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전쟁 속을 청춘으로 관통한 불행한 세대의 노년을,
의식과 잠재의식의 중첩을 통해 새 기법으로 형상화한 김원일의 새 연작장편소설!
[해설]
육체의 소멸과 죽음의 상상력 ─ 김원일의 새 연작장편소설
_김 주 연
1
인간은 정욕과 자기의(自己義)로 뭉쳐졌으므로, 아마도 저주받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은 가능한 것일까. 가령, 기독교에 의하면,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써 그것은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믿기만 하면 되는 이 사실을 잘 믿지 않으려고 할 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조차 그 믿음이 자주 흔들리는 어려운 상황 속을 늘 지나다닌다. 김원일의 이번 소설은 이같이 현실과 치열하게 맞닿아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정욕과 자기의, 혹은 욕망과 교만의 현장은 바로 인간의 육체다. 최근 문화 담론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몸’이 그것인데, 페미니즘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핵심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몸’은 그에 대한 문화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욕망과 교만의 현장임이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욕망과 교만은, 그것이 비록 저주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실존하는 한 그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조건 죄악시 될 수만은 없다. 작고한 평론가 김현과 나는 80년대 후반 이 문제로 꽤 심각한 논의를 주고받은 일이 있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그에 관한 일련의 사고들에 주목하고 있던 그는 욕망저주론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지적 교만 없이 어떻게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되묻곤 했다. 결국 “김주연에게 이 책을 바친다”면서 지라르를 번역 출판했던 그에게 나는 그가 간 지 10년이 넘었어도 아직 명쾌한 해답서를 바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의 사후 출간된 나의 모든 저작물이 그 답이 아닐까 자위해본다. 과연 욕망의 육체를 지닌 채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는 대답 앞으로 나는 씩씩하게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 당위성과 가능성은 위축된 나를 격려하고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질 어느 날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육체―그것은 우리의 실존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표징하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이다. 육체는 쾌락과 편안을 통해서 제 몸을 유지하지만, 바로 그것들을 통해서 동시에 소멸해간다. 가장 결정적인 그것의 결함은 시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운명적 한계에 기인한다. 쾌락과 편안을 통한 육체의 자랑과 자부심이라는 최근의 문학 경향에 대해서, 김원일은 여기서 맞선다.
숨길이 가빠진다. 참으로 야릇한 일이다. 까마득히 잊어버린, 떠올려도 예전의 느낌조차 아슴아슴하던 성감이 이 나이에 다시 살아나다니. 그네는 코앞에 떠도는 향기를 살며시 끌어안는다. 〔……〕 미나리의 여린 이파리가 흔들리며 일으키던 질 안의 성감이 향기를 뒤쫓아 문틈 사이로 빠져나간다. 미나리가 뿌리째 뽑혀 질을 탈출해버리니 쾌감이 언제였나 싶게 사라져버린다. 놓쳐선 안 돼. 널 잡아야 해. 널 놓치면 난 송장이 되고 말아.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숨 끊어질 시간만 기다리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 거야.(42~43쪽)
김원일의 소설 문장이라고는 보기 힘든, 관능적이면서도 섬세한, 그것도 여성 화자에 의한 내면적 독백이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중편인데, 연작으로 이어지는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두려워요」의 화자가 모두 여성들이다. 마지막 중편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의 주인공만 남성일 뿐 네 편의 중편 가운데 세 편을 여성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이 연작들은 확실히 김원일에게 있어서는 파격이며, 그의 독자들로서는 적잖은 놀라움이다. 그가 이제야 소설에서 관능의 의미에 눈을 뜬 것일까. 혹은 감각적인 문체의 세계로 전환한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지문과 대화, 독백의 구분을 없앤 빡빡한 행간에도 불구하고 책은 스피디하게 잘 읽힌다. 그러나 잠깐,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그네의 흐릿한 의식에 여러 사람이 쑤군대는 말소리들이 들린다. 망측하게, 손가락은 거기다 왜 쑤셔박고 있지? 맨발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자빠졌다니. 잠결에 귀신이 한여사를 불러냈나 봐, 〔……〕 무슨 힘으로 기어서 예까지 왔을까? 저 피딱지 봐, 무르팍이 온통 까졌어. 정강이뼈가 보이네. 얼마나 아플까, 쯔쯔. 노망들면 아픈 걸 어떻게 알아.(46쪽)
여기에 이르면 사정은 달리 확연해진다. 한여사라는 주인공 할머니는 이미 상당한 고령인데다가 양로원에 들어와 있는 인물이다. 혼혈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있으나 미국으로 가버려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에 있는 혈혈단신으로서, 그녀의 생각과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추억뿐. 그것도 자신이 탐했고 또한 자신을 탐했던 사람들을 통한 몸의 기억들뿐이다. 일제 시대 정신대로 끌려갔고, 육이오전쟁 중에는 소위 양공주 생활을 했던 몸의 기억은, 기억들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그 기억들을 전후해서 일본인 제과점 사장 모리, 생물학자 한교수, 음악 선생, 산부인과 전문의, 땅부자 주먹코, 청년 홍, 그리고 그녀 나이 쉰에 나타난 일흔일곱 살의 노회장 등등이 있다. 그 기억은 모두 육체의 열락과 관계가 있다.
