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과 탐구……
웅장한 스케일에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동화, 패기와 힘이 넘치는 동화를 쓰고 싶다고 말해 오던 동화 작가 박윤규의 새로운 동화가 출간되었습니다. 유난히 우리 역사와 환경에 관심이 많아, 우리 땅 곳곳에 서려 있는 역사의 의미와 자연의 중요성을 생동감 있는 필치로 그려 오던 그가 이번엔 태백산 장군봉에 우뚝 서 있는 주목나무의 목소리를 빌려 사랑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 한 그루의 주목나무가 되기까지 무수한 세월을 지내 온 이야기가 한 편의 시처럼, 노래처럼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주목나무 공주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자연과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서 숨쉬고 있습니다. 풀이며 꽃이며 나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그들이 살아 온 이야기가 역사처럼 흐르고 있는 것처럼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나무에 얽힌 사랑의 기쁨과 슬픔, 기다림과 만남의 이야기가 신비롭기만 합니다. 섬세한 터치가 그대로 살아 있는 판화풍의 그림도 볼 만한데 그림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 들려 주는 듯 합니다.
■ 줄거리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났지만 공주로서 지낸 날보다 주목나무로 지낸 날이 더 많은 주목나무. 금수 강산의 머리인 태백산에서 달려온 산줄기가 커다란 둥지를 틀었다가 다시 여러 갈래로 뻗어 가는 곳, 태백산 장군봉에 서서 천 년 동안 간직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주목나무는 공주로서의 삶이 별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이 전쟁의 회오리바람 속이었거든요. 마침내 공주의 왕국도 위기를 맞아 어머니와 함께 태백산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주는 그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어머니와 공주를 돌봐 주던 청년 장수를 사랑하게 되었거든요. 하지만 무서운 전쟁은 청년 장수마저 전쟁터로 불러들이고 말았습니다. 공주의 아버지가 적에게 잡히자 청년 장수가 아버지를 구하러 떠났거든요. 청년 장수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보낸 시간은 어느 새 공주를 백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공주는 천 년 동안이라도 서서 기다릴 수 있도록 주목나무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늘과 땅에 빌었습니다. 어느 날 나뭇등걸처럼 쓰러지고 만 공주는 눈을 떠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졌으니까요. 공주의 몸이 썩어진 자리에 파란 주목나무 싹이 돋아난 거예요. 그렇게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지요. 주목나무는 천 년의 삶을 살아 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오랑캐에게 금수 강산이 짓밟혔을 땐 큰 칼을 들고 나타나 스스로를 연마하던 청년을, 어느 해 가을엔 병든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러 산에 올라온 소녀를 만났습니다. 육백 살이 넘었을 땐 태백산에서 가장 크고 우람한 주목나무가 되었지요. 육백 살이 된 겨울 어느 날엔 우리 땅을 침략한 섬나라 장수를…… 섬나라 장수는 차마 주목나무를 베지도 못한 채 힘없이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구백 년에서 천 년 사이, 기다림은 지칠 대로 지쳐 미움과 원망으로 변해 차라리 온 누리가 물에 잠기기를 기도했습니다. 미움과 원망이 힘을 발휘했는지 동쪽 바다 건너 사람들이 밀려와 이 나라를 삼켰다는 소식이 들려 오더니 이번에는 남북으로 편을 나눈 같은 겨레끼리 싸운다는 얘기가 들려 왔습니다. 원망과 미움을 터뜨린 몇 십 년 사이에 주목나무는 몰라보게 망가졌습니다. 비틀어진 가지는 메말랐고, 잎사귀도 거의 다 떨어지고, 주홍빛으로 아름답던 몸뚱이는 회색으로 썩어 갔습니다. 주목나무는 이제 모든 걸 잊기로 하고 햇빛에 말라 가며 잠들 날만 기다렸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지 한 떼의 병정들이 들이닥쳤는데 쫓기던 한 소년병이 다가와 숨을 곳을 찾더니 주목나무의 옹이구멍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주목나무는 알아챘어요. 그 소년이 천 년 전 손을 흔들며 떠난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처음 자기에게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원한을 품은 청년의 모습으로, 갸륵한 소녀의 모습으로, 칼을 든 섬나라 장수의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이 높은 산꼭대기로 거듭거듭 찾아왔던 것이지요.
전쟁이 끝난 삼십 년쯤 뒤 장군봉은 또 한 번 전쟁을 치렀습니다. 사람들이 주목나무를 마구 뽑아 갔거든요. 다행이 장군봉 지킴이라는 분이 주목나무를 지켜 주었어요. 그 분은 산마루에 오면 가장 먼저 그 주목나무를 찾아가 어루만지며 말을 건네곤 했습니다. 주목나무는 그가 바로 삼십 년 전 옹이구멍 속에 숨겨 준 소년병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소문난 목공예가인 장군봉 지킴이는 주목나무의 새파란 잎사귀가 다 떨어지면 멋진 작품을 만들 것입니다. 이제 천 년의 사랑과 기쁨, 기다림과 만남을 반복해 온 주목나무가 마지막 이파리를 떨어뜨릴 시간이 다가옵니다.
