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975년 등단 이래 한국 시의 새로운 한 지평을 열어온 시인 김광규.
시인은 쉬우면서도 쓰기 어렵고 일상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를 “아침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가”며 지난 26년 간을 매진해 왔다.
이 시선집은 1988년 『좀팽이처럼』 이후 시집(『아니리』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중 시인이 엄선한 시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변함없는 시적 탐구 속의 다채로운 변화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지은이의 말〕
나의 시를 말한다
-혼자서 느릿느릿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득한 옛날의 중국 시를 모은 『시경』을 읽어보면, 번역을 거친 것인데도, 이해할 수 없는 시는 한 편도 없다. 제사의 노래, 궁중의 노래, 민중의 노래, 가리지 않고, 읊기 좋은 언어에 인간 생활의 역사와 정서가 담겨 있다. 운문으로 씌어졌던 서양의 고대 비극이나 중세 문학 작품들도 시공을 초월하여 읽히는 보편적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20세기 초엽부터 독일 문학에는 보통 사람의 이해를 거부하는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표현주의 작가들을 위시하여,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은 단순한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전문적인 문예학자나 비평가의 해설을 요구하게 마련이고, 그 결과 살아생전에 세속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위대한 작가들이 사후에 후세의 학자와 비평가와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아이러니를 낳게 했다.
독문학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나도 이러한 아이러니의 올무에 걸려든 경우라 할 수 있다. 대학 시절에 릴케의 후기 시 강의를 들었는데, 주해가 없이는 한 구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을날」 같은 릴케의 쉬운 초기 시를 애송했던 문학 청년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문학을 전공한다는 것이 바로 이처럼 난해한 작품을 해석하는 작업 아닌가 하는 자못 도전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일어 해독 능력도 빈약했던 학부 시절에 대뜸 게오르게의 비의적 서정시에 덤벼들었고, 대학원에서는 카프카에 매달려 4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때 누군가 말렸더라면, 나의 문학 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는 외국어문학부에도 외국인 강사가 드물었으므로, 해당 외국어를 일상의 구어로 배우기는 힘들었다. 독일에 유학하여 비로소 문어가 아닌 구어로서의 독일어를 배웠고, 동시대의 현역 작가들 작품을 읽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생존했던 귄터 아이히의 전후 서정시로부터 시작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정치시를 거쳐서, 하인리히 하이네의 참여시에 이르기까지 세기를 역류하는 순서로 독일 시를 섭렵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독일 문학이 결코 추상적이고 난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비의적 서정시와 난해한 소설만을 주로 읽었던 한국 학생으로서 그것은 하나의 개안이었다.
귀국 후 아이히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끝내고, 브레히트와 하이네의 중요 시를 골라서 번역 시집을 출판했다. 19세기와 20세기 독일의 현실 참여 문학을 대표하는 하이네(1797~1856)와 브레히트(1898~1956)는 꼭 100년 차이를 두고 자기 세기의 전반기를 살고 갔다. 자기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정치·사회·문화·예술의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두 작가는 새롭고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성취했다. 단아한 시어, 시적 은유와 암시, 애매모호한 발언 대신, 대담한 일상어, 산문적 직접성, 현실의 풍자와 고발을 과감히 도입함으로써, 시의 형태 속에 삶의 현실과 꿈의 이상에 대한 시인의 진솔한 느낌과 생각을 은폐하지 않고 개진하려고 했다. 동시대의 독자로부터 찬양과 배격을 한꺼번에 받은 바 있는 두 시인은 그러나 동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지속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내가 1975년에 우리말로 옮긴 하이네 시선집 『로렐라이』와 1985년에 펴낸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른바 스테디 셀러로 서점의 일각을 차지했고, 후자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어느 젊은 작가가 그 제목을 자기 작품에 차용하기도 했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일과 문학 작품을 연구하는 두 가지 일을 겸업하고 있는 나에게는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글쓰기의 간접적 지표가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 문학을 따로 공부하거나 문예창작과에서 글쓰기를 일삼아 배운 적 없이, 혼자서 남의 글을 읽고 나의 글을 쓰는 문학 수업을 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게오르게의 비의적 서정시에서도 내 나름대로 엄격한 언어의 형식을 배웠던 것 같고, 카프카의 부조리한 소설에서도 난해한 내용과는 달리 즉물적이고 정확한 문장을 사용한 점에서 내 나름대로 서술의 명징성을 배웠던 것이다.