1) 제빵의 오묘한 맛을 감지하듯 여자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게이코는 그로부터 남녀가 정분 터서 나누는 성의 짜릿한 맛과 이치를 배우고 깨쳤다.(22쪽)
2) 호텔 방에서 눈뜬 아침이면 그분이 내 침상에 허리를 숙여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해줬지. 내 가슴 융기에 있는 큰 점을 쓰다듬어줬어. 아침 바람 쐐요. 내 말에 그분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섰다. 바다 위로 먼동이 터오면 우리는 손을 잡고 모래톱을 거닐었지. 그분의 육체가 이미 쇠하여 우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어.(24쪽)
격렬한 성적 사랑이든, 자칭 플라토닉한 사랑이든, 필경 모두 육체를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 묘사는 명료하게 확인한다. 그것은 기억을 통해 ‘아름다운’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육체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키면서 육체적인 인생관@세계관을 배태시킨다. “숨 끊어지면 한 생명체의 영혼은 이 세상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하직하고 육체는 썩어 흙이 되고 마는 게 불변의 진리라 믿는다”(19쪽)는 한여사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다. 양로원에 와서 하루 일상을 화장하는 일로 메우는 그녀의 삶의 끝은 이 과정의 자연스러운 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녀의 생활은 이렇게 지배된다.
한여사는 화장대 앞에 앉는다. 〔……〕 그네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다. 이마 위며 정수리에 검불처럼 성글게 남아 있는 흰 머리칼이 흉하다. 〔……〕 새카만 가발이 한여사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요. 연세는 드셨지만 헤어스타일만은 마님다운 기품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야죠. 〔……〕 한여사는 영양크림 통에서 장지로 크림을 찍어 이마, 양 뺨, 콧등, 턱에 흰 점을 찍는다. 양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피부에 크림이 고르게 스며들게 오랫동안 마사지한다. 〔……〕 닭볏같이 검붉고 주름이 엉긴 목도 빼놓을 수 없다. 꼼꼼하고 세밀하게, 주름살에 더 신경을 써서 분을 먹이면 고랑이나 금이 어느 정도 감추어진다.(7~16쪽)
그러나 이런 화장 생활과 맛깔스러웠던 그 기억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에 대한 추억과 집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 앞에서 육체의 모습은 오히려 더욱 추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손가락을 자신의 질 속에 찔러 넣고 실신해 있는 노파의 모습. 육체적 생활과 그 기억이 전부인 한 여인의 종말이 거기 그렇게 있다. 그녀에게 그 이외의 삶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이 있다면 양로원에 찾아온 조카가 자신의 돈을 빼내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 불신뿐이다. 즉 물욕이다. 죽음에 직면해서 기독교인 윤선생이 예수 믿을 것을 권고하지만 그것도 그녀에게는 거부된다. 색욕@물욕으로만 뭉쳐진 정욕 덩어리가 인간의 육체임이 그녀를 통해서 끔찍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거듭 알려진다.
그렇다면 한여사는 래디컬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술도갓집 딸로 30대 초반에 과부가 된 초정댁을 주인공으로 한 두번째 중편 「나는 나를 안다」에서도 그것은 다시 확인된다. 그녀 역시 폐병 앓던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정분을 트고 지냈는가 하면, 팔십이 다 된 할머니이면서도 포르노 비디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위인이다. 사실 그녀에게는 젊은 시절 색욕을 밝히다가 살인까지 저지른 과거가 있었다. 우씨라는 정체 불명의 사내를 유혹해서 일을 저질렀는가 하면, 방앗간 머슴 이씨라는 홀아비와 음욕의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를 죽였던 것이다. 장대비 퍼붓는 깜깜한 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40년도 훨씬 넘는 시간 저쪽의 일이었는데, 그녀는 배짱 좋게 지금껏 버티어오고 있었다.
