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소설이란 소설가의 현재이다. 이야기 속에 과거를 끌어냈든 미래를 상상해놓았든 간에 거기에서 삶을 읽어내는 것은 현재의 눈이다.
이 책에는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아내의 상자」를 빼고 모두 두번째 작품집 이후에 씌어진 중단편들이 실려 있다. 지난 3년간의 내 인생인 것이다.1999년에는 소설을 한 편도 쓰지 않았고 2000년, 2001년, 2002년에 각기 두 편씩을 썼다.
일부러 안 쓰기로 배짱을 부려보았던 일 년이 지난 뒤, 사실 나는 소설을 쓰는 데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그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써놓고 보면 지금까지 써왔던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다 읽고 난 순간 ‘아니야, 안 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충동적으로 파일을 지워버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떤 분류법에 의해 90년대 작가라는 소속을 갖고 있는 나는 90년대라고 통칭되는 모든 현상의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내 소설을 그 틀에만 맞춘다면 거기에는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말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어느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속으로 들어가 똑같은 라벨이 붙은 기성품으로 포장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도로(徒勞)였을 뿐인가, 나는 세상에 대해 무엇을 지껄이고자 했던 것이며 그것마저 할 수 없게 된 지금 내게 있어 소설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동안 소설 쓰는 게 너무 신난다고 농담을 해왔던 나는 그제야 내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들은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최근 K가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마지막 수록곡 「겟 백」은 건물 옥상에서 라이브로 녹음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존 레넌이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오디션을 통과했다.”이 책의 마지막 교정을 마치고 새벽에 잠이 들었다.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의 모습이 아니고 10년 전쯤의 강건한 아버지였다. 벌떡 일어나 아버지 손을 잡았는데 그 손이 너무나 찼다. 비닐 봉지에 든 얼음물 같았다. 꿈속에서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혹독하게 실감했다. 그것은 지난 3년의 내 인생 가운데, 아니 전생을 통해 가장 슬픈 작별임에 틀림없다. 작년 가을 나는 함께 술 마시던 사람이 화장실에 갔을 때 혼자 멍하니 벽을 보며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는 걸까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슬픔은 격렬하지 않았고 오히려 덤덤한 채로 나의 일부가 되었다. 모든 열정의 정체성 역시 격렬함보다는 지독하고 끈덕진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냥, 내 나이에 맞는 사랑의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 소설의 배음(背音)일 수도 있다. 나는 끝까지 냉정한 관찰자의 긴장을 지켜내고자 한다. 중립을 뜻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는 뜨거움도 있고 치우침도 있다. 다만 내 편애가 무엇을 향한 것인지 나 자신과 독자들에게 쉽게 들켜 엄숙하고 상투적인 연적들과 경쟁하고 싶지는 않다.
어릴 때 읽었던 한 전래 동화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등장했었다. 작가와 독자의 직접 소통인 셈이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줄까. 무서운 얘기를 할까 아니면 우스운 얘기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슬픈 이야기로 할까.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대답한다. 무섭고도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 그래서 할아버지는 무서운 도깨비가 우습게도 똥간에 빠지는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던가 하는 줄거리이다. 소설을 쓰는 중에 가끔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때 나는 실컷 웃으면서 읽고, 다 읽은 뒤에는 어쩐지 슬퍼지며, 그 웃음과 슬픔이 만든 좁은 틈 속에 내던져진 채로 불현듯 무서움을 느끼는 그런 소설을 쓰려고 했다.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소설가의 삶이 소설을 만든다. 나는 재미있게 살아서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왜냐하면, 이제 오디션은 통과했으니까.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상속
딸기 도둑
내가 살았던 집
태양의 서커스
아내의 상자
해설·연기(演技/延己)하는 유전자의 무의식에 대하여_김동식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