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2년 1월 18일 | ISBN 9788932013046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30쪽 | 가격 14,000원

분야 장편소설

책소개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었다.
끔찍한 무엇인가가.”

◈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
하얀 가면 뒤에 도사린 근원적인 공포
실존의 고통과 상처를 극치의 예술로 조각한
한강의 두번째 장편소설

삶의 텅 빈 안쪽을 파고드는 뜨거운 응시
껍데기 이면에 숨죽인 쓸쓸한 진실에 관하여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강이 『검은 사슴』(1998) 이후 4년 만에 펴낸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미술 조각 기법의 일종인 ‘라이프캐스팅(석고 등의 소재를 이용해 인체를 그대로 본뜨는 방식)’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존의 고통과 상처를 치열하게 탐구한다. 풍부한 알레고리와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한 문체로 삶의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작가는 데뷔 이후 대중과 평단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한국소설문학상(1999),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0), 이상문학상(2005), 동리문학상(2010), 만해문학상(2014), 황순원문학상(2015), 인터내셔널 부커상(2016), 말라파르테 문학상(2017), 김유정문학상(2018), 산클레멘테 문학상(2019), 대산문학상(2022), 메디치 외국문학상(2023),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2024), 노벨문학상(2024)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대의 차가운 손』은 “실종된 한 조각가가 남긴 수기 형식의 고백을 통해 사회적 가면 밑에 감춰진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끌어낸다. 일종의 예술가 소설로 인간의 이중적 속성, 존재의 본질과 형식 문제를 치밀하게 파고드는 아름다운 소설이다”(『문학과사회』 2002년 봄호, p. 35). 소설은 미스터리한 조각가의 실종을 다루면서, 그가 남긴 섬뜩하고 비인간적인 조각 작품을 둘러싼 은밀한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인간 정신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한 조각 불꽃 같은 진실이 튀었다 사라지는 순간, 그 무서운 찰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p. 20) 조각가 장운형을 응시하는 화자 H의 시선은 “그토록 쓸모없고 연약한, 부서지기 쉬운 찰나의 진실, 찰나의 아름다움만이 때로 우리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심지어 치유의 힘이 되기도 하는 것”(「작가의 편지―한강」, 『문학과사회』 2002년 여름호, p. 718)이라 언급한 바 있는 작가 자신의 문학적 통찰과도 맞닿아 있다.

한강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책은 여성의 신체를 석고로 본뜨는 것에 집착하는 조각가가 남긴 원고를 복기한다. 인체해부학에 대한 몰두와 페르소나와 경험 사이의 유희가 엿보이며 조각가의 작품에서는 신체가 폭로하는 것과 감추는 것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다. 책의 말미에 있는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라는 문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품 소개 글 전문에서 발췌(출처: 스웨덴 한림원 홈페이지)