살인을 했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난 아무 죄가 없어. 서방 있고 자식 둔 아녀자를 협박한 그 자식이 죽일 놈이지. 내가 왜 서방과 자식 버리고 백수건달을 따라나서. 애초부터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 밤낮없이 배꼽 맞춰 절구질이야 물리도록 하겠지만 낯선 객지에서 내 신세는 또 어떻게 됐게.(128쪽)
양심 혹은 정신적 성찰의 능력이 완전히 제거된 이러한 의식은 범죄의식 이외 다름아니다. 실제로 그녀 때문에 우씨라는 사내는 경찰에 의해 죽음의 길로 서서히 몰렸는가 하면 시아버지까지 병을 얻어 떠나는 꼴이 되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남편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중증 복합 장애인이었다는 원초적 슬픔이 있었으며, 장남 또한 온전치 못했고 딸들을 어려서 잃는 고통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집에 시집을 가기로 한 이유 자체도, 따지고 보면 물욕의 소산이었다. 말이 결혼이지 필경은 몸을 매개로 한 정욕 추구의 과정이었다.
곰보 째보면 어떻고 벙어리면 어때. 〔……〕 도갓집 마님처럼 집안 가솔을 호령하며 부리고, 시댁 재산 넉넉하니 줄줄이 자식 낳아 잘 먹이고 잘 키워 훗날 공부시킬 때 일본에 유학까지 보내야지. 그렇게 앙심 먹고 내가 엄마 말을 못 이긴 체 받아들여 대실 박씨 집안 병신 총각으 청혼을 승낙했지.(138쪽)
그 초정댁도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이때 찾아온, 자랑스러운 대학 교수 외아들은 어미의 임종보다 유산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남편 아닌 우씨의 종자인 그 아들과는 끝까지 생활비 입금을 조건으로 한 집요한 거래를 놓지 않는다. 죽음도 그 욕망과 자기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2
초정댁과 한여사의 일생에 투영된 삶의 모습은 육체적 욕망과 그 열락, 그에 대한 기억이며, 마침내 그 모든 것의 실체였던 육체의 소멸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대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삶의 허무? 육체의 의미? 이와 관련해서 작품들의 결구(結構) 부분이 뜻깊다. 먼저 「나는 누구인가」의 경우, 화자인 한여사는 말을 더듬으면서 “나, 느,, 누, 구, 야? 내, 가,, 도, 대, 체,, 누, 구, 지?”(69쪽) 하고 자문한다. 요컨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혼란으로 삶을 마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나는 나를 안다」의 경우, 화자인 초정댁은 한마디도 더듬는 일 없이 “한마디로, 나는 나를 안다”(142쪽)고 명백히 진술한다. 두 사람 사이의 이 현격한 간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여사의 정체성 혼란은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의문이라는 점이며, 초정댁의 단호한 진술은 그녀가 그토록 애고(愛顧)하는 둘째아들 박교수가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소생이라는 죄와 비밀에 대한 고백이다. 전자가 인간 실존에 관한 질문이라면, 후자는 훨씬 현실적인 사안에 대한 자백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다른 두 편의 중편 「나는 두려워요」와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나는 두려워요」의 경우, 이 작품 역시 할머니 화자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작품들과는 그 세계가 판이하게 다르다. 육체적 욕망과 그 열락을 멀리해온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그녀의 말년은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잘 압축해준다.