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이 반면 교사로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무책임한 시적 자유와 방종을 절제하고 독자의 이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창작 자세를 견지하게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시문학의 자장에는 한국의 전통시, 독일의 참여시와 절대시, 프랑스의 순수시…… 등이 제각기 양극과 음극을 지닌 채 상호 작용을 하며 공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자기의 취향에 따른 호오는 있겠지만, 문학의 우열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문학 작품 심사를 하게 되면 서로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심사위원들이 똑같은 작품을 고르는 수가 많다. 가장 주관적인 문학 장르인 시에도 평가의 객관적 척도가 잠재하는 것 같다. 이러한 객관성이 문학의 해석과 수용에 작용하여 시공을 초월하는 작품을 가려내는 것 아닐까. 글쓰기에도 주관적 열정 못지않게 객관적 지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4반세기 동안 나는 시를 써왔다. 서양 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번역하다 보니, 아무래도 서양 문학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잠깐 서양 여행을 갔다 온 사람처럼 서양에 관한 글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글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의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졌고, 6·25 전쟁 이전 유년기의 순수한 한국 정서가 밑그림이 되었다. 오늘날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서양 문물을 무작정 받아들여 재빨리 장래의 모범으로 삼으려는 추세를 보면, 귀중한 지역 문화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려된다. 이처럼 가파른 변화의 시대에 나는 혼자서 느릿느릿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새 천년이 열리는 세기의 전환기에 1988년 이후에 출판된 4권의 시집에서 70편을 골라 시선집을 엮는다. 나로서는 20세기를 정산하는 느낌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시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필로 시를 쓰기 시작한 내가 환력을 맞이하여 새 천년으로 접어드는 마당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20세기 시인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모든 사물의 속도가 빨라진 것은 철도·자동차·비행기·전신·라디오·TV·컴퓨터 등의 발전 보급과 함께 20세기 기술 문명의 특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구의 반대쪽과도 광속의 통신이 당연한 일상사가 되었고, 세계 어느 곳이라도 24시간 이내에 왕래가 가능해졌다. 초국적 대자본이 빛의 속도로 전세계의 주식 시장을 넘나들며 이윤을 노리고 있다. 문화 예술의 정보 교환 또한 인터넷을 통하여 국경은 물론 동서양의 벽을 허물어버렸고, 사이버문학도 확산 일로에 있다. 현기증 나는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려면 계속해서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쉴새없이 핸드폰을 걸면서 수시로 이메일을 체크해야 한다. 속도가 빨라진 만큼, 시간의 여유가 생겨야 할 텐데, 오히려 정신없이 쫓기게 된 것이 오늘의 생활상이다.
그 동안 작가들의 집필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타이프라이터가 보급되면서 1970년대부터 한글 타자기로 작품을 쓰는 추세가 시작되었고, 요즘은 작가들이 대부분 컴퓨터를 사용한다. 산문의 경우 원고지에다 볼펜으로 쓸 때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종이에다 글을 쓴다는 개념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키보드를 두드려서 획일화된 활자체로 원고를 만드는 작업으로 바뀐 것이다. 컴퓨터를 켜고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들여다보아야 구상이 떠오른다고 토로한 젊은 작가도 있다. 먹을 갈아서 붓으로 한지에 글을 쓰던 문사들이 연필과 잉크와 볼펜을 거쳐서 이제는 기계로 작품을 집필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변화는 참으로 폭넓게 전개된 셈이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들 대부분이 지나간 세기에 태어난 구세대로 지칭되겠지만, 20세기의 그 빠른 변혁 과정만은 그리 쉽게 폄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 현실을 매우 예민하게 반영하면서도 가장 느린 속도로 만들어지는 문학 장르가 여전히 있다. 시다. 산문의 집필 속도는 옛날보다 현저하게 빨라졌지만, 시를 쓰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컴퓨터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산문을 찍는 속도로 시를 쓰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시는 여전히 오랜 시간에 걸쳐 깊은 고심 끝에 느린 속도로 씌어지고, 천천히 읽히는 문학 형식이다. 밝아오는 21세기에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무서운 속도에 염증이 난 많은 21세기인들이 천천히 되풀이하여 시를 읽고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길지도 모른다. 바로 그 느린 특성 때문에 우리의 시가 품위 있게 살아남기를 바란다.
