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름다운 병

문학과지성 시인선 259

함성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1년 11월 21일 | ISBN 9788932012957

사양 변형판 127x205 · 164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표지글]

아름다운 풍경. 그런 풍경들은 나를 사로잡는다. 강렬한 햇빛을 받고 서 있는 강변의 여름 나무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너무 눈부신 바다, 소실점으로 사라져버리는 길들, 부드러운 벽. 그러나 그런 풍경들은 내가 그들의 바깥에 있을 때만 거기에 있다. 내가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거기에 있을 때, 풍경은 사라져버린다. 풍경은 내가 뛰어들자마자 사라져버린다. 나는 풍경에 의해 소외될 때 비로소 아름답다. 풍경과 나의 距離.

그러나 때로는 풍경 속에서 풍경과 하나가 되어 아름다움을 잃고, 나무나, 노을이나, 움직이지 않는 바위가 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죽음인가? 죽음과 距離. 아니면, 장님의 노래가 있을 뿐이다. 이 우연의 音들은 도대체 어디를 넘어가려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 숲에서, 이런 距離에 있게 하나.

[해설]

목쉰 나무의 노래_정과리

함성호 시의 음역은 최저 가청권 아래에 있다. 그것은 세 개의 상황으로 나타난다. 우선, 시인이 스스로 그것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 “가청권을 넘어선 전자기타 소리가 내 운명이라니”(「케리그마Kerygma」)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 전자기타는 깡깡 울리지 않는다. 이어서 시는 말한다. 사바나에서 나타난 기린의 낮은 목소리와 고래들의 대화아주 느린 그림들이 마치 반복을 잊은 듯 고요히 흘러가고 있다 저 소리는 낮고 고요하다. 이 낮고 고요함이 그 음역의 두번째 상황을 지시한다. 그것은 그의 노래가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괴롭다 얼마나 가슴 깊은 곳에서 너의 이름을 불렀는지 그만, 마음이 흐려져버렸다 (「이름이 없으면, 장미의 향기도 사라지리라」)와 얼마나 오랫동안 속으로 노래를 불러 네가 없는 허무를 메웠던지 (「너무 아름다운 병」)에 진술된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속으로(만) 아주 오랫동안 부른 노래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의 노래는 가장 높은 음자리 위를 진동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음파는 몸의 벽에 막혀 내부에서 소진되어버렸다. 그것은 결국 주체를 목쉬게 하여, 음량을 제로치로 만든다. 나의 푸르른 누벽에 새겨진 목쉰 향내와 (「해변 여관」)에서 보이듯, 이제 소리는 내 쉰 목에 있지 않고 누벽에 새겨져 있게 된다. 그러나 그뿐일까? 내부에서 그렇게 소진되어버림으로써 그의 소리는 예기치 않은 또 하나의 상황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 상황은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귀에 살이 찌네별의 언덕에서사막의 아파트까지(악취와 함께) (「레몬트리」)저 귀에 찐 ‘살’이 내가 부른 노래의 퇴적물이라는 것은 같은 시의 앞 대목:…… 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었다네 에 충분히 지시되어 있다. 귀에 찐 살은 저 사막에 심은 단어들이 화답을 얻지 못하고 쓰레기로 쌓인 것이다. 그 앞면에서 이 상황은, 속으로만 부르는 노래는 내 목에서 소리를 앗아가지만 발화된 음향들은 실물로 남아, 내 안에 쌓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쌓인 것들은 다양하며, 그 편차는 아주 크다. 두 번 거슬러 가면 다시 읽을 수 있는 시구에서처럼 그것은 ‘향내’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거꾸로, 저 앞에서 읽은 시구에서처럼 “마음[을] 흐려”버리고, 금방 읽은 시구에서처럼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이 악취의 원인을 명시하기 위해, 시인은 친절하게 “모든 것들이 썩어가고 있네”라는 말을 삽입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향내와 썩은 내가 실은 하나이고, 마찬가지로 귓속의 죽은 말들의 퇴적이 동시에 화학 변화를 위해 발효하는 기운을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아직 이 세번째 상황의 다른 면을 말하지 않았다. 그 뒷면은 왜 귀 안일까? 라는 물음을 타고 출현한다. 이 물음은 시의 정황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바로 제기된다. 