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삶은 상처’라는 실존적 명제를 1990년대의 그 어떤 소설들보다 강렬하게 부각시킨 작가 한강이 4년 만에 두번째 장편소설을 펴낸다. 삶의 고단함과 속깊은 상처의 쓰라림을 작품 속에 아로새겨온 작가는 더욱 깊고 넓어진 작품세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작가의 말]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韓江
프롤로그
그녀의 차가운 손―序
1부 손가락
외삼촌/미소/침묵/진실/용기/내 웃음/그의 손가락
2부 성스러운 손
슬픈 얼굴/아름답다는 것/계시/외계인/괴물/추운 입술/관(棺)/그녀의 눈/시간/흉터/비밀/증거/토끼의 눈/잔해/러닝 머신/행복/사랑/웃음 소리/침묵/연극/뭉개어진 얼굴
3부 가장 무도회
입술/거울 속의 여자/악몽/모형의 집/목소리/진짜와 가짜/더러움/천국/멀지 않은 눈/데드마스크/재회/따뜻한 손/막(膜)/당의정/피로/껍데기와 껍질/껍질 벗기/네가 원하는 것/가면 뒤의 얼굴/내 손가락
에필로그
작가의 말
이 책은 내가 만난 한강의 네 번째 책이다. 따뜻하지 않은 그녀의 책, 상처가 있는 그녀의 책,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은 책들. 반대로 상처를 싸매주는 책, 맘 껏 울게 하는 책들. 담담함이 깊어 소리가 들리는 않는 듯한 그녀의 글들. 책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크게 웃으면 안될 것만 같은 책들. 차가움이 제목에서 그리고 보여지는 것을 통해 처음부터 전해진다.
작가인 내게 전해진 조각가(운형)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액자소설이다. 운형을 기억하는 나도 나를 기억하는 운형도 보여지는 그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다. 본질이 아닌 껍데기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나의 깊은 곳까지 내가 드러내지 않은 것들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운형의 작품을 한 눈에 알아보는 작가는 처음에 그랬듯이 마지막까지 운형을 알아본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 과연 서로에게 무엇을 보았기 때문일까?
계부에게 폭행당한 상처를 먹는 것으로 감싸고 살았던 L, 육손으로 태어났기에 놀림을 받았던 어린 시절 전부를 수술과 동시에 싹뚝 잘라버리고 싶었던 E. 그녀들의 겉 모습을 틀로 만들어 작품으로 탄생시키고 싶었던 운형은 알고 있었다. L이 가진 아름다운 손을 통해, 손을 제외한 아름답고 완변한 몸을 가진 E의 얼굴을 통해 L과 E의 상처를 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손을 통해 자신을 찾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숨막히는 석고를 온 몸에 바르고 틀로 만들어 다시 새로운 삶을 주고 싶었고 그를 통해 스스로도 새로운 삶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까많고 커다란 사각 뿔테 안경을 끼자 거울 속의 나는 전혀 나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변장이라도 한 양. 나는 아무에게도 나를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몰래 불안하던 마음이 어루만져진 기분이었다. 그저 잠시의 기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안경의 힘은 나에게 주술적인 것이 돼갔다. 숨을 고를 수 있었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고, 여유를 갖고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51~52쪽 ] 어린 시절 이렇게 시작된 운형의 삶은 안경이라는 껍데기에 의존하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정작 운형은 자신을 깨지 못한 채, 그녀들이 벗어놓은 그 틀 속에 자신을 숨기고 살고 있었다. 운형에게 삶은 온통 상처였던 걸까? E를 사랑하게 되면서 운형과 E은 서로의 상처로 이루어진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로써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짓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313쪽]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나의 작은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있는 어린 시절 동창들의 만남을 꺼리는 작은 일상부터 숨기고 싶은 치부들,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어느 한 순간들. 그러나 그것들을 깨부수지 못해 그것과 함께 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내내 부정하고 싶어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내 부분을 석고를 개어 내어 그 모습을 드러내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의 껍데기를 부여잡고 있는 걸까?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과 개, 그리고 사람처럼.286쪽] 그것이 껍데기가 아닌 껍질이라 하여 내 살과 피를 함께 떼어 낸다 해도 그 틀을 만들고 싶다. 그 껍질을 떼어내면 새로운 껍질이 재생될지 모른다. 새로운 피와 살을 만들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변화되어 새로이 되는 내 것.
지금까지 만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내 맘에 소리없이 다가오지만 아주 큰 메아리를 남긴다. 내게 즐거움과 동시에 기다림을 안겨준다. 이제 또 그녀의 글을 기다린다. 한강, 그녀는 아마도 지금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또 다른 껍데기를 연신 글로써 만들어 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참신한 표현들이 가득하고 마음을 울리게 하는 단 하나의 소설, 이라는 생각이 들 때 서슴없이 집어들어도 되는 책.
< <그대의 차가운 손>>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자신의 의식 속에는 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담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로 분류되는데, 액자소설의 화자인 운형은 외삼촌의 손을 통해 인간은 모두 감춰져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운형의 관찰 습관, 자신 역시 남에게 보이지 않는 한 부분을 갖는 것, 조각가로서의 생을 살아가는 것, 조각가가 되어서는 사람의 인체를 직접 뜨는 작업(라이프 캐스팅)을 하게 되는 것, 이 모두는 그 각각이 긴밀하게 연결성을 가지면서 ‘손’이라는 단 하나의 발원지를 갖는다.
‘꽁꼼땅꼼’, ‘맨송맨송’, ‘날큼하게’, ‘우렁우렁한’, ‘기름한’, ‘생뚱맞은’, ‘서름서름’ 같은 의태어의 신선함은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소설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여러 명이 술을 함께 마시는 일에 ‘술추렴하다’라는 표현을 쓰고 신발장이라는 말 대신 ‘신장’이라고 말하는 것, 잠깐 자는 잠을 ‘토막잠’이라고 부르는 것, 이쯤에서는 소설가 스스로 한국어에 대한 소설가의 사명까지 더해 작업에 임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 <그대의 차가운 손>>의 저자 한강은 다른 여성 소설가들이 갖기 쉬운 피해의식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편견, 선입관이 없고 공정하다. 그러므로 등장인물의 누구 하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거나, 피해자로 만든다거나, 피해자의 내면으로 너무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렇기에 독자는 누구 하나를 미워하거나 동정하면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수고스러움 없이 편안한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소재상 이 소설의 특징은 ‘조각’이라는 예술장르와 소설 장르를 잘 융합했다는 점이다.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각’을 직업으로 하는 주인공 그리고 자신의 조각에 남겨지고야 말 손자국이나 손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이나 생각들을 감추기 위해 그가 선택하는 것이 라이프 스캐팅이라는 점 등등은 조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좋은’ 소설을 써보고 싶거나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