주님, 이제 저를 안식으 그 처소로 불러주옵소서. 이 땅에서으 삶에는 지쳤습니다. 하나님으 나라, 주님이 계신 곳에 제가 들 수 있는지요? 저를 받아주신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윤선생은 잠들기 전 그렇게 기원했다.(143쪽)
주인공 윤선생은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서, 그녀의 기억은 늘 첨탑 있는 교회와, 교회에서 대숲을 지나 조금 떨어진 언덕 위 붉은 기와를 올린 통나무집 선교사 사택으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성정과 상황이 그렇듯 경건함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어릴 적은 “지금과 달리 뭇 사람의 지청구를 오기로써 맞선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155쪽)였다. 언청이였던 그녀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고, 하나님 살아 계심의 체험적 신앙인이 되었다. 신앙과 교직으로만 살아온 그녀는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서 ‘윤여은 선생을 기리는 모임(윤기모)’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악몽과 같은 기억이 있었다. 젊은 날 그녀를 쫓아다니던 남학생의 손을 열차에서 뿌리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만 잘못되어 그 남자가 실족사한 일이었다. 말 못할 고통은, 그러나 그녀에게 한 단계 높은 믿음의 성숙을 가져다 주었다. 참회와 부르짖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뢰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억울하게 경찰에 끌려가서 난행을 당할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난 그녀는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달한 결정적인 순간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았다. 게다가 혼기도 놓치고 육이오전쟁의 와중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도 자라난 터라 평생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로 마음에 서약하였다. 그리하여 교장도 거부하고 낙도 평교사를 자원하는가 하면, 사회복지시설인 애린원을 설립하여 불우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말을 통해 전달될 때 다소 상투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이 같은 생애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러나 윤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그의 신앙이다. 신앙은 그녀에게 결코 세속적인 면에서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앙은 그녀의 삶을 총체적으로 축복하고 있다. 시골 작은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었고, 그뒤 실성기를 보였던 어머니는 알몸으로 우물에 투신 자살했으며, 국군이었던 큰 남동생은 전사했고, 인민군이었던 작은 남동생은 행방불명된 집안이니 그 비극의 처참함은 유례 없을 정도였다. 그녀 자신도 “손가락만 건드려도 넘어질 만큼 영육이 만신창이”(189쪽)였던 시절을 여러 번 넘겼다. 작가는 윤선생의 삶을 묘사하면서 구약의 욥과 예레미야를 자주 인용하는데, 그만큼 그녀의 삶이 고난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결혼, 출산, 출세, 재물과 같은 일상적 행복과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이 축복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더 가까이 가는 그녀의 심령에 대한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행복과 축복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 대목이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한편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한 가정의 급격한 몰락을 지켜보며 인간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분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 땅을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럽에 처음 전파한 바울이 전도 여행 목적지로 정한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로마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잡혀 순교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다른가를 그네가 깨닫기도 그때였다.(203쪽)
말년에 이르러서도 신장병으로 고통받는 윤선생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축복에 대하여 많은 생각들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선생은 여기서도 “주님, 이제 정말 제가 육신으 고통 끝에 이 세상과 이별할 날이 다가왔나 봅니다. 주님은 메시아이시니 몸은 비록 죽더라도 이 여식으 영혼을 구원해주소서”(206쪽)라는 믿음의 입술을 지킨다. 이 정도면 상당한 신앙인데도, 윤선생은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는 속에서 오히려 회개와 자괴의 염을 보여준다.
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교사로서의 품위를 보이려 위선이란 옷을 입고, 모범으로 꾸미며, 내 몸을 상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멸시를 당했거나 수난과 박해를 겪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으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정의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비바람 맞으며 앞장서서 나서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들 수 있을까요?(212쪽)
비몽사몽간에 생각하는 그녀의 신앙관은 예수의 삶을 닮고 싶어하는 수준에서의 안타까움이다. 결국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녀는 죽음 앞에서 말을 더듬으며 주님을 만나기가 두렵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신앙관은 정욕과 자기의라는 두 개 들보 가운데에서, 정욕은 금욕으로 극복하면서도 자기의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교인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살아갈 때 의당 거기에는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포함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은 인간에 의한 그 실천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 즉 하나님에 의한 사랑의 역사이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하여 최대한 노력하되, 자신에 의해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겸손한 순종 아닌 교만한 자기의의 범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윤선생은 주님 만나기가 두렵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나를 만나주시는 주님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편이 교리상 온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같은 두려움의 고백과 함께 죽어간다. 윤선생의 이 같은 종말은, 따라서 그녀가 그만큼 순수하고 착한 성정의 소유자였다는 점, 아울러 그녀의 믿음 또한 그만큼 순연하다는 사실의 입증이 된다. 말하자면 그녀는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였다는 가책을 고백하는 가장 아름다운 정신으로 육체를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남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소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앞의 윤선생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달리 실존주의적 세계관에 의한 존재와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그 책을 읽자 사르트르가 마치 자신의 고민을 대변하는 듯하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소설과 함께 읽게 된 일어판 『존재와 무』 역시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김씨에겐 충격이었다. 나의 존재 자체는 필연적이 아닌 우연의 소산이고 삶은 늘 부조리의 연속이다. 나의 운명은 신의 섭리나 타인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나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가 결단을 내려야 하며, 그렇게 주어진 자유는 내가 처한 한계 상황 속에서 오히려 괴롭고 불안하다. 나는 늘 절망을 껴안고 산다.(230쪽)
양로원 사무장인 화자 김씨의 일생 또한 앞의 세 여인과 같은 시대, 비슷한 고난의 통로를 지나온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 사서로 많은 시간 살아온 그에게는 독서 체험이라는 지적 시간들이 있었다.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해본 경험도 있었고, 일제 시대 만주와 중국에서의 고생, 육이오전쟁 시절의 죽을 뻔한 일들도 물론 있었다. 이제 조카가 경영하는 양로원의 일을 돌보면서 팔십 나이에 이른 것이다. 그나마 책을 보는 일이 일상의 중요 부분이었으나 망막 분리라는 눈의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다. 눈 수술을 전후해서 교통사고도 겪어 날로 몸이 쇠약해간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주로 뇌 활동과 연관된 지적 기억―그러니까 독서 체험을 통해 움직인다. 노자, 정약용, 로캉탱 등은 비록 체계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의 정신 생활을 지배하며 그의 육신에 또한 개입한다. 북에 본처를 두고 다시 후처와 재혼하고 살았으나 자식은 두지 못한 채 살아온 무욕(無慾)의 세월이었다. 김중호의 생애는 요컨대 절반쯤 금욕에 가까운 일종의 선비 비슷한 삶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도 이와 같은 실존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 네 사람의 주인공들 가운데 그의 죽음이 가장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까닭이다.