왜냐하면 비록 속으로 부른 노래가 몸 안에만 쌓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굳이 귀에 쌓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말을 한 자이고, 따라서 나의 행동 부위는 귀가 아니라 입이며, 당연히 귀를 행동 부위로 가질 인물은 ‘그녀’로 추정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 물음은 더욱 첨예화된다. 이 물음을 가지고 문제의 시구를 자세히 읽어보자. 그녀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레몬 트리 소금은 슬프게 빛나고 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었다네 바빌론의 강가에서 나는 고백했지 레몬 트리 레몬 트리, 모든 물결들이 나를 춤추네 이 시구는 ‘나’와 ‘그녀’의 존재 양태를 지시하는 단면들을 겹쳐놓고 있다:(1) 그녀 그녀는 소금에 절여져 있다:―그녀는 바다 속에 잠겨 있다.―그녀는 움직이지 못한다.(2) 나① 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한 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었다:―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한 단어를 가득히(천 개의) 가지고 있다.―(그런데) 나는 사랑의 단어들을 (엉뚱하게도) 사막에 심었다: 나의 언어는 불모성이다.② 나는 바빌론의 강가에서 고백했다.―나는 사막에서 강가로 이동하였다.―나는 고백했다. (무엇을 가지고?)―물결들이 나를 춤춘다.이, 다채롭게 반짝이는 단면들은 얼핏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녀’의 형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녀가 소금에 절여져 있다”는 것은 그녀가 방부(防腐)의 상태로 (아마도) 바다 깊숙한 곳에 잠겨 있을 것이며, 움직이지 못한다, 라는 뜻을 가리킨다. 그녀가 바다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나’가 사막에서 강가로 이동했을 것이다. 물론 강물에는 염분이 없다. 그러나 강가로의 이동은 더 긴 유랑으로 이어진다. 그 유랑의 끝에 ‘바다’가 있다: “그 바닷가, 우리들의 유랑과 늘 함께하던/레몬 트리 레몬 트리─ 슬픔이 나를 해변으로 몰고 가네” 반면, ‘나’의 행동과 그 결과들은 해석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우선 ‘나’가 사랑을 위한 천 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나’는 왜 사랑의 단어들을 사막에 심었을까? 시구에 드러난 바로는 ‘소금’에 의해서이다. 두번째 행의 “레몬 트리 소금은 슬프게 빛나고 나는”에서의 ‘빛나고’는 ‘빛나기 때문에’라고 읽힐 수 있다. ‘레몬 트리’는 물론 노랫가락이다. 그것은 “소금은 슬프게 빛나고”라는 진술의 정서적 등가물이다. 아무튼 소금이 슬프게 빛난다는 것이 어떻게 사랑의 단어들을 사막에 심게 하는가? 그것은 사막과 바다 사이에 연관과 단절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암시는 난해하다. 단어들의 기묘한 수사학적 이동을 검토할 때에만 그 암시에서 해답을 건져 올릴 수 있다. 방금 보았던 것처럼 소금은 바다의 은유로서는 그녀를 부동・불변・부재의 존재로서 지시한다. 이때 사막은 염분과 물이 부재한 곳으로서 즉각 바다의 죽음을 가리킨다. 마지막 연: 레몬 트리 레몬 트리, 사막에 귀기울이며 나는 오래 흐르는 물 속에 있네 꽃과 함께 또, 죽음과 함께 에도 나와 있듯이 사막=바다의 죽음은 이 시의 기본 테두리이다. 그 점에서 사막과 바다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듯이, 이항대립을 이룬다. 하지만 이 대목도 단순치는 않다. 우선 ‘나’의 위치가 불분명하다. 시구를 그대로 읽으면 ‘나’는 해변에 도착했고 해변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앞의 연에서 “누가 이 바람과 불의 사막에서”를 읽은 독자라면 그가 아직 사막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사막은 ‘이’ 사막이지, ‘저’ 사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는 ‘나’를 사막과 바다에 동시에 위치시키는 모순을 노출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막과 바다를 지리학적으로 읽지 않고 공간학적으로, 다시 말해, 극적 무대로서 읽는 것이다. 시 전체를 통틀어, ‘사막’은 나의 혼자 있음, 귀에 쌓인 것들의 썩음, 그리고 그녀의 부동성을 비추는 공간인 데 비해, 바다 혹은 물은 나와 그녀의 함께 있음(“우리들의 유랑과 늘 함께하던”의 ‘우리들’), 향기(노랫가락 “레몬 트리”에서 레몬은 무엇보다도 향기의 열매이다), 나의 움직임(유랑, “몰고 가네” “긴 강을 건너”)을 유도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전자는 현실의 이름으로 지시되고, 후자는 열망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나’는 몸은 사막에 있고 가슴은 바다에 있다, 라고 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막/바다의 대립은 몸/마음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립의 이동은 단순히 대립의 악화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 이동선은 오히려 대립의 의미 변화를 발생시키는 선이다. 