2000년 저물녘에
김광규
〔기획의 말〕
1975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김광규의 시는 20세기 말 한국 시에 의미 깊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일상시’의 지평이다. 여기서의 ‘일상’은 자동화된 습관적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 세계 속의 현실 체험이다. 그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일상, 깊은 산 속의 절이나 바다 밑의 해조류, 그리고 2만 미터 상공의 하늘과 잠자다가 꾸는 꿈……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비판 의식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이 일상시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해왔다. 그래서 김광규의 시는 단순성·명징성 등의 언어적 특징을 갖는 ‘쉬운 시’가 되어왔다. 그러나 그 ‘쉬운 시’가 단지 쉽기만 한 것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쉬움 속에는 사고의 복합성과 깊은 울림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김광규를 소개한 『문학과지성』 동인들은 처음부터 이 점을 명민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되 거기에서 획득하게 되는 인간 정신의 질량을 세련된 언어로 연결하여 언어의 염증성과 사고의 복합성을 대결시킨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김광규는 이러한, 쉬우면서도 쓰기 어렵고 일상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를, 한 비평가가 지적한 것처럼, “아침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가”며 지난 26년 간을 매진해왔다.
김광규 시를 주제적으로 요약하자면 제도적인 것의 억압·허위에 대한 저항, 제도적인 것에의 순응·편입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저항과 비판을 시로 만드는 김광규 시의 방법적 요체는 아이러니와 리듬에 있다. 단순하고 명징한 언어 때문에 쉽게 읽고 지나가면 도처에 장치되어 있는 아이러니를 때때로 간과할 수 있다. 아이러니를 남김없이 읽어내고 그리하여 김광규 시의 맛과 깊이를 온전히 향유하기 위해서는 난해시의 경우보다 오히려 더 공들여 해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김광규 시의 리듬에도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광규 시의 리듬은 소리상의 리듬보다는 의미상의 리듬에 한층 더 중점을 두고 있는데, 두 가지 리듬 사이의 관계를 깊이 음미할 때 김광규 시는 그 내밀한 모습을 풍요롭게 내보인다. 대체로 소리상의 리듬은 청각적 감성에 호소하며 때로 비지적(非知的)인 일종의 최면 효과에 의지하는 데 반해, 의미상의 리듬은 지적 이해를 통해서만 구현과 전달이 가능하다. 또한, 소리상의 리듬은 모국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번역하면 대부분 손상되지만, 의미상의 리듬은 번역을 통해 구현되기가 용이한 편이다. 이는 독역의 김광규 시가 독일어권에서 환영받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독일어권에서 김광규 시에 대한 반응은 자못 놀라운 바가 있다. 독역 시선집 『조개의 깊이Die Tiefe der Muschel』가 1999년 빌레펠트에서 출간되기도 했지만, 그 훨씬 전부터 수차에 걸쳐 독일 각지에서 작품 낭독회를 가져왔는데 그때마다 기대 이상의 환영을 받았다. 더욱이 독일 시인 하이제와 슈타우다허의 김광규론을 보면 김광규 시가 그들에게 이렇게 잘 이해되고 있구나, 하는 점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이는 리듬 문제만이 아니라 김광규 시에 어떤 문학적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시력 26년 동안 김광규는 시속(時俗)에 휩쓸리지 않고 변함없는 자기만의 시적 탐구를 계속해왔다. 물론 그 전체적인 변함없음 속에서는 또한 섬세하고 미묘한 변화들이 끊임없이 있어왔던 게 사실이다. 그 불변 속의 다채로운 변화들을 이제 한자리에 모아놓고 한눈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게 이 책이 꾸며지는 주된 이유이다. 이 후기 시선집과 전기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한데 합치면 김광규의 시력 26년의 전체적 결산이 된다.
