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텍스트 해석학에 있어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는 폴 리쾨르는 주체의 사유 능력을 회복하려는 근대성의 흐름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사유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로 『시간과 이야기』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문학 연구들의 성과를 포용하고 극복하려 했으며, 철학적 해석학의 넓은 틀 속에서 허구 이야기뿐 아니라 역사 이야기를 함께 다루면서 거대한 시간-이야기론을 제시했는데, 이 이야기 이론은 구조주의의 독점으로부터 벗어나 철학의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 등에서 상당히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시간과 이야기』는 모두 3권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 2부로 묶인 1권에 이어 이 2권은 ‘허구 이야기에서의 형상’라는 부제 아래 3부 4장으로 엮여 있다.
리쾨르의 이야기 해석학의 토대를 이루는 세 가지 단계의 재현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체 3권 중에 가장 문학적인 이 책의 1장에서 3장까지는 허구 이야기의 서술성에 관한 이론들을 조명한다. 1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어떻게 현대 소설에까지 적용시킬 수 있는지 살피면서 줄거리 개념을 ‘확대’하고, 2장에서는 전통성에 근거한 서술적 이해력과 서술기호학에서 내세우는 기호학적 합리성을 대치시키면서 줄거리 개념을 ‘심화’시키며, 3장에서는 서술적 형상화의 방법을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줄거리 구성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서술적 시간의 개념을 다듬는다. 4장에서는 ‘시간의 허구적 경험’이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이 책을 통해 리쾨르의 해석학과 구조주의와의 힘겹지만 풍요로운 대화를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리쾨르의 예리한 심미안과 통찰력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이야기란 인간의 경험을 언어로 진술하는 방식이다. 경험이란 정신과 육체가 바깥의 사물과 만나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사람은 앎을 얻고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 물론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칸트가 말한 선험적 감성이나 선험적 논리, 선험적 직관 등이 그렇다. 하지만 선험적인 것 또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틀이라는 점에서 경험의 필요 조건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경험이다.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겪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경험이 된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인간의 행동이 경험을 만들고, 이때 경험은 실제로 일어날 수도, 상상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상 현실의 경험은 사물에 파묻혀 그대로 잊혀져 흘러가버리고 만다. 혼돈이고 무의미인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뜻, 존재의 뜻을 찾는다. 여기서 주체가 개입한다. 그것은 반성을 통해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다.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고 언어가 그렇다. 다시 말하면 경험은 할말이 있고, 말해지기를 기다린다. 물론 모든 경험을 말로 다할 수는 없지만 말해지지 않은 경험은 무의미에 빠지고 만다. 그러한 경험이 말로 될 때,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 이야기가 된다. 경험은 이야기되기를 기다리고, 이야기는 서술적인 방식으로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을 엮어 줄거리로 만듦으로써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이야기다.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야기, 존재 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경험을 통해 존재를 체험하고 존재의 뜻을 찾아 삶의 뜻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그 여백에 무한한 뜻이 들어간다. 뜻이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의 영역이 된다. 이야기의 뜻을 풀어 삶을 다시 그려보고 삶의 뜻을 찾는다.
리쾨르의 주된 관심 영역은 다양한 ‘해석들의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주체, 시간, 구조와 역사, 텍스트와 삶, 정체성 등이 그렇다. 그러나 갈등을 푸는 리쾨르의 방식은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들을 대조함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대립되는 해석을 대치시키고 겹쳐놓음으로써, 해석들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한다. 각각의 해석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메마른 논쟁’이 아니라 ‘사랑이 가득 찬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리쾨르가 택한 방법론을 우리는 상징해석학을 발전시킨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 그러나 폐쇄된 기호 체계로서의 텍스트가 아닌 밖을 향해 열린 텍스트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호, 상징 그리고 텍스트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자기 이해는 없다. 자기 이해는 궁극적으로 이 매개항들에 적용된 해석과 일치한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면서, 해석학은 점차적으로 후설이 현상학과 동일시하고자 했던 관념론으로부터 벗어난다.” 기호·상징·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 이해라는 측면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코기토 중심의 반성철학의 한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리쾨르가 말하는 텍스트는 문화에 의해 전승된 상징이다. 그러나 기호나 상징과는 달리 글로 씌어진 텍스트는 담론(누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해 무엇을 말한다)으로서, 어떤 세계, 리쾨르가 ‘텍스트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텍스트 밖으로 투사한다. 그렇게 이해된 텍스트는 글 쓴 사람의 뜻(의도)으로부터, 글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부터, 글을 쓸 당시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의미론적 자율성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후설의 지향성으로부터, 해석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난다.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텍스트 앞에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며, 책을 읽는 나와는 다른 자기의 조건을 텍스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딜타이류의 낭만주의 해석학에서 벗어나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적 이해로서의 해석학과 만난다. 그러나 텍스트를 통한 자기 이해라는 먼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르다. 반성철학·현상학 그리고 기호·상징·텍스트의 매개를 통한 해석학은 직관에 의한 투명한 자기 인식의 꿈을 포기하고 길고도 먼 우회로를 통해 자기 이해-세계 이해에 이르고자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 해석학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텍스트 내에서 작품의 구조화를 지배하는 내적 역동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 텍스트가 담고 있는 ‘것chose’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품의 힘을 찾아내어 독자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해석학은 구조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상징을 탈신화화하고, 텍스트가 보여주는 존재 이해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이처럼 해석학을 “어떤 해석, 다시 말해서 단일한 텍스트나 하나의 텍스트로 여겨질 수 있는 일군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대한 이론”으로 정의한다면, 그의 해석학은 언어학·정신분석·신학·사회학·정치학 등 다양한 해석 방식(해석학)과의 만남(갈등)을 통해 말의 뜻이 속한 여러 가지 층위를 골고루 더듬어 삶의 뜻과 연결시키는 종합적 해석학, 또는 해석의 일반 규칙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의 뜻을 푸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말뜻을 통해 삶의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 리쾨르 해석학의 특징이다.