왜냐하면, 처음의 대립에서 사막과 바다는 서로 극단에 위치할 뿐이지만, 그것이 ‘나’의 신체 안으로 이동함으로써 두 대립자는 동시에 서로를 일깨우는 환기체로서 기능한다. 사막은 바다의 대척지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대척지점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서 곧바로 바다를 생각키우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 귀기울이며”는 이중으로 읽힌다. 즉, “사막에”의 ‘에’는 ‘에서’의 의미로서 ‘사막에서 모랫바닥에 귀를 대고 물소리를 찾는다’로 읽힐 수도 있고, 또는 ‘에 대해’의 의미로서 ‘물속에 들어가 사막으로부터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로 읽힐 수도 있다. 전자로 읽을 때, “나는 오래/흐르는 물 속에 있네”는 열망의 표현이며, 후자로 읽을 때 그것은 사실의 묘사이다. 그런데 그 묘사와 표현이 동시에 한꺼번에 있는 것이다. 그 ‘동시에─한꺼번에’를 가리키는 게, 바로, “꽃과 함께/또, 죽음과 함께”이다(‘꽃’은 바로 앞 연에서 “누가 [……] /찰나지간에 만발하다 져버릴 꽃/슬픈 나의 노래를 기다려줄까?”에 나와 있듯이, 노래의 권화이다). 사막과 바다는 대립자가 아니라 서로 반대편을 비추는 것, 즉 대칭 은유가 된다. 그런데 동시에 소금은 바다의 환유(포함 관계)이기도 해서, 사막과 바다를 인접성의 축 위에 놓는다. 어째 그런가? 시인 특유의 개인어idiolecte 목록집을 엿보게 하는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시들로 건너뛰어야 할 것이다. 우선, 문장이 세계를 지우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모래가 이 집을 방문하던 날 나는 해당화와 같이 바닷가 모래밭에 있었다(「모래의 책」)를 보면, “사막의 모래”는 ‘세계를 지우는 문장’의 동의어이다. 이 역시, 사막이 불모성, 더 나아가 죽음과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모래는 또한 바닷가의 모래와 뒤섞인다. 그럼으로써 사막의 모래에 소금이 섞여 들어갈 가능성이 열린다. 소금은 바다와 사막 사이를 날아다닌다. 그래서 이런 시구도 나온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저 바다의 비늘을 보라사막이 꾸는 꿈과 바람이 물을 밀어 결을 거스르는 무늬를 나는 너의 가설이다 (「아스가르드의 화석」)이로써 사막과 바다는 인접성의 선 위에 놓여, 바다는 사막의 가설로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반면 사막은 그 가능성을 가능케 하기 위한 우연의 무대로 변모한다. 세상의 지평선 너머 저쪽에 사막이 있다그 우연의 길들―나의 우연성 속에 나의 연기성이 있다 (「세상 너머의 기억」)사막이야말로 우연 그 자체이다. 사막과 길의 관계는 백지와 문장의 관계와 같다. 사막과 바다는 대칭 은유이거나 인접 관계라는 의미에서의 환유이다. 대칭 은유일 때 그 둘은 서로를 강렬히 비추고 환유일 때 그것들은 전략과 가설로 긴밀히 연락한다. 여기에서 독자는 다시 「레몬 트리」로 돌아간다. 앞에서 독자는 왜 하필이면 ‘귀’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이렇게 긴 우회를 하였다. 자, 이제 대답에 귀기울여보자. 우선은 바다가 사막이 서로를 비추듯이 귀와 입이 서로를 비추기 때문이다. 귀에 쌓인 단어들은 가장 강하게 입의 발성을 재촉한다. 귀에 살이 찌네 별의 언덕에서사막의 아파트까지(악취와 함께)에서의 악취와 함께 살이 찌는 귀는 향기의 ‘레몬 트리’를 노랫가락으로 희미하게 띄우는 시인의 입과 상호 조응한다(게다가 악취는 대개 입에서 풍긴다). 다른 한편으로 사막과 바다가 전략과 가설의 관계에 놓이듯 귀와 입 또한 전략과 가설의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사막을 연기하듯, 귀도 연기한다. 온몸이 귀가 되어 너를 향해 열려 있는 이 하루 종일 (「해변 여관」)사막과 바다와 마찬가지로 귀와 입도 대칭 은유이자 동시에 환유이다. 시 「레몬 트리」에서 그 관계는 부단히 되풀이된다. 그것은 ‘나’의 귀와 ‘그녀’의 입의 관계로 연장되기도 한다. 그녀는 이 어항의 사랑을 말한다네 라고 적혀져 있지 않은가? 나는 듣는 이이고, 그녀는 말하는 이다. 과연 ‘나’의 입은 말하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 레몬 트리 나는 돼지처럼 먹고그 녀는 붕어처럼 허기를 탐닉하네 나의 입은 먹고, 그녀의 입은 허기를 탐닉한다. 허기의 탐닉은 “어항의 사랑을 말”하는 것과 등가이다. 저 관계의 변주는 더 나아가, 방금 읽은 시구에서의 ‘어항’에서도 작동한다. 