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불연속성의 시학」이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한 김태환의 첫 비평집.
[책머리에]
이 비평집은 20세기 초에 조이스, 프루스트, 포크너, 카프카 등 고전적인 모더니스트들이 소설 장르에 가져온 혁명적인 변화의 의미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더니즘 혁명은 소설에 대한 관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이후 그 누구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소설을 쓰기는 어렵게 되었다. 오늘을 사는 작가들은 여전히 모더니즘 혁명의 자장 안에 있고(포스트모더니즘 역시 그것의 부분적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더니즘이란 사람들이 흔히 ‘리얼리즘’과 대비시켜 생각하는 ‘모더니즘’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의 리얼리스트는 결코 발자크 같은 19세기 리얼리스트의 스타일로 쓰지 않는다. 모더니즘 소설 미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비평집 모두에 인용된 조이스의 말 속에 담겨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소년 스티븐은 푸른 장미를 꿈꾼다. 이 세상에 푸른 장미는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 푸른 장미가 있을 거라고 스티븐은 생각한다. 여기서 푸른 장미는 스티븐이 동경하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상징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스티븐이 아기였을 때 들었던 노래와 관련된 것이다. 원래 노랫말은 “푸른 벌판에 장미꽃 피었네”였다. 그것을 아기 스티븐은 혀 짧은 소리로 “푸른 장미꽃 피었네”라고 따라 불렀다. 아기 스티븐은 꽃과 그 배경인 벌판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의 의식 속에서 배경을 수식하는 “푸른”이라는 형용사가 인접한 단어 “장미꽃”과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이 과정을 거쳐서 푸른 장미꽃이라는 초현실적 이미지가 탄생한다. 푸른 장미꽃을 향한 소년 스티븐의 꿈은, 우리의 삶과 정신을 구속하고 있는 분리와 경계선(여기서는 꽃과 배경의 구별)을 넘어선 원초적 혼돈의 세계를 향한 꿈이다. 푸른 장미의 이미지는 이런 의미에서 어떤 문화적 가치 구별이나 세계의 인습적인 분할도 알지 못하는 백치 벤자민(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의 주인공)의 혼란스런 의식과 일맥상통한다. 유아적(幼兒的)인 것, 비논리적이고 연상적인 것, 혼란스러운 무의식을 향한 충동이 모더니즘의 핵심을 이룬다. 모더니즘은 그런 원초적 혼돈의 세계야말로 우리 의식 가장 깊은 층에 새겨진 진정한 현실이라고 믿는다. 모더니즘 미학에 대해 성찰하는 가운데 제기되는 두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더니즘 혁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이 하필이면 20세기 초반에 작가들로 하여금 원초적 혼돈의 세계를 꿈꾸게 한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근대 사회의 발전이 초래한 가치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가치 체계가 타당성을 상실하고 자의적인 구속으로 느껴지는 상황에서, 작가들은 선과 악, 미와 추, 참과 거짓, 고귀함과 비속함 같은 가치 구별의 틀에서 빠져나와 세계를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로브 그리예의 경우에서 보듯이 심지어 소설의 언어를 모든 가치 평가적 요소들로부터 정화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시도도 있었다. 모더니즘 이래 이루어진 다양한 소설 작업들은 가치의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가치 체계가 이야기 문법의 토대’라는 생각이다. 플롯의 구조를 선/악, 행복/불행과 같은 가치 대립에 입각해서 분석하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시도된 바 있으며, 그레마스와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가치의 문제를 고려하는 이야기 담화의 기호학을 수립했다. 그레마스에 따르면, 이야기의 줄거리는 정적(靜的)인 가치 체계를 역동화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예컨대 이야기는 선과 악을 구별하고 분류하는 정적인 가치 체계를 토대로 하여 선인과 악인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 문법이 가치 대립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면, 가치의 위기는 소설 속에서 전통적인 이야기 문법의 해체 내지 변형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우리는 가치 체계와 이야기 문법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좀더 정교화함으로써 모더니즘 이후에 나타나는 소설 구조의 다양한 특징을 규명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책의 1부에는 모더니즘 소설 미학 및 가치의 문제와 관련된 이론적 탐색 작업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2부에 실린 글들은 소설 작품에 대한 실제 비평으로서, 여기서는 1부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주로 한국 소설에 나타나는 “모더니즘적” 충동을 추적해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책의 체제는 추상적인 이론과 구체적인 비평의 이분법과는 무관하다. 이론과 실제의 조화로운 일치야말로 이 책의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론적 주장도 정확한 실제 분석을 통해 구체화하려 했고, 실제 비평 역시 잘 정의된 이론적 언어의 기반 위에서 수행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가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지는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달려 있다.
2001년 10월 김태환
책머리에
제1부 이론
슈클로프스키와 프루스트의 모더니즘 미학
소설 텍스트의 반복과 겹침 현상
게임과 비극
이야기의 구조: 주체, 욕망, 가치
그레마스 서사학의 장르 초월적 성격에 관하여
그레마스의 행위체 모델의 수용 문제
제2부 비평
불연속성의 시학_황석영의 「한씨 연대기」와 「낙타누깔」
현실의 시간과 상상의 시간_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이야기꾼의 자의식_이인성의 『한없이 낮은 숨결』
이야기들의 상호 반영_김영현 소설들의 연상적 구조
부서진 액자_서정인의 『용병대장』
이미지와 실체 또는 소설과 현실_김영하론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 나타난 주인공과 환경의 관계
크로키와 포스터, 모방과 창조의 경계선_박성원의 『이상 이상 이상』
진실과 욕망_박성원의 『댈러웨이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