■ 지은이의 말
작가들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많은 이야기를 지어 냅니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지요. 그런데 주목나무 공주는 여느 작품들과 좀 다릅니다. 내가 처음부터 이야기를 꾸미려고 구상하고 취재한 게 아니거든요.약 십 년 전, 나는 다른 일로(실은 첫 장편 동화인 『초록댕기와 눈사람 투비투비』를 탈고하기 직전에 무대인 태백산을 답사하였음) 태백산에 갔는데, 거기서 이상한 경험을 했답니다. 늙을 대로 늙은 주목나무 한 그루가 눈에 박힐 듯이 들어왔어요. 내가 찾아간 게 아니라 마치 그 나무가 찾아온 느낌이었지요. 가지는 비틀어지고 몸통은 군데군데 뻥 뚫렸고, 속은 사람이 들어가도 넉넉할 만큼 패여 있었답니다. ‘천 년의 세월이 한눈에 보이는구나!’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주목나무에 젊은 여자의 모습이 휘뜩 스치지 뭐예요. 그건 번개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지만, 마치 ‘안녕, 나는 주목나무 공주예요’라고 인사라도 하고 간 느낌이었어요.나는 사진을 찍은 다음 수첩에 ‘주목나무 공주’라고 적고는 산을 내려왔답니다.그러고는 까마득히 잊었는데, 어느 날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그 주목나무와 다시 맞닥뜨린 거예요. 사진 속에서 나를 노려보는 그 늙은 나무는 원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보였어요. 하지만 여전히 난 땅에 뿌리박고 꼼짝 않는 나무를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지어 낼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도 자꾸 주목나무가 눈앞에 어른거려서 써 봤는데, 역시 잘 되지 않았답니다.그 후, 주목나무 공주를 포기하고 한창 다른 글을 쓸 때였어요. 어느 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주목나무가 떠오르더니 오래 된 영화 장면처럼 갑자기 몇 개의 사진이 휙휙 지나가는 거예요(지금 돌이켜보니 그 때 잠시 주목나무의 정령과 주파수가 연결된 게 아닌가 싶네요). 나는 즉시 그 몇 개의 사진을 이야기로 이어 주는 글을 썼지요. 그리하여 주목나무를 보고 온 지 이 년 만에 주목나무 공주는 중편 동화가 되어 동화 잡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답니다.글을 쓰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때부터 주목나무 공주가 내 속에 들어앉고 말았어요. 뭔가 제대로 얘기가 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말이에요. 나는 언젠가 창작집을 묶을 때나 다시 한 번 다듬지 뭐, 하고 잊어버리려고 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목나무 공주는 점점 강하게 요구했어요. 자기는 작품집 속에 그저 그런 하나로 남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다시 등을 떠밀린 나는 주목나무 공주 이야기를 고쳐서 썼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기로 작정한 거예요. 그러자면 장편으로 길게 고쳐 써야 했는데, 주목나무 공주는 그걸 싫어했어요. 시처럼 노래처럼 써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어요.하는 수 없이 나는 몇 번이나 더 고쳐서 썼지요. 그런 끝에 어렵사리 출판 계약이 이루어지자 주목나무 공주는 비로소 한시름 놓는 것 같았어요.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답니다. 과연 내가 주목나무 공주가 보여 준 몇 장면을 제대로 이야기로 엮어 냈는지, 또 세상에 나온 주목나무 공주가 오래오래 행기를 풍기며 살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거든요.대체 주목나무 공주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천 년이 넘도록 변함 없는 애절한 사랑……?삶이란 끝없이 되풀이되는 만남과 이별……?현실 세계 그 너머의 이야기……?자연과 사람의 교감……?글쎄요.그건 주목나무 공주의 이야기를 읽는 분들이 생각하고 찾아봐야겠지요.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태백산 주목나무와 영혼의 주파수를 같게 하여 물어 보면 되겠군요. 한 가지 신비한 비밀을 알려 드릴까요?나도 최근에야 알았는데, 사람이 마음을 아주 맑고 밝게 가지면 나무나 새나 꽃하고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꽃이 해님을 바라보듯이 밝게, 나무가 숨을 쉬듯이 고요하고 맑게……하지만 주목나무 공주의 마음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작가인 내가 독자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할 수는 있겠군요. 대개 사람은 백 년도 못 산다고 하지요. 또 한 번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주목나무 공주의 생각은 다른가 봐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나무보다 오히려 사람이 더욱 영원하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영원한 것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과 탐구…… 아마도 그것은 우주와 함께 영원할 지구인의 사랑과 꿈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