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세요!
인간이면서 요정으로 취급 받고, 또 요정으로서 인간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샹즐랭. 못생긴 데다가 불행을 몰고 온다는 생각 때문에 인간에겐 외면당하고, 요정의 세계에도 낄 수 없는 외로운 아이 샹즐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 보통 때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눈을 뜨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눈을 절반 남짓 감고. 그렇게 절반 남짓 감은 눈, 즉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는 샹즐랭이, 보이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생각의 잣대를 뛰어넘어 사랑과 신의를 지키고 행복을 찾게 되는 이야기가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샹즐랭은 요정의 아기를 뜻한다. 옛날에 서양 사람들은 요정들이 예쁜 갓난아기를 훔치고, 보기 흉한 요정의 아기를 남겨 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뒤바뀐 남자 아이를 샹즐랭, 여자 아이를 샹즐린이라고 한다.
■ 줄거리
샹즐랭은 방앗간지기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관처럼 위로 뻗친 붉은 머리에, 너무나 진한 초록빛 눈을 하고 태어나 다른 이름도 없이 그냥 샹즐랭으로 불렸다. 샹즐랭은 다른 남자 아이들처럼 싸울 줄도 알고 새총을 쏠 줄도 알았지만, 사람들은 저주 받은 아이라고 생각해 피하고 놀려 대기만 할 뿐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았다. 샹즐랭의 부모조차도……
그런 샹즐랭에게 세상을 구경할 기회가 왔다. 성주의 부인인 로자몽드 부인이 곧 아기를 낳는다며 자신의 개들을 돌볼 시종을 구하러 샹즐랭을 찾아온 것이다. 성에서는 성주와 그의 부인 로자몽드, 성주의 누이인 그니에브르 부인과 그녀의 아들 콜랭이 살고 있었다. 샤즐랭은 성에서의 생활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바깥 세상과 마찬가지로 성에서도 콜랭은 물론 하인들까지 샹즐랭을 놀려 대기에 바빴으니까. 다만 로자몽드 부인만이 따뜻하게 대해 줄 뿐이었다. 로자몽드 부인도 성 안에서 마음을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외로운 샹즐랭은 밤이면 벽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찡그리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샹즐랭의 눈에는 요정들이 보였다.
한편 로자몽드 부인은 예쁜 딸을 낳았는데, 아기에게 닥쳐올 위험을 느꼈는지 샹즐랭에게 아기를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 날 밤 샹즐랭은 이상한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난쟁이 요정 통트들이 여주인의 딸 아리안과 요정의 딸 샹즐린을 바꿔치기 하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샹즐랭밖에 없었다. 난감한 마음에 숲 속으로 달려간 샹즐랭은 ‘눈을 절반 남짓’ 감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샹즐랭의 눈에 요정 파이에트와 투르망틴이 보였고 이들의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요정들이 유괴해 간 아리안 아가씨가 죽어서 다시 샹즐린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샹즐랭은 이 두 번째 유괴를 막아야만 했다. 게다가 그니에브르 부인도 아들 콜랭과 성을 차지하기 위해 샹즐린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몸이 약한 로자몽드 부인은 세상을 떠나면서 샹즐랭에게 아리안을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샹즐랭은 여덟 살의 나이로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아리안도 점점 자라면서 샹즐랭을 무시하고 놀려 댔다. 로자몽드 부인이 없는 성에서의 생활은 샹즐랭에게 많은 외로움과 고단함을 주었지만, 부인과의 약속과 혼자만 알고 있느 ㄴ비밀이 성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한편 그니에브르 부인의 성을 차지하고자 하는 계획은 철저했다. 성주인 동생을 졸라 콜랭과 아리안의 결혼을 허락 받았고, 결혼식 날 성주와 아리안의 포도주에 독을 타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도 샹즐랭은 요정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니에브르 부인이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니에브르 부인은 자기가 손수 준비한 포도주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아들 콜랭과 함께 죽어 버렸으니까. 사람들은 샹즐랭이 네 개의 잔 중 두 개의 잔에 독을 붓는 그니에브르 부인을 보고 쟁반을 바꿔치기 했다고 수군댔지만 샹즐랭은 그런 말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만 생각하고 말할 뿐이니까. 그리고 다음 해 아리안과 결혼해 신의와 사랑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얻었다.