가학과 냉소로 얼룩진 삶의 껍질
환유와 은유의 경계에서 육체에 씌어진 내면의 기억들

이 소설은 소설가 H가 우연히 조각가 장운형의 작품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반신마비로 입원한 큰이모를 문병하러 간 K시에서 본 그의 작품은 한 쌍의 남녀가 서로 몸을 기댄 채 손을 맞잡은 형상으로 비교적 온전한 남자의 신체와 달리 여자의 몸은 양쪽 어깨와 팔뚝이 뜯겨 나간 채였고 너덜너덜한 손목 사이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채워져 있다. H는 기묘한 조각 앞에서 일그러진 이모의 반쪽 얼굴을 떠올리며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空洞)”(p. 12)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후 인사동에서 같은 작가의 ‘거대한 검은 손’ 작품을 보게 되고 후배가 쓴 희곡의 초연 무대에서 같은 방식으로 작업한 듯한 석고상에 또 한 번 시선을 빼앗긴다. 뒤풀이 자리에서 살아 있는 육체가 고스란히 빠져나온 듯한 한 줌의 터럭 역시 조각가 장운형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H는 장운형에게 왜 사람의 몸을 본뜬 작품을 만드는지에 대해 묻는다. 자신의 작업에 관심을 보이는 H에게 장운형은 모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지만 H는 이내 거절한다. 이후 H는 장운형의 여동생으로부터 그가 지난 4월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오빠가 남긴 글에 나오는 이들과 모두 만났다는 그녀는 설령 오빠를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생에 오직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오빠를 이해하고 싶다며 글을 쓰는 H에게 장운형이 쓴 글을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H의 만류에도 집에는 장운형이 남긴 수기가 도착한다.
장운형의 유년이 주를 이루는 1부는 추한 얼굴의 소유자 외삼촌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된다. 군에서 잘못 장전한 소총으로 엄지와 검지 윗마디를 잃은 그는 “거친 말씨, 증오에 단련된 눈빛, 매형에게 칼을 휘둘러댈 만큼 독한”(p. 34) 사내가 되었지만 자신의 손만큼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철저하게 은폐한다. 적대적인 외삼촌과 달리 어머니는 마치 하얀 탈을 쓴 듯한 얼굴로 언제나 잘 만들어진 미소와 친절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곤 했다. 자신과 누이들에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그 얼굴은 어린 장운형에게 자신은 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며 언제든지 내쳐질 수 있는 존재라는 불안을 심어준다.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늘 자신이 생각한 대로 판단하고 움직였던 아버지 역시 어린 소년이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사람 취급한 적 없는 처남과 사랑하지 않았던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잠시 반짝이는 다정함을 가진 그의 이면에는 냉소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렇듯 두꺼운 껍데기로 자기 자신을 가리는 데 능숙한 부모 아래에서 장운형은 불편한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어른들에게 더욱 칭찬받는 아이가 된다. 그렇게 소년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기 스스로 견고한 탈을 만들어 덧씌운다. 그렇게 사춘기를 맞으면서 조금씩 옅어지던 그의 유년은 일평생 가족에게 부정당하며 살아온 외삼촌의 죽음과 함께 지나간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손을 타인에게 내보일 수 있게 된 외삼촌을 내려다보며 그는 생각한다. “진실이란, 저렇게 추한 것이로구나”(p. 60).
2부에서 장운형은 자신의 첫 개인전을 찾은 이십대 초반의 L을 만나게 된다. 신장 167센티미터에 몸무게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L의 몸은 그 어떤 곡선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육중한 몸과 대비되는 작고 동그란 얼굴과 희고 섬세한 손이 비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장운형은 L의 순수하고 따뜻한 손에 매료된다. 이후 L은 매주 토요일마다 장운형의 작업실에서 손 모델이 되어 석고를 뜨는 작업을 하며 점차 조각가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L은 자신과 달리 늘 주목받는 친구 O에 대해 털어놓고, 이제 장운형은 L의 몸 전체에 석고를 뜨는 작업을 하며 이내 그녀의 육체가 고스란히 빠져나간 거푸집 같은 덩어리가 훗날 자기 자신의 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L 역시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유년의 상처에 대해 털어놓고 잠시나마 자신의 몸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짝사랑하는 복학생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혹독하게 체중 감량을 하고, 아무도 없는 길에서의 무자비한 폭식과 가학적으로 이어지는 구토 행위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병들어간다. 억지로 속을 게워내기 위해 손가락을 집어넣은 탓에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이 자국이 선명하게 남는다.
1부가 가장 가까운 가족의 신체와 그 이면의 어두운 내면에 대해 들여다보는 소년의 이야기였다면 2부에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작품을 형상화하고 그 이면을 끄집어내려는 청년기의 조각가가 있다.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의 장운형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는 그가 파고들고자 했던 인간의 내면, 즉 자기 자신에게 주목한다. 장운형은 선배 P의 소개로 어딘지 모르게 기이할 정도로 정제된 듯한 청결한 인상의 인테리어 업자 E를 알게 된다. P는 그녀의 투명한 티끌 없음에 매료되지만 장운형은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 거울의 어두운 이면을 발견한다. 장운형은 처음으로 얼굴을 석고로 뜨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이내 작업에 착수하지만 그녀의 얼굴로부터 그녀는 기이함을 느낀다. 이렇듯 작가는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p. 313)는 전언과 함께 우리에게 ‘차가운 손’을 건넨다.