앞 행의 “그녀는 붕어처럼”의 ‘붕어’ 때문에 그 어항은 곧 어항(魚缸)을 연상시키지만, 다음 행들의, 신성한 결혼이 치러지는 이 소풍그  바닷가, 우리들의 유랑과 늘 함께하던레몬 트리 레몬 트리― 슬픔이 나를 해변으로 몰고 가네에 의하면, 그것은 동시에 어항(漁港)이다. 또한 악취와 레몬, 열매와 죽음, 꽃과 죽음들이 마찬가지이다.그런데 여기까지 오면, 첫 연의바빌론의 강가에서 나는 고백했지의 ‘고백’은 말로 하는 고백일 수 없다. 시행을 따라 읽어도 ‘나’는 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고 난 후니까, 강가에서는 더 이상 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레몬 트리 레몬 트리, 모든 물결들이 나를 춤추네는 실제의 광경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나’의 고백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레몬 트리……’라는 노랫가락을 속으로 읊으며 추는 춤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춤은 실제 내가 추는 춤이 아니다. 춤의 주어는 “물결들”이며 그것들이 “나를” 춤춘다. 이로써, ‘레몬 트리’의 노랫가락과 물결의 춤이 또한 대칭 은유와 환유의 동시적 관계 속에 놓인다. 무슨 말인가 하면, 노랫가락은 실제로 발음되지 않고, 물결의 격랑을 통해서 환기된다는 것이다(그것의 형태적 표지가 ‘레몬 트리’를 시의 ‘이야기’ 밖에 배음(背音)으로 위치해놓은 것이다).지금까지 독자는 아주 이상한 독서의 유랑을 겪었다. 이 유랑은 서두에서 말한 함성호 시의 음역이 ‘최저 가청권’ 아래에 있다는 진술을 살피기 위해서였는데, 살피기보다는 함께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유랑이다. 그 유랑 속에서 독자는 함성호 시의 의미(원인과 목적)가 즉각적으로 대답되지 않는 것을 본다. 그것은 시구로 대답되지 않고, 시구들 간의 관계를 통해 유추된다. 그 시구들 간의 관계는 때로는 시들 간의 상호 텍스트 관계에 의해서, 때로는 한 시 내 시구들이 형태적으로 분화하고 기능적으로 연계됨으로써 계속해서 질문을 발생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결핍투성이의 형태로 연장되고 얽혀 나간다. 요컨대, 함성호 시의 기본 문장은 ‘A는 B이다’라는 원형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A는 B가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서, A와 B의 관계는 C와 D의 관계를 낳거나 그 관계 속에 삽입된다’이다.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보자면 함성호의 시는 김춘수・오규원의 초기 시와 황지우 시의 중첩과 변용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독자는 함성호 시의 음량이 제로치에 가까운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음량과 달리 소리의 세기는 최고도의 높이로 치솟으려 하고 있다. 그의 물질성을 제거당한 소리는 그것이 목쉰 자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쉰 목은 소리의 최저 수준과 최고도 사이의 대칭 은유와 인접 환유의 텅 빈 구멍이다.그렇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대상에 대한 지향이 수직적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수직성의 탄젠트 값은 아예 없다.저 타오르는 미루나무의 알 수 없는 가지, (「나는 지금도 미루나무숲에 있다」)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밑변이 없는 극소점의 자리, 다시 말해, 대상의 수직적 대칭점에서 곧바로 대상을 치켜올려다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미루나무는 타오르는 형상으로 내게 비치는 것이다. 이러한 수직적 높이, 다시 말해 절대에 대한 갈망은 한국시에 그리 흔하지 않았다. 있었다면 김춘수와 오규원의 초기 시들에 있었을 뿐이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이들 이전에 김현승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현승의 초월적 시 세계는 위로 솟구치기보다는 아래로 내리쪼인다. 다시 말해 그의 시는 초월성에 대한 물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초월성의 렌즈에 현상된 지상 세계의 존재와 당위를 그린다. 이루지 못한 내 노래의 그늘들을 나무, 너는 땅 위에 그렇게도 가벼이 늘이는구나! (「나무와 먼 길」, 『김현승 시집』, 한국시문학대계 17, 지식산업사, 1982, p. 17)에서처럼 그의 수직적 지향은 언제나 수평적 연장을 통해 표현된다. 때로 수평적 세계가 초월적 세계와 같은 형상을 취할 때가 있더라도―그것은 대체로 ‘나무’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나무들도 저들의 빈 손과 팔을 벌려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나무」, 같은 책, p. 182)에서 보이듯이 항상 ‘빈 손과 팔’을 벌리고 있다. 