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여름의 순간들!
“1958년의 가장 뛰어난 미국 그림책”으로 칼데콧 상을 받은 『기적의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어느 여름에 고나한 고전적인 이야기입니다. 한 편의 시와 같은 맥클로스키의 글과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그 여름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책을 따라 메인 주의 여러 섬을 다니다 보면 그 곳 사람들의 바다와 해변 안쪽의 고요한 숲에 대한 사랑이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몰려오는 태풍에 대비할 때의 흥분, 태풍에 넘어진 거대한 나무의 밑둥과 가지 꼭대기를 탐험할 때의 놀라움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 줄거리
바위투성이 해변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섬이 있어요. 그 곳에 가면 시간이 흐르는 걸 볼 수 있어요.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주변이 모든 섬들이 어두워져요. 그리고 저쪽에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요. 비는 온 사방을 적시고 마침내 우리들의 몸도 적셔 줘요. 안개 자욱한 아침에 물가로 나가, 거북 일가족이 청어를 잡아 아침 식사로 먹는 걸 보면 나는 혼자가 아닌 걸 깨닫게 돼요. 바닷가 뒤쪽의 숲 속은 너무 고요해요. 벌레 한 마리가 통나무에 구멍을 뚫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말예요. 또 다른 소리도 들려요. 고사리가 돌돌 말린 머리를 천천히 펴는 소리, 천천히 늘이는 소리…… 어디선가 벌과 벌새들이 나타나 노래를 불러요. 그리고 어느 새 안개가 걷혀요.
지금은 여름이 한창이에요. 바다에는 경주용 요트, 고기잡이 배, 모터보트 등 온갖 배가 점점이 뿌려져 있어요. 하지만 낮이 점점 짧아지고 물에 뜬 배가 줄어들 때가 있어요. 북서쪽에서 불어 온 바람이 자작나무 이파리들을 흔들어 놓아요. 어디로 갔는지 노래하던 벌새도 보이지 않고, 제비들은 보트 창고로 모여들어요. 이젠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요. 아무리 튼튼한 고깃배도 바다에 나갈 수 없어요. 그때는 지켜 보아야 해요. 그러다 물에 잔물결 하나도 일지 않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는 날이 와요. 그 때는 준비해야 해요. 아저씨들이 한 마디씩 해요.
“굉장한 날씨가 될 거야.”
“자, 온다!”
“이제 불어 닥치겠군.”
육지에 가서 먹을 것과 기름을 사야 해요. 태풍을 잘 견뎌 내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온통 배 이야기뿐이에요. 닻과 밧줄과 쇠사슬이 잘 버티어 줄지 말예요. 쇠사슬을 흔들어 보고, 밧줄을 꽁꽁 묶고, 물건들을 단단히 쌓고, 받침 나무를 대면서 준비를 해요. 곧 태풍이 불어 닥칠 테니까요. 교회 종이 파도와 함께 가볍게 흔들려요. 밀물이 온다고 우는 거지요. 처음에는 부드럽게 바람이 불기 시작해요. 처음에는 부드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해요.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 물을 채찍질해 날카로운 파도를 일으켜요. 비도 퍼붓기 시작하고 바람은 세찬 돌풍으로 변해요. 나무가 우지끈 부러지고 현관문 빗장이 열리고 말아요. 책이랑 종이랑 주사위 놀이판이 마루 위로 나뒹굴어요. 아빠가 있는 힘을 다해 폭풍과 싸우며 문을 닫아걸어요. 엄마가 이야기를 읽어 주지만, 바람이 지르는 비명 소리에 엄마 소리가 묻혔다 들렸다 해요. 아빠는 짠 바닷물이 들어오는 걸 막으려고 부엌 타월로 문틈을 틀어막아요. 달이 얼굴을 내밀고 짠물 안개 속에 무지개를 만들어요. 곧 태풍이 멎는다고 약속하는 거지요. 다음 날 아침, 밖에 나가 보면 부러지고 꺾인 나무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요. 커다란 나무 꼭대기를 탐험할 수도 있고, 나무 둥지와 가지 위를 걸을 수도 있어요. 오래 된 나무 밑에서는 인디언의 조개더미를 발견할 수도 있고요. 그 곳은 백인들이 오기 전 인디언 아이들이 서 있던 곳이지요. 지금은 여름의 끝이에요. 섬을 떠나야 할 시간이죠. 조개랑 대합이랑 까마귀랑 갈매기들에게 인사를 해요. 그리고 파도와 하늘에게 마지막 눈길을 던져요. 지금은 놀라움의 시간이에요. 이런 놀라움 말예요. 그 조그만 벌새들은 폭풍 속에서 다 어디로 갔을까요?
■ 옮기고 나서
『기적의 시간』을 번역할 수 있게 되어서 나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몇 년 전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뿌듯함과 그리움 같은 기분,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그 감정이 지금 다시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이 책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함께 하면서 누렸던 즐거움을 모두 불러냈습니다. 강에서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놀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비오는 날이면 더 신나하면서 물로 달려갔습니다. 물속으로 쏙 들어가 앉아 있으면, 비가 물 표면을 후두두 때리는 소리가 세상 어느 음악보다도 더 아름답고 기분 좋게 들렸지요. 물고기, 개구리, 가재, 다람쥐, 산토끼…… 눈이 휘둥그레져서 쫓아다닐 동물 친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데요. 어른이 되어서는 안개 흐르는 숲 속이라든가, 거센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나뭇잎들이 눈송이처럼 펄펄 날리는 날씨, 햇빛에 반짝이는 물과 눈보라 몰아치는 산꼭대기에서 가볍게 날아다니는 새 같은 자연 그 자체가 마음을 흔들었지요. 이 책에는 그 모든 시간과 광경들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뛰어놀던 아이 때의 즐거움과 어른이 된 후 좀더 가라앉은 눈으로 보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돌아보게 해 주었습니다. 메인 주의 섬들에 가 본 적도 없고 사람들이 그 섬에서 어떻게 사는지 자세히 아는 바도 없지만, 이 책은 하나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국적인 신기함과 바로 내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다정함이 뒤섞여 묘한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좋은 그림책은 많지만 이렇게 각별하게 행복한 느낌을 주는 그림책은 그다지 흔치 않습니다. 그림책이란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는 것이 바로 이런 책입니다. 그림 하나하나가 너무나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품들이고, 귓가에 소곤거리는 듯한 글은 그냥 그대로 시 같습니다. 이런 그림과 글을 통해 우리는 자연과 사람의 삶에 대한 전혀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제목 그대로 ‘기적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지요. 이 정답고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힘찬 글을 제대로 옮긴 건지 걱정스럽습니다. 이 번역이 내가 이 책을 보고 느꼈던 놀라움과 행복감 같은 것들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불러일으키는 데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런지요. 이렇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옮긴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번역할 수 있게 돼서 행복한 건 변함 없습니다.
2002년 4월 김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