고스란히 떠내어진 삶의 표면을 매만지며
비로소 따뜻해지는 그대의 손

“말하려 하지만 말할 수 없”고 “가리려 하지만 역시 다 가리지 못”(p. 89)하는 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진실이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달리 둔갑하거나 감출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진실과 거짓, 과잉과 결핍, 해체와 봉합, 은폐와 토로 등의 경계 위에서 곡예를 펼치며 살아가는 『그대의 차가운 손』 속 인물들의 모습은 얼핏 기이하고 비일상적으로 느껴지지만, 곰곰 돌이켜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태도이다.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보이는 것, 즉 ‘껍데기’는 무엇이고 ‘내면’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예술 행위에서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이성원, 「육체에 씌어진 기억—한강의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사회』 2002년 여름호, p. 721)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과 가장된 껍데기를 경유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우리와 소설 속 인물들은 인간의 몸을 본뜨는 모방 방법 중 하나인 ‘라이프 캐스팅’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유리시킴으로써 비로소 한 발짝 떨어져 스스로를 바라본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몸이 차가운 석고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결국 가장 정직한 것은 ‘온도’일 것이다. 표정은 꾸며낼 수 있고 손은 침묵할 수 있지만 온도는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p. 62) 아니다. 눈으로 집요하게 분석하며 파고드는 대신 연한 피부로 감각해야 하는, 즉 ‘살아 있음’과 근접하게 맞닿아 있는 차원의 것이다. 이에 L도, E도, 끝내 장운형도 석고액이 불어넣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홧홧한 열감을 통해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내 손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를”(p. 310) 알게 된다. 그렇게 입술을 문지르고 얼굴의 굴곡을 쓰다듬고 가슴의 고동을 느끼며, 그렇게 “따뜻함과 사랑을 혼동해”(p. 168)가며 더워진 손으로 탈이 아닌 무언가를 새로 빚어나가게 될 것이다.


■ 책 속으로

그 안은, 시커멓게 비어 있었다.
마치 벗겨낸 가족을 기워놓은 것처럼, 작가는 조각조각 나누어 뜬 석고의 껍질들을 붙여놓았다. 필시 고의적으로, 섬세하게 이음선을 다든는 대신 오히려 덕지덕지 석고를 덧이겨놓았다. 마치 거꾸로 솔기가 보이도록 박은 옷처럼.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일그러진 괴인간처럼. 폭사한 시체를 수습해 꿰매놓은 것처럼. (p. 11)

그녀의 눈은 마치 내 피부를 꿰뚫고, 내장과 혈관들을 꿰뚫고,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눈을 좋아한 적이 없다. 혐오하지는 않는다. 다만 애처로울 뿐이다. 온몸을 던져 진실을 믿고 보여주려 하는 부류의 사람들, 죽었다 깨어난대도 포커 페이스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내 마음을 끌지 못한다. (p. 29)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소화해내야만 하며─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p. 62)

……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다.
아버지의 나직한 말이 금간 허공에 새겨졌다. 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순 없는 거다.
그 말은 여전히 우스꽝스러웠다. ‘속인다’는 동사와‘자신을’이라는 목적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속일 수 ‘없다’고 했겠지만, 감히 그 두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다. (p. 67)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그때 내가 알게 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사무적인 얼굴의 장의사가 그의 몸을 염습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가락이 잘린 자리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진실은 불쌍한 것이었다. 저렇게 누추한 것이었다. (pp. 73~74)

내가 만들어준 고통 속에서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석고가 잘 굳을 때까지 고통을 연장시켜주는 것뿐이었다. 석고에 파묻힌 그녀의 몸 위로, 마치 그 거대한 흰 더미에 잘못 얹어진 것처럼 그녀의 조그만 얼굴이 솟아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질겅거릴 때마다 그녀의 처진 뺨이 흔들거렸다. (p. 106)