■ 옮긴이의 말
_다른 눈으로 세상 바라보기
옛 서양 사람들은 요정들이 인간의 갓난아기를 몰래 바꿔치기하고 대신 보기 흉한 요정의 아이를 요람에 눕혀 놓는다고 생각했답니다(changelin(샹즐랭)의 change-에 ‘교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의학이나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런 상상은 ‘멀쩡한 부모에게서 어떻게 지독히 못생긴 아기, 나아가 기형이나 불구의 아기가 태어날 수 있는가’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을 해명해 주었고, 게다가 부모에게 ‘우리의 진짜 아기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가엾은 아기를 구박하고 불운의 직접적 책임을 회피할 그럴 듯한 구실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샹즐랭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용모라든가 행동 따위가 보통 사람들하고 다르기 때문에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하고 요사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던 아이들, 그래서 그 등 뒤에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온갖 이야기와 소문들을 달고 다녀야 했던 아이들이었던 거죠. 작가는 왜 이처럼 인간이면서 요정으로 취급 받는, 또는 요정으로서 인간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썼을까요? 그가 과연 요정의 아이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닌 듯 보입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런 명확한 구분을 애써 피하고 의도적으로 중간적인 위치에 주인공을 자리매김해 놓았습니다. 반드시 무슨 교훈을 끌어 내기 위해 이야기들을 읽는 건 아닙니다만, 제 생각엔 작가가 여러분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샹즐랭이 여러 번 사용하는 ‘눈을 절반 남짓 감고 세상을 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군요. 바꿔 말하면, 가끔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라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인간이면서 요정인 샹즐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갑니다. 보통 때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 눈을 절반 이상 감고 요정들을 보지요. 그가 남다른 이유는 요정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늘 요정들의 마술 세계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때로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관점으로 현상의 외관을 훑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순간에는 상투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의 감춰진 이면을 꿰뚫어 바라보기 때문입니다(좀 거창하게 말하면, 중세적 분위기와 세계관을 충실히 살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통찰력이, 슬쩍 새어 나오는 초자연적 진실을 감지할 수 있는 시적이고 예언적인 눈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우매성은, 이 작품을 인용하자면, ‘그저 붉은 머리 소년일 뿐인데 그를 두고 요정의 아이라 생각하는가 하면, 막상 요정의 여왕이 지나갈 때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지 노파로 생각한다’는 데 있지요. 인간은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관대해야 할 때 편파적이고 옹졸하고 심술궂어지거나, 외관의 인상에 휩쓸려 숨겨진 가치를 보지 못할 때가 많지요(누추하고 남루한 자들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혐오감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샹즐랭은 그들 속에 감춰진 진정한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려 보지요). 샹즐랭의 조언대로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안다면…… 과연 로자몽드 부인이나 아리안 아가씨처럼 흔한 편견에 사로잡힌 시각으로 소년의 독특한 용모를 바라보는 대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믿어 주는 사람들에게, 샹즐랭은 불길한 요괴이기는커녕 그 누구보다도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수호자입니다. 그의 기지가 정말로 요정 여왕의 비호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비상한 상상력과 예감에서 솟아난 것인지 누구도 선뜻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것입니다. 요정의 아이가 부리는 마술은 인간에게 해를 가져온다는 세간의 속설과는 달리, 이 작품 속의 샹즐랭은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는 데서, 아니 보려 노력하는 데서 생겨나는 혜안을 남을 위해 씀으로써 신의와 사랑을 지키고 스스로의 행복을 얻었습니다. 또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주변의 시선 역시 바꿔 놓았겠지요. 바로 이런 것이 샹즐랭이 부릴 수 있었던 진정한 ‘마술’이 아니었을까요.
2002년 2월
김예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