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집단 수용소의 대량 학살과 전쟁을 통한 살육이 한창이던 2차 세계대전 중에 씌어진 『계몽의 변증법』에 대해 J. 하버마스는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이 책은 기술 진보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가공할 야만 상태를 빚어낸 현대는 어떤 시대이며 인류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해명하고 있다.
현대의 학문과 사상은 기술적·실증주의적 정신의 지배를 받아 역사의 의미를 잊어버리거나 망각하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러한 함정에 저항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며, 이 저항은 앞으로만 치닫는 이른바 ‘실천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인 아도르노와 그의 동료 호르크하이머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은 나치즘을 통해 타락한 몰골을 드러낸 서구 중심적인 이성과 문명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20세기의 고전이다.
[옮긴이의 말]
『계몽의 변증법』이 문예출판사에서 초간된 지 6년 만에 이 책의 한국어판 판권을 가지고 있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출간되게 되었다. 새로운 천년에 들어선 현재의 시점에서 이 책이 갖는 의의를 점검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역사적 운동에 대치되는 어떤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이론”이 되고자 하는 이 책의 방법론적 원칙에서 볼 때도 불가피한 작업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두 망명 지식인이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해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한 저서로서,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서는─심미적 차원이 아닌─그러한 야만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불빛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이 책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러한 절망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총체적 파국뿐만 아니라, ‘문화 산업’에 관한 논의를 통해 미국적 상황 또한 구 세계의 파시즘적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명제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1969년에 쓴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들은 “책 속에서 말해진 모든 내용을 오늘날도 아무 수정 없이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적지 않은 부분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느낀다”고 말함으로써 전쟁 중에 씌어진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러한 유보적 입장은 독점자본주의나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그들의 약간이나마 긍정적인 태도와 연관된다. 호르크 하이머가 특히 그러하지만 아도르노도 「계급 이론에 대한 반성」에서 “낯선 노동을 독점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 시장 법칙을 벗어날수록, 전체 사회의 재생산도 시장 법칙에서 벗어난다. 빈곤의 역동성은 자본 축적의 역동성과 함께 정지된다. 지배 계급이 전적으로 낯선 노동에 의해 먹여 살려져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놀라울 정도로 들어맞아, 지배 계급은 노동자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운명을 단호히 자신의 용무로 만들어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하기 위해 노예에게 노예 상태에서라도 그 생존을 보장해주었다”고 말함으로써 마르크스의 궁핍화 이론을 어느 정도 수정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의 역사 진행─특히 초역이 나온 이후 최근 몇 년 동안 폭발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세계 상황─은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이나 복지 국가 이론이 ‘좋았던 옛 시절’의 이야기로 들리게 만든다. 대외적으로는 국가간에 경쟁을 벌이고 대내적으로는 국민 통합을 일구어나간다는, 초기 국민 국가 형성기 이후 근대 국가의 근본 용무는 20세기 국가독점자본주의에 오면 더욱 강화되었지만, 국가든, 인간이든, 의미든, 역사든, 단단한 모든 것은 봄눈 녹듯 녹는 보편적 ‘해체’의 시대, 포스트모던한 상황이 도래하면서 더욱 순수하고 완전해진 ‘자본의 논리’는 개정판 서문에서 보여진 유보적 태도를 다시 한 번 유보하도록 만든다. 이 책과 같은 시기에 씌어진 『최소한의 도덕』에서 아도르노는 이미 “두려워해야 할 사태는 인류가 유복한 생활 속에서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연이라는 가면을 쓴 사회성, 즉 만듦이라는 맹목적 분노로서의 집합성이 살벌하게 확장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제 이러한 두려운 사태를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미국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느낄 수 있는 소비 사회의 풍요 뒷면에서 사람들은 신 자유주의나 세계화가 요구하는 무한경쟁시대의 공포와 불확실성을 예감한다.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는 해방, 자유, 민주와 같은 관념과 연관된 ‘정치적인 것’이 역사를 결정하는 요인이었고 경제라는 하부 구조는 잠재해 있는 최후 심급이었다면, ‘자본의 논리’는 이제 이 최후 심급을 전면에서 활동하는 요인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물질적 가치나 교환가치는 유일한 가치가 되었고 눈앞에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할 수 없는 실증주의적 세계관은 점점 더 절대적 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책의 저자들이 두려워한 ‘총체적 체계’는, 저항이나 절망이나마 가능했던 당시보다 오늘날의 현실에 더 잘 해당되는 것처럼 보인다.
개정판 서문이 씌어진 이후 30년 간의 이러한 역사 진행 속에서 달라진 몇몇 변수들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당시보다 지금의 시대를 해석─해석이라는 용어 자체가 해괴한 느낌을 주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아닌 본래의 ‘앎’을 추구하려 한다─하는 데 훨씬 더 유효한 기본서가 될 것이다.
이 번역서는 본래 강릉대에 있는 주경식 선생님과 공역으로 출판하였었는데, 번역에 상당한 기여를 해주었던 두 분께서 이 번 문지판에는 빠지겠다는 제안에 의해 단독 이름으로 역서를 내게 되었다.
좀더 나은 번역서를 만들기 위해 이번 개정판을 만들면서는 아도르노를 전공하거나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신 분들께 메일을 보내 기존의 역서에서 발견된 오역이나 개선점들을 수정했다.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계속하여 좀더 나은 역서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이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임홍배·임홍빈·최성만·홍승용·조만영·노명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번역 원고가 사장되지 않도록 결단을 내리고 꼼꼼히 문장을 검토해주신 김병익 선생님과 문지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2001년 7월 진주에서 김유동
개정판 서문
서문
계몽의 개념
부연 설명 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부연 설명 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스케치와 구상들
‘사실에 정통함’에 반대하며 /두 개의 세계/지배로 변하는 이념/ 유령에 관한 이론/
어쨌든 마찬가지다/ 동물심리학/ 볼테르를 위하여/ 분류/ 눈사태/ 교통에 의한 고립/
역사철학 비판/ 휴머니티의 기념비/ 범죄자의 이론/진보의 대가/ 공허한 경악/ 육체에 대한 관심/ 대중 사회/ 모순들/ 개인적인 관찰/ 철학과 노동 분업/사유/ 인간과 동물/
프로파간다/ 우둔함은 어떻게 생겨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