흙덩이는 완전한 난형(卵形)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그것으로 한 여자의 얼굴을 빚어내려 했다. 그것이 L일 때도 있었고 E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민얼굴이었다. 어떤 융기와 굴곡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얼굴이 거기 놓여 있곤 했다. (p. 226)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그 강렬한 양가적 감정의 끝에 쓰라리게 배어 있는 어떤 것이 연민과 흡사한 데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 안쪽을 은근히 베어내는 듯한 그 감정을 나는 당혹감과 함께 느꼈다. 그것은 마치 조용한 갈구처럼, 욕망보다 집요하여 뿌리치기 어려운, 쓸쓸한 이끌림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p. 280)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 313)


■ 작가의 말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韓江

목차

■ 차례

프롤로그
그녀의 차가운 손―序

1부 손가락
외삼촌 | 미소 | 침묵 | 진실 | 용기 | 내 웃음 | 그의 손가락

2부 성스러운 손
슬픈 얼굴 | 아름답다는 것 | 계시 | 외계인 | 괴물 | 추운 입술 | 관(棺) | 그녀의 눈 | 시간 | 흉터 | 비밀 | 증거 | 토끼의 눈 | 잔해 | 러닝 머신 | 행복 | 사랑 | 웃음 소리 | 침묵 | 연극 | 뭉개어진 얼굴

3부 가장 무도회
입술 | 거울 속의 여자 | 악몽 | 모형의 집 | 목소리 | 진짜와 가짜 | 더러움 | 천국 | 멀지 않은 눈 | 데드마스크 | 재회 | 따뜻한 손 | 막(膜) | 당의정 | 피로 | 껍데기와 껍질 | 껍질 벗기 | 네가 원하는 것 | 가면 뒤의 얼굴 | 내 손가락

에필로그
작가의 말

작가 소개

한강 지음

1970년 겨울 광주에서 태어났다.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을 출간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대산문학상, 인터내셔널 부커상, 말라파르테 문학상, 산클레멘테 문학상, 메디치 외국문학상,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다. 2024년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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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ctus
    2008.07.19 오전 8:52

    이 책은 내가 만난 한강의 네 번째 책이다. 따뜻하지 않은 그녀의 책, 상처가 있는 그녀의 책,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은 책들. 반대로 상처를 싸매주는 책, 맘 껏 울게 하는 책들. 담담함이 깊어 소리가 들리는 않는 듯한 그녀의 글들. 책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크게 웃으면 안될 것만 같은 책들. 차가움이 제목에서 그리고 보여지는 것을 통해 처음부터 전해진다.

    작가인 내게 전해진 조각가(운형)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액자소설이다. 운형을 기억하는 나도 나를 기억하는 운형도 보여지는 그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다. 본질이 아닌 껍데기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나의 깊은 곳까지 내가 드러내지 않은 것들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운형의 작품을 한 눈에 알아보는 작가는 처음에 그랬듯이 마지막까지 운형을 알아본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 과연 서로에게 무엇을 보았기 때문일까?

