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소개]
8편의 중·단편소설을 모은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모티프는 ‘집’이다.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냄새나 소리가 소재가 되고, 집 혹은 공동체에 낯선 누군가가 들어온다. 또한 집에 모여 사는 가족들의 관계는 와해된다. 이러한 모습은 주인공들의 불안한 이상 심리로 표출되고, 소설 속 장면들은 다소 비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엽기적?)하게 묘사된다.
[표지글]
우리는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작가 이승우의 소설은 늘 신 앞에 던져진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에 바쳐져왔다. 그것은 실존 철학에 가깝고 신학에 가까운 것인데, 이번 작품집에서는 이러한 종교적 주제를 우리의 일상에 가까운 쪽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이승우가 펼쳐보이는 세계는 감각에 의해 예민하게 포착된 엽기의 세계다. 물론 그의 소설을 관류하여 흐르는 엽기의 세계는 요란함과는 다르지만, 그 저변을 흐르는 불안의 에네르기는 매우 강하다. 우리는 이승우의 소설에서 평온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 밑바닥에서 무섭고 강하게 흘러가는, 알 수 없는 불안의 에네르기를 감지한다.
― 김만수의 해설 「불안의 현상학」에서
[작가의 말]
두번째 사랑이 첫번째 사랑보다 쉬운 것은 아니다. 세번째 사랑이 두번째 사랑보다 안전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어렵고 늘 불안한 것. 사랑은 여간해서는 숙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뜀틀 넘기나 철봉에 매달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뜀틀은 거기 늘 같은 모양으로 있고 철봉도 그 자리에 있다. 두번째 넘기를 하는 뜀틀은 첫번째 넘기를 했던 그 뜀틀이다. 세번째 매달리는 철봉은 두번째 매달렸던 그 철봉이다. 뜀틀이나 철봉에 대한 두번째 세번째 도전은 이를테면 반복이다. 반복은 숙달에 이르는 과정이다. 두번째 넘을 때가 첫번째보다 조금 쉽다. 세번째 매달릴 때가 두번째보다 약간은 안전하다. 그러나 사랑은 반복이 아니다. 사랑의 대상인 그, 또는 그녀는, 늘 같은 모양으로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두번째 사랑의 대상인 그, 또는 그녀는 첫번째 사랑의 대상이었던 그, 또는 그녀가 아니고, 세번째 사랑의 대상인 그, 또는 그녀는 두번째 사랑의 대상이었던 그, 또는 그녀가 아니다. 그, 또는 그녀가 전혀 새로운 그, 또는 그녀이므로 반복이 아니고, 반복이 아니므로 숙달도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두번째 소설이 첫번째 소설보다 쓰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세번째 소설이 두번째 소설보다 반드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다. 소설 역시 사랑이 그런 것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랑이 그런 것처럼, 소설의 대상도 늘 새롭고, 그러므로 반복이 아니고, 반복이 아니므로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매번 처음 쓰는 것처럼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 그, 또는 그녀에 대해 빠삭하게 아는 사람이 사랑을 할 리 없고, 세상에 대해, 혹은 사람의 삶에 대해 부동의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소설을 쓸 리가 없다. 사랑도 그렇지만, 소설 쓰기는 근원적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고 무리로부터 위탁받은 열정이다. 밀란 쿤데라는 최근의 한 소설에서 향수에 대해 말한다. 그에 의하면, 향수란 어원적으로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이다. 귀환해야 할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예컨대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 그것이 향수라는 것, 소설이란, 그런 점에서 향수이고, 소설가들은 향수병에 걸린 자들이다. 귀환해야 할, 그러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소설을 쓰게 한다. 귀환해야 할 세계가 없거나(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귀환해야 할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고통도 없고, 향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당연히 소설을 쓰지 않는다. 의식하는 자만이 아프다. 향수가 없으면 소설도 없다. 그런 점에서 소설 쓰기는 도무지 형체가 잡히지 않는 세상살이에 대한 서툰 허우적거림이거나 임의적인 가설(假設) 같은 것인지 모른다.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익숙해진 사람)이 소설을 쓸 까닭이 없는 이치다. 튼튼한 집을 이미 지어 가진 사람이 가설의 필요를 느낄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은 매번 새로 하는 질문이고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는 낯선 길에 대한 추구다. 해답을 발견하는 순간, 문득 길이 낯익어지고 마침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지점에서 소설은 끝난다. 더 이상 미지가 아니므로 길을 갈 필요가 없고, 미지가 아니므로 열정은 사라진다.미지가 아닌데도 가고 향수가 없는데도 쓸 수는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냉장고 문을 열고 눈도 뜨지 못한 채 주스병을 집어들고 마시는 사람이 있다. 술 취한 김유신을 태운 애마는 생각 없이 천관녀의 집으로 갔다. 습관의 힘이다. 의식의 도움 없이 근육이 저절로 움직이는 상태, 늘 가던 길, 익숙한 길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가게 하는 힘, 그렇게 글을 쓸 수는 있다. 길들여진 근육으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할 수는 있다. 근육은 튼튼하고 습관은 질기다. 길들여진 근육, 질긴 습관의 자연스러움으로 써내려간 소설, 그런 소설이 문학을 시궁창에 집어넣는다. 문학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궁창은 실은 문학의 웅덩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시대도 아니고 자본이나 권력도 아니고 정보나 극장도 아니고 독자도 물론 아니다. 숙달된 사랑에 의해 사랑은 익사하고, 익숙하게 씌어지는 소설로 하여 소설은 절명한다. 습관의 힘을 경계할 것!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 그런데도 여전히 서툴기만 한 내 소설의 가난한 육체 앞에,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종종 받게 되는 그 습관의 힘에 이끌린 자동적인 글쓰기의 유혹 앞에, 마치 신년 벽두에 마음 잡아먹고 ‘금연’이라는 글씨를 크게 써 붙이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2001년 3월 이승우
[차례]
집의 내부
하루
첫날
멀고먼 관계
몽유
하늘에는 집이 없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배꼽
해설·불안의 현상학_김만수
작가의 말
내가 이걸 읽고 느낀 점은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인 집이 가갑고도 멀 수있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