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툴툴거리며 그 불편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 다음으로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툴툴거림은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구체적인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죠. 게다가 어떤 구체적 의도도, 일관성도 없는 순수한 툴툴거림은 대안을 가진 일관성 있는 생각보다 더 구석까지 파고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더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죠.” (「책머리에」에서)
이러한 툴툴거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통신망의 글쓰기 방식을 저자는 의식적으로 ‘통신망적 스타일’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풀어나간다. (이 책은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 씌어진 『씨네21』영화 칼럼과 그 밖의 잡지, 웹진 그리고 통신망을 통해 발표했던 글을 묶었다.)
_책머리에
<이론 무장>
1
다음 글들은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 씌어졌으며 대부분은 『씨네21』에, 나머지들은 몇몇 다른 잡지, 웹진, 또는 통신망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일관성 있는 척하기 위해 글들을 뒤섞고 절단해 다시 이어붙였지만 이것들이 의식적으로 새로 쓴 글들이 아니라는 것은 경고하고 넘어가야겠군요. 그 때문에 글들이 종종 타임 슬립을 해대는 타임 머신처럼 앞뒤로 뛰며, 몇몇은 시효가 지났습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수없이 불평해댈 지오시티스Geocities 봉쇄는 오래 전에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전 이것들을 그대로 두었는데, 봉쇄의 상징적인 의미는 아직 유효 기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
제지 원료를 넝마에서 펄프로 전환시킨 뒤로 출판업은 결코 환경 친화적인 산업일 수가 없기 때문에, 책을 쓰는 행위에는 필수적으로 양해가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대안 제시도 없이, 일관성 있는 의견 제시도 없이 툴툴거리기만 하는 것이 그런 당위가 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제가 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슬프게도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툴툴거리며 그 불편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 다음으로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책 없는 툴툴거림은 쓰레기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유용한 쓰레기입니다. 대안이 없다고 입 닥치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우린 우리가 겪고 있는 짜증마저도 망각하고 맙니다. 게다가 툴툴거림은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구체적인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죠.
불평은 적어도 자극제는 되며, 그런 자극을 받는 사람들 중 대안을 제시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구체적 의도도, 일관성도 없는 순수한 툴툴거림은 대안을 가진 일관성 있는 생각보다 더 구석까지 파고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더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죠. 100페이지가 넘어가는 일관성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3
대부분의 글이 ‘채팅실’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글들은 의식적으로 ‘통신망식 스타일’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의미없는 스마일리와 통신망 전용 줄임말이 책장 사이를 날아다닌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의식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따르는 경향은 있습니다.
언젠가 『씨네21』의 한 기자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늘 자잘하고 주변적인 주제에 매달리는 것이 통신망 필자의 성격 때문이냐고요.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통신망 필자들도 진지해지려면 얼마든지 진지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통신망 필자 티를 내려고 일부러 덩어리 큰 주제를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게 제 성격이죠.
그러나 통신망과 인터넷을 정말로 통신망답고 인터넷답게 만드는 것은 그런 ‘진지하고 좋은 글’이 아닙니다. 좋은 글은 전달 매체와 상관없이 좋습니다. 통신망을 통해 발표되건 인쇄되건 아니면 직접 낭송되건 마찬가지입니다. 매체가 바뀐다고 질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뒤집어 말하면 ‘좋은 글’이 매체의 성격에 끼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죠.
어떤 매체를 그 매체답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작고 하찮은 글들입니다. SF 장르를 지금의 모습으로 굳힌 사람들은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나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과 같은 거장들이 아니라 펄프 매거진에 싸구려 소설들을 팔던 이름없는 작가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통신망이라는 매체를 통신망처럼 만들고 그 고유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사람들은 워드 프로세서도 통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뛰어들어 “이 영화 보지 마요, 웩!” 따위의 글을 한두 마디 쳐서 올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글들이 진정한 통신망의 비평 세력이 되는 것이며, 통신망이 문화 환경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것도 바로 그런 글들을 통해서입니다. 통신망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타진할 기회가 있었을까요? 영화는 글솜씨 있는 사람들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아마 제가 쓴 채팅실 글은 그 어정쩡한 사이에 있을 겁니다. 종이에 인쇄되면서 “이 영화 보지 마요, 웩!”의 경박한 자유를 얻으려고 무의식적으로 통신망 티를 내고 있을지도 모르죠. 『씨네21』의 그 기자가 한 질문은 제 생각보다 훨씬 사실에 가까웠을 거예요.
<외모 이야기>
1. 지니의 얼굴
2. 포카혼타스의 얼굴
3. 뮬란의 얼굴
4. 알렉 웩의 얼굴
5. 사라 폴리의 얼굴
6. 마를렌 디트리히의 다리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1. 미라맥스 마케팅 옹호하기
2. 밀고자의 귀환
<스노비즘과 똥폼, 가짜 개성>
1. 시네 스노비즘
2. 살아남은 똥폼들
3. 의식적으로 튀기
<주변에서 살아남기>
1. 메리 리처즈의 모자 던지기
2. 취향 물려받기
3. 쌀가루를 뿌려야 할까?
4. 남의 영화 보기
<여고 괴담 1, 2>
1. 굳은 머릿속에 갇혀서
2. 「여고 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자생적 컬트 영화일까?
<막힌 정보들>
1. 검열의 진짜 기능
2. 검은 사각형 지우기
3. 검열보다 더 두려운 것
<장르와 편견>
1. 장르의 명칭
2. 그 뻔하고 뻔한 할리우드 영화들……
<이 ‘공정한’ 시대에……>
<대리전의 병사들>
<국제화 시대를 버텨내기>
<인터넷, 「접속」, 기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