김현승의 나무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을 받아 인간적 등가물로 주물한 뒤 다시 지상으로 내려 보내는 우주 정거장 혹은 성배이다. 지상적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오로지 솟구치기만 하는 순수 초월의 시, 그래서 시쓰기가 곧 “신의 명상”(「아스가르드의 화석」)이 되는 시는 김춘수와 오규원의 초기 시에 와서야 나타난다. 그러니 보라, 함성호의 이름이 없으면,이 사무치는 불의 마음도 사라지리라 (「이름이 없으면, 장미의 향기도 사라지리라」)와 김춘수의 그 유명한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꽃」, 『김춘수 시 전집』, 서문당, 1986, p. 128)는 무척 닮지 않았는가? 이름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유일한 보상적 기호이다. 둘은 같은 정신을 프리메이슨적으로 공유한다. 그러한 정신에게는 지상적인 것은 언제나 천상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연료로 쓰여야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꽃의 소묘」, 같은 책, p. 135)함성호의 ‘미루나무’와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꽃’도 스스로 타오른다. 그 타오름은 지상적인 것을 정화하는 제의이다. 그 곁에서 계절은 歸路를 덮고 있었다 母音을 분분히 싸고 도는認識의 나무들이 그냥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겨울 나그네」, 『길 밖의 세상』, 오규원 문학선, 나남, 1987, p. 17)라고 진술하고 있는 오규원의 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의 ‘인식의 나무’는 모든 지상의 흔적들을 느리고 긴 회오리로 휘감아 “하루를 이고” “첨탑을” 향해 있는 자신의 자세를 연장시키는 데 보태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김춘수는 그러한 절대의 추구를 순수 표상의 형식으로, 오규원은 ‘소멸’의 형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함성호의 절대적 추구에는 아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세계를, 똑같은 형상과 똑같은 규모로(아니 더 크게 더 아름답게) 그러나 완벽히 정반대의 질을 가진 세계가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맑은 밤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도시의 야경이다 마천루의 골격과 피부 미세한 신경 다발처럼 엉켜 있는 고가도로와 지하철의 흐름들 속도는 순결하다(「잔인한 숲」)바로 문명의 도시가 그것이다. 그것이 신의 세계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는 신의 서가처럼 빛난다.” 그래서, 보들레르 이래 숲이 절대의 세계에 도달하는 ‘상징의 숲’이었다면, 함성호의 숲은 “신의 명상에서부터 흔들리는 숲”이다. 이 세상은, 시인의 눈(보통의 숲을 상징의 숲으로 변환하기 위한 절대 요건인)으로 보아도, 순결히 빛나는 결코 “시들지 않는”(「Jabir, Geber, gibberish, 미친 이론가」) 인공 “정원”일 뿐이다. 저 건너편은 단지 이편의 철저한 되풀이 혹은 야금일 뿐이다: “저 다리를 건너면 탄현이 아니라 히말라야가 있을 것 같았다.” 히말라야는 거기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처절한 몸짓도 쓸모 없는 것이다: “이 연극에는 비극이 준비되어 있지 않”(「비극을 찾아서」)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종종 하늘에서 물고기가 떨어진다 나는 바닥을 드러낸 해저에 앉아 물고기의 날개를 뜯어 석쇠에 올려놓고 구웠다 아내는 세탁기 안에서 울 세탁 모드로 잠들어 있다 (「작은 연못」)영혼을 자극하는 음식이 있다; 나에게는 가자미식해 같은 것 (「케리그마」)에서처럼 날것 그대로의 일상성(“울 세탁 모드” “가자미식해”)을 섬뜩하게 차가운 이물질처럼 제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들에는 어떤 미적(탈일상적) 흔적도, 그로테스크하건, 공상적이건, 아이러니컬하건, 숭엄하건, 낭만적이건, 없다. 그것들은 이 “유리와 강철”의 문명을 도색하고 있는 상징과 상상의 온갖 칠이 벗겨져 문득 드러난 “한 줌도 안 되는 실재peu de realit ” 같은 것이다.절대 세계가 실은 인공 세계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80년대 초엽 “이곳은 초토입니다”라고 절규한 황지우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황지우의 정치학을 문명론으로 바꾼 것으로, 동년배인 유하와 함께 함성호가(넓히면 그의 세대가)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인식이다. 