2001년 1월
기획위원
〔작가 연보〕
1941 서울 종로구 통인동 출생.
1960 서울중·고등학교 졸업.
196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 졸업.
1967 병역 3년 만기 제대. 정혜영과 결혼.
1968 중앙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등 직업 생활.
1970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정착.
1972 서울대학교 대학원 독문과 석사과정 졸업. 괴테 인스티투트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 뮌헨 대학교 수학.
1974 귀국 후 부산대학교 교수.
1975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영산(靈山)」 등의 시를 발표. H. 하이네와 G. 아이히의 번역 시집 출간.
1978 작가론 총서 『카프카』 편저. P. 빅셀 산문집 『책상은 책상이다』 번역 출간.
1979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출간. 군부 검열에 걸려 다음해에 배포.
1980 번역 시집 『19세기 독일시』 출간. 한양대학교 교수.
1981 제1회 녹원문학상 및 제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1983 서울대학교 대학원 독문과 박사과정 졸업. 학위 논문 『귄터 아이히 연구』 및 두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 출간.
1984 제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현대 독문학의 이해』 편저.
1985 B. 브레히트 번역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출간.
1986 세번째 시집 『크낙산의 마음』 및 G. 아이히 방송극집 『알라신의 마지막 이름』 출간.
1987 G. 아이히 번역 시집 『햇빛 속에서』 출간. 84인 공동 시집 『서울의 우울』 편저.
1988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및 네번째 시집 『좀팽이처럼』 출간.
1990 샌프란시스코 세계작가회의 참석. 본 대학교 초청 시 낭독회. 다섯번째 시집 『아니리』 출간.
1991 독일 지겐 대학교 객원 교수. 한국 대표 시인 선집 『대장간의 유혹』 간행. 런던에서 영역 시집 『Faint Shadows of Love』 출간.
1992 동경 개최 한일작가회의 참석. 베를린 문학교류회 LCB 초청 한국 문학의 주간 참가.
1993 서울 개최 독일 문학의 주간 행사. 이후 한독 문학 교류 행사 연례화.
1994 제4회 편운문학상 수상. 여섯번째 시집 『물길』 출간.
1996 산문집 『육성과 가성』 출간.
1997 뒤셀도르프 하이네 기념관 초청 시 낭독회.
1998 일곱번째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출간.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 초청 시 낭독회.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객원 교수.
1999 빌레펠트에서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 출간. 빈에서 오스트리아 문학협회 초청 시 낭독회. 뮌헨의 서점 아말리엔슈트라세 71에서 시 낭독회.
2000 라이프치히와 취리히에서 시 낭독회. 서울에서 ‘시의 숨결’ 시 낭송회.
〔차례〕
기획의 말
1986년 여름∼1988년 가을
감나무 바라보기
하얀 비둘기
달팽이의 사랑
잠자리
나뭇잎 하나
가을날
밤 눈
나무
좀팽이처럼
대장간의 유혹
재수 좋은 날
부끄러운 월요일
아빠가 남긴 글
작은 꽃들
동서남북
대웅전 뒤쪽
문 앞에서
1986년 여름∼1990년 가을
봄놀이
연통 속에서
그 집 앞
자라는 나무
느티나무 지붕
오솔길
초겨울
진양조
백조의 춤
龍山寺
새 기르기
五友歌
이끼
아니리 8
노동절
그이
1990년 늦가을∼1994년 봄
까치의 고향
노루목 밭터
P
형이 없는 시대
미끄럼
어느 選帝侯의 동상
바닥
어둠 속 걷기
물길
화초의 가족
자리
나쁜 놈
라인 강
세검정 길
갈잎나무 노래
熱帶鳥
그리마와 귀뚜라미
1994년 여름∼1998년 이른봄
중얼중얼
대성당
석근이
탄곡리에서
주머니 없는 옷
바지만 입고
동해로 가는 길
길을 물으면
시름의 도시
새밥
느릿느릿
시조새
돌이 된 나무
나무로 만든 부처
끝의 한 모습
쓸모 없는 친구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누군가를 위하여
서울에서 속초까지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나의 시를 말한다
작가 연보
원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