    계부에게 폭행당한 상처를 먹는 것으로 감싸고 살았던 L, 육손으로 태어났기에 놀림을 받았던 어린 시절 전부를 수술과 동시에 싹뚝 잘라버리고 싶었던 E. 그녀들의 겉 모습을 틀로 만들어 작품으로 탄생시키고 싶었던 운형은 알고 있었다. L이 가진 아름다운 손을 통해, 손을 제외한 아름답고 완변한 몸을 가진 E의 얼굴을 통해 L과 E의 상처를 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손을 통해 자신을 찾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숨막히는 석고를 온 몸에 바르고 틀로 만들어 다시 새로운 삶을 주고 싶었고 그를 통해 스스로도 새로운 삶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까많고 커다란 사각 뿔테 안경을 끼자 거울 속의 나는 전혀 나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변장이라도 한 양. 나는 아무에게도 나를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몰래 불안하던 마음이 어루만져진 기분이었다. 그저 잠시의 기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안경의 힘은 나에게 주술적인 것이 돼갔다. 숨을 고를 수 있었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고, 여유를 갖고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51~52쪽 ] 어린 시절 이렇게 시작된 운형의 삶은 안경이라는 껍데기에 의존하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정작 운형은 자신을 깨지 못한 채, 그녀들이 벗어놓은 그 틀 속에 자신을 숨기고 살고 있었다. 운형에게 삶은 온통 상처였던 걸까? E를 사랑하게 되면서 운형과 E은 서로의 상처로 이루어진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로써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짓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313쪽]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나의 작은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있는 어린 시절 동창들의 만남을 꺼리는 작은 일상부터 숨기고 싶은 치부들,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어느 한 순간들. 그러나 그것들을 깨부수지 못해 그것과 함께 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내내 부정하고 싶어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내 부분을 석고를 개어 내어 그 모습을 드러내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의 껍데기를 부여잡고 있는 걸까?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과 개, 그리고 사람처럼.286쪽] 그것이 껍데기가 아닌 껍질이라 하여 내 살과 피를 함께 떼어 낸다 해도 그 틀을 만들고 싶다. 그 껍질을 떼어내면 새로운 껍질이 재생될지 모른다. 새로운 피와 살을 만들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변화되어 새로이 되는 내 것.

    지금까지 만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내 맘에 소리없이 다가오지만 아주 큰 메아리를 남긴다. 내게 즐거움과 동시에 기다림을 안겨준다. 이제 또 그녀의 글을 기다린다. 한강, 그녀는 아마도 지금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또 다른 껍데기를 연신 글로써 만들어 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2. bondandy
    2002.03.30 오전 12:00

    지금 필요한 것은 참신한 표현들이 가득하고 마음을 울리게 하는 단 하나의 소설, 이라는 생각이 들 때 서슴없이 집어들어도 되는 책.

    < <그대의 차가운 손>>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자신의 의식 속에는 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담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로 분류되는데, 액자소설의 화자인 운형은 외삼촌의 손을 통해 인간은 모두 감춰져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운형의 관찰 습관, 자신 역시 남에게 보이지 않는 한 부분을 갖는 것, 조각가로서의 생을 살아가는 것, 조각가가 되어서는 사람의 인체를 직접 뜨는 작업(라이프 캐스팅)을 하게 되는 것, 이 모두는 그 각각이 긴밀하게 연결성을 가지면서 ‘손’이라는 단 하나의 발원지를 갖는다.

    ‘꽁꼼땅꼼’, ‘맨송맨송’, ‘날큼하게’, ‘우렁우렁한’, ‘기름한’, ‘생뚱맞은’, ‘서름서름’ 같은 의태어의 신선함은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소설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여러 명이 술을 함께 마시는 일에 ‘술추렴하다’라는 표현을 쓰고 신발장이라는 말 대신 ‘신장’이라고 말하는 것, 잠깐 자는 잠을 ‘토막잠’이라고 부르는 것, 이쯤에서는 소설가 스스로 한국어에 대한 소설가의 사명까지 더해 작업에 임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 <그대의 차가운 손>>의 저자 한강은 다른 여성 소설가들이 갖기 쉬운 피해의식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편견, 선입관이 없고 공정하다. 그러므로 등장인물의 누구 하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거나, 피해자로 만든다거나, 피해자의 내면으로 너무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렇기에 독자는 누구 하나를 미워하거나 동정하면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수고스러움 없이 편안한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소재상 이 소설의 특징은 ‘조각’이라는 예술장르와 소설 장르를 잘 융합했다는 점이다.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각’을 직업으로 하는 주인공 그리고 자신의 조각에 남겨지고야 말 손자국이나 손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이나 생각들을 감추기 위해 그가 선택하는 것이 라이프 스캐팅이라는 점 등등은 조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좋은’ 소설을 써보고 싶거나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