그 인식 때문에 젊은 시인은, 김춘수와 오규원이 절대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이미지의 현상학(무의미시, 날이미지)으로 이동하였던 것처럼,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삶의 어떤 부분도, 자연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소외 지대이든, 배제 항목들이든, 과거이든, 미래이든, 삶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탈-현실의 가능성은 최소한의 극점으로 축소된다. 유하에게 있어서, 그런데, 그 극점은 활동의 순간이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생이 엎질러진 곳에 생이 있”다는 인식을 끌어내고 그로부터 죽음과 삶을, 과거와 현재를 바로크적으로 변용하고 과장하는 운동을 일으키게 한다. 반면, 함성호에게 그 극점은 ‘나’로 응축된다. 너의 이름이 줄기는 영원히 꽃에 이르지 못하고우주의 끝을 본 자는 스스로에게 이 꽃을 바치게 될 것이다 (「얼굴」)에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듯이, 함성호의 존재는 언제나 스스로에게로 재귀한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인식과 행동과 정서가 몽땅 스스로에게 회귀하는 자, 그것이 함성호의 ‘나’이다. 그 ‘나’는 “스스로 있는 자”(「거미의 서가」), 엄격하게 말해, 스스로만 있는 자이다.이 단독자가 유리와 강철의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한들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이 기억이든, 연기이든, 투기이든, ‘나’의 모든 행위는 “환등기에 걸린, 다 돌아간 흑백 영화 필름처럼/탁, 탁, 탁, 탁,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흘러간다」)는 것에 불과하며, 그 반복의 결과는아, 幻은 벗겨져나가 신작로 바닥에서 나뒹굴고이제 무엇으로 이 명징한 삶을,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있을지 (「그랑호텔」)에서의 ‘명징한 삶’, 즉 모든 환상들을 박탈당한, 헐벗은 날-육체의 존재의 적나라한 사물성이다. 그는 단독자가 됨으로써 예언자의 지위에 올라서지만, 그 예언자의 순례는 “몰락의 지도를 걷는/이 죽음의 순례”(「죽음의 기하학」)이다. 그러나 이 순례는 멈추지 않는다. 그게 그의 숙명이며 동시에 우연이다. 그가 삶을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마저도 삶 속에서 치러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이 그의 숙명이다. 그러나,죽음의 집들이 겹쳐 살아나는 생은 어떤 반복을 이루려고 저렇게 아예 투명한 건지 (「나비의 집」)에서 보이듯, 죽음-생의 되풀이되는 반복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움직임을 항구화하고 그의 삶을 무의미로부터의 한없이 새로운 출발, 즉 모든 가능성의 열림으로 이끈다. ‘나’는,스스로 방전하는 나무처럼/어쩔 수 없이 확장하는 번개처럼 (「모미」)그렇게 방전하고 확장한다. 그것이 그의 우연이다. 그 우연이 극점의 형태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절대에 대한 솟구침의 형태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연을 사는 ‘나’는 오직 나무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무에 올라/나무가 되어 기다린다”(「작은 연못」). 온갖 우연을. 함성호의 ‘나무’는, 그렇게 해서,나는 해당화와 같이 바닷가 모래밭에 있었다 (「모래의 책」)에서처럼 모래사장에 위치하기 시작해서, “미래로 돌아가는 길”(「목련나무의 기억」)에 “아무도 알지” 못할 나무로 사라졌다가, 신호등 앞에 심어진 나무는 붉으락푸르락한다그렇게 모욕당한다 (「욕된 숲」)의 나무로 세상의 네거리에서 모욕당하기를 번갈아 되풀이하면서,안국역의 빵냄새 빛을 소화하지 못하는 나무는 지하도를 걷고 있다 (「나무는 배고프다」)에 보이듯, 스스로 순례자처럼 걸어가고 마는 것이다. 세상 속에 깊이 갇혀 있는 존재로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의욕을 안간힘 쓰면서 쏘아 올리는 존재, 그것이 함성호의 나무이다. 그것은 필연성과 우연성 사이의 대칭 은유와 인접 환유가 가장 집약되어 있는 존재이자, 동시에 은유이다. 그 나무는 함성호의 ‘나’, 즉 단독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독자는 그의 나무가 말뚝처럼 붙박인 채로 새들처럼 날아오르길 꿈꾸며 치르는 모든 시험들을 새삼 눈여겨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최초의 해안의 나무로부터, 지하도 입구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고독한 표상에서 시장바닥의 횡단에 이르기까지.