늙은이들은 외로워도 참고, 아파도 참고, 그리워도 참고 살지. 모진 성깔만 남아 화를 내고 누구에겐가 욕질하며, 욕질하다 슬퍼져 그리워하며, 그렇게 참는 게야. 〔……〕 죽는다는 게 두려워 그렇게 참고 견디지만 죽음은 의외로 빨리 닥쳐. 몸이 죽으면 혼미한 정신도 체념 상태가 되어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292~293쪽)
3
몸은 물리적 질서, 생명의 질서, 인간적 질서를 모두 실현한다고 메를로 퐁티는 분석한다. 존재의 총체성은 몸의 유기적 완결성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인데, 이는 가다머와 하이데거 이래 현상학의 기본적인 세계 인식이다. 이 같은 주장과 견해들이 오늘날 다시 조명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문제 제기의 배경에는 다분히 정치적 요소가 잠복해 있다.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대두에 따른 방법론적 접근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주장들의 정당성은 보다 근본적인 몸의 인식, 즉 유기적 총체성이 동반될 때 설득력과 공감을 발휘할 것이다. 관념화@이념화된 해석 공간에서 몸을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그 몸 자체로부터 실제로 모든 욕망을 놓아버려야 그것은 가능해진다. 김원일의 이번 문제작이 보여주는 진리는 바로 이 같은 메시지이다. 몸을 정욕의 대상으로 삼았던 한여사와 초정댁, 그리고 정신을 통해서 몸의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김중호, 그들 모두 죽음 앞에서 소멸의 상상력으로 주저앉았을 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무식한 여인네들과 유식한 지식인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초월의 상상력을 보여준 예는 오히려 ‘나는 두려워요’라고 고백한 「나는 두려워요」의 윤선생뿐이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닌, 그 이후에 만날 주님 앞에서의 지난 삶이었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이 몸을 넘어설 수 있는가. 몸의 시작도 끝도 모르는 채, 그저 그것을 불사르는 데 열중하는 니체적 소멸의 상상력은 이제 김원일과 더불어 진지한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작가의 말]
지난 일 년여 이 연작소설을 쓰는 데 바쳐, 여러 계간지에 네 편을 발표했다. 자폐인지 조울인지, 한 달에 보름은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글쓰기는 늘 그렇듯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나마 이 작업이 아니고는 다른 일거리를 찾을 수 없었기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달려온 셈이다. 술과 담배가 시간을 이기는 위무가 되어주었고,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밤 시간이 소설과 죽음을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오래 전에 구상해두었던 노인 이야기를 쓰다 보니, 살아감이 하도 괴로워 어서어서 세월이 흘러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있듯 없듯 존재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면 하던 소년 적의 바람을 얼추 이룬 나이에 당도했음이 고맙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살아온 지난 시간이 돌아보이는 나날이다.
2001년 여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김원일의 소설책
오늘 부는 바람(소설집, 1976)
노을(장편소설, 1984: 개정판, 1997)
바람과 강(장편소설, 1985)
마당 깊은 집(장편소설, 1988: 개정판, 1998)
히로시마의 불꽃(장편소설, 1992: 개정판, 2000)
늘푸른소나무 1~9(장편소설, 1996)
불의 제전 1~7(장편소설, 1997)
슬픈 시간의 기억(연작장편소설, 2001)
[차례]
나는 누구인가/7
나는 나를 안다/70
나는 두려워요/143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222
해설·육체의 소멸과 죽음의 상상력_김주연/295
작가의 말/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