평을 받을지 몰라도, 실존 구조의 극성을 그 극까지 적시해내는 작업에서는 사르트르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역자가 보기에는 하이데거도 능가한다.실존의 극에 다의성 또는 애매성 혹은 모호성이 언제나 관여해 있다는 현상학적 발견이 그의 연구의 최종 메시지인지라 일견 보수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그가 간파해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본질적·사실적 필연성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질-사실-가치(성)라면, 우리가 그 점에 충실할 때만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진리·이성·의식·세계·역사, 요컨대 인간의 삶과 경험의 일체에 대한 해명으로서의 철학이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끝난다면, 어느 누가 자신을 절대화할 수 있겠는가? 애매성과 양의성은 절대성을 금지하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이 인간을 상호 존중하는 길을 열어주고 인간의 반폭력과 평화를 위한 실존적 토대 내지는 윤리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문맥에서 메를로-퐁티는 말년에 선험적 인간을 위한 윤리 체계를 모색하고 싶다는 의향을 피력한 바 있다.그러나 인간 대소사의 본질 구조가 열린 공간과 시간성(주체성)을 가지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자연적 사물, 타자들, 문화적·역사적 제도성과 교착·직조chiasmus되어 있다면, 인간과 만물은 자연화된다. 이것이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 도처에서 전가의 보도로 삼는 ‘인간의 세계성’이다. 이것을 철학의 원리로 삼는 한 우주의 원소arche는 자연성을 넘어설 수 없다. 인간 실존의 현재적 순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적 진리, 순수 기하학적 진리도 인간 실존을 떠나서는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에게는 인간과 세계의 공자연성connaturalite문제였고 중요했던 것이다.이렇게 그에게는 개인의 실존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비자연적·초자연적 실체라는 관념은 거부된다. 그는 자연성 속에서 초자연성이 수육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현재적 공간의 실존 가운데에서 인간의 삶과 경험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미칠 수 있는 초자연적 실재, 즉 『성경』(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적 실재, 신적 에너지가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자연적 명증이지만, 이 명증은 자연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자연적 자연성, 자연스러운 자연성은 물론 인정되어야 하지만 적어도 그것만일 수는 없는, 어떤 초자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가 그것이다.
『성경』의 보고·기록·체험·증언은 결코 신화적-종교적 명증성―이것조차도 현상학적 정언 명제의 것인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의 문제일 수만은 없으며, 현상학적 명증성의 문제일 수 있는 길이 언제나 열려져 있다는 것이 무전제·무편견의 태도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젊은 시절에 가톨릭 교인이었으면서도 현상학자로서 무신론자라고 공언했다가 임종에서 가톨릭교의 장례식을 원했다고 전해지는 메를로-퐁티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 앞의 일러두기에서 적은 대로, 번역하면서 여러 번역본을 참조했다. 영역본은 의미 파악에서 유리했고, 독역본은 각종 문헌 출처가 명확한 장점이 있었고, 일역본은 역주에서 유익했다. 이렇게 기존의 번역본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들보다 나은지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개선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보다 못한 번역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또 원문 없이 읽혀지고 이해될 수 있는 번역이 되었는지도 자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촉박한 기간 안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심정으로 임하기는 했다. 독자의 만족도가 낮다면 달리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향후의 나은 번역을 위한 우호적인 질정과 비판이 있다면 어떻게든 반영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아울러 문장가의 가치를 확연히 보여주었던 문학과지성사 편집부의 김정선님, 이선경님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문장의 유연함과 수려함이 돋보이는 대목은 모두 그들의 덕분이다. 또한 외람되지만, 착오와 결점이 많은 이 번역에 대한 기쁨과 우려를 현상학 연구자로서 한국현상학회 회장 손동현 교수님, 회원 교수님들, 메를로-퐁티 연구자인 강릉대 최재식 교수님, 천안대 신인섭 교수님, 철학 아카데미 조광제 박사님과 나누어 갖고 싶다. 그리고 근 20년간 나의 철학적 눈을 키워주신 경북대 신오현 교수님에게도 이 책을 바친다. 이 번역 연구를 위해 연구비를 지원해준 신라대학교에도 감사한다.
끝으로, 내가 이 번역을 맡아 출판하게 된 과정에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싶다. 후기를 마치면서, 철학이 홀대받는 우리의 교육 현실과 문화 풍토에 대하여 모든 독자들에게 다음의 슬로건을 구전하는 운동을 청원한다―“철학이 살면 나라가 선다.”

목차

서문: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서론: 고전적 편견들과 현상으로의 복귀

제1장 감각

제2장 연합과 기억의 투사

제3장 주의와 판단

제4장 현상적 장

1부 신체

서 론

제1장 대상으로서의 신체와 기계론적 생리학

제2장 신체의 경험과 고전적 심리학

제3장 고유한 신체의 공간성, 그리고 운동성

제4장 고유한 신체의 종합

제5장 성적 존재로서의 신체

제6장 표현으로서의 신체, 그리고 언사

제2부 지각된 세계

서 론 신체론은 이미 지각론이다

제1장 감각한다는 것

제2장 공간

서론: 공간은 인식의 형식인가?

제3장 사물과 자연적 세계

제4장 타인과 인간적 세계

제3부 대자 존재와 세계-에로-존재

제1장 코기토

제2장 시간성

제3장 자유

참고 문헌

용어 해설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대해서

옮긴이의 말

작가 소개

모리스 메를로-퐁티

모리스 메를로-퐁티 (1908~1961)
프랑스의 철학자, 정치평론가. 프랑스의 로쉬포르 쉬르 메르에서 태어나, 1930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병역을 마친 후 여러 국립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첫 작품 『행동의 구조La structure du comportement』(1938년 탈고, 1942년 출간)를 완성했다. 이때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 예컨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레이몽 아롱, 조르주 바타유, 자크 라캉, 에릭 베이유, 시몬느 드 보부아르, 알렉산더 코제브 등과 교분을 가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저술한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을 출간(1945년)하여 ‘몸의 정치’에 관한 그의 독특한 이론을 세웠다. 역시 같은 해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함께 했던 사르트르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한 이후, 당시 지식인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공산주의의 문제’를 포함해, 예술·문학·윤리학 등에 관한 에세이를 연재했다. 이들 에세이 중에서 공산주의에 관한 것들은 『휴머니즘과 폭력Humanisme et Terreur』(1947년)으로, 그리고 예술·문학 등에 관한 글은 『의미와 무의미Sens et non-sens』(1948년)로 각각 출간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스탈린 정권에 대한 그동안의 지지를 철회하는 한편, ‘약탈강국’으로 변질된 소련을 비판했다(『변증법의 모험Les Adventures de la Dialectique』, 1955년). 1952년에는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사르트르와 결별하고 『현대』에서도 손을 뗐으며, 이후 베르그송과 라벨의 후임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61년 5월 심장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몸과 정치와 철학에 관한 강의와 저술에 몰두했다(『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nvisible』, 1964년, 유고).

류의근 옮김

옮긴이 류의근(柳義根)은 경북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고, 버팔로 뉴욕 주립대학교 교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신라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메를로-퐁티의 코기토 에르고 숨」 「메를로-퐁티: 시각과 회화」 「신오현의 메타철학」 등과 편역서로 『철학의 문제와 논증』 『현대 사회와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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