목차

▨ 시인의 말

낙화유수
아스가르드의 화석
이름이 없으면, 장미의 향기도 사라지리라
나비의 집
너무 아름다운 병
나는 지금도 미루나무숲에 있다
케리그마Kerygma
비극을 찾아서
jabir, Geber, gibberish, 미친 이론가
발화
흐르는 모래 위에서 망설이는 밤섬을 본다
모래의 책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잔인한 숲
청초호에서
天上列次分野地圖
聖者는 맛있다
封印
목련나무의 기억
거꾸로 서 있는 마을
모미
거미의 서가
자장면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
그랑호텔
해변 여관
상했어, 썩었어, 더러워
고귀한 모험을 찾아서
죽음의 기하학
벚꽃 핀 술잔
레몬 트리
대포항 방파제
옛 그늘
얼굴
욕된 숲
세상이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바다 속 마을
꽃불, 화염
論語
흘러간다
그 민물에는 지금쯤
흐린 유원지에서 나는 운다
나무는 배고프다
고등어
단장
바람과 그늘
알기 쉬운 독도법
Day sleeper
섬, 여관
폭력에 대한 애무
침엽수림에서 흰 모래 해변까지
지옥의 눈물
쿠키
일곱째 날
만든 사람들
고요한 재난
비좁고 긴 골목
더러운 거래-다큐멘터리
일구구팔년 가을
매음의 밤
세상 너머의 지평선
쓰레기의 사막
적막한 강가, 버드나무와 같이, 푸른 뱀과 함께
오호리의 아가씨
썩은 우물
작은 연못
괴로움

▨ 해설 · 목쉰 나무의 노래 · 정과리

작가 소개

함성호 지음

시인 함성호는 1963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1990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56억 7천만 년의 고독』 『聖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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