리쾨르의 철학이 문학과 만나는 지점은 말과 삶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다. 리쾨르는 기호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를 논하면서, 말의 뜻과 삶의 뜻을 잇고자 하며, 『시간과 이야기』에서 시간이라는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를 자신의 상징해석학의 틀 안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론은 시간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리쾨르는 역사 이야기와 허구 이야기를 가르는 이분법을 넘어서서 수많은 이야기 장르 사이에는 ‘기능적’ 통일성이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인간 경험에 공통된 특성─그것은 모든 형태의 이야기하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고, 결합되고 명료해진다─은 그 ‘시간적 특성’이다.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시간이 걸리고, 시간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모든 것은 이야기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시간적 과정은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될 수 있다는 한에서만 시간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경험은 세계 경험이며, 이야기는 세계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관은 또한 세계관이라 말할 수 있다. 리쾨르의 관점은 사변적 차원에서는 풀 수 없는 시간의 아포리아들을 이야기라는 상징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시간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드러나게 하는 밑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바로 이러한 시간성과 서술성의 상호 관계를 바탕으로 시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여, 경험이 갖는 시간적 성격을 역사와 허구에 공통된 지시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역사 이야기와 허구 이야기, 그리고 시간을 문제로 설정한다. 『시간과 이야기』에서 논의되는 이야기와 시간의 관계는 그렇게 맺어진다.
나 나름대로 이해한 리쾨르가 오히려 리쾨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시간과 이야기』의 독서를 위한 바탕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이 『시간과 이야기』 2권을 이해하는 데는 당연히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기에, 『시간과 이야기』 1, 2권의 요점을, 별도로 옮긴이 해제를 마련하여 정리하였다. 『시간과 이야기』의 전체적인 이해는 독자들과 함께 마지막 3권까지 여행한 후로 미루어둔다.
사실 ‘허구 이야기에서의 형상화’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시간과 이야기』 2권은 나머지 두 권에 비해 가장 ‘문학적’이다. 1장에서 3장까지는 허구 이야기의 서술성에 관한 이론들을 조명한다. 특히 그레마스나 주네트 등, 한국의 독자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서술 이론가들을 다룬 부분에서는 기존의 번역서들을 바탕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용어를 선택했지만, 때로는 ‘시간 순서 비틀기ana-chronie’ 등 나름대로 번역한 용어들도 있다. 이 분야의 전공자들과 의견을 나누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4장에서는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프루스트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 2권의 마지막 장은 리쾨르의 예리한 심미안과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작가의 원작을 대조해가면서 그 작품들이 리쾨르의 문맥에서 갖는 뜻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부족한 부분들은 조광희 선생님께서 메우어주셨는데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4장에서 프루스트에 대한 분석과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경래 선생과 공동으로 작업함으로써 가능한 한 오역을 줄이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처 거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나의 몫임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출간을 맡아주신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여러분들에게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00년 11월
김한식
〔차례〕
책머리에
옮긴이의 말
제3부 허구 이야기에서의 시간의 형상화
제1장 줄거리의 변모
1. 비극의 뮈토스를 넘어서
2. 영속성: 패러다임들의 질서
3. 쇠퇴: 이야기하는 기술의 종말
제2장 서술성의 기호학적 제약
1. 프로프의 민담 형태론
2. 이야기의 논리를 위하여
3. 그레마스의 서술기호학
제3장 시간과의 유희
1. 동사의 시제와 언술 행위
2. 이야기하는 시간과 이야기되는 시간
3. 「이야기의 담론」에 나타난 언술 행위-언술-대상
4. 시점과 서술적 목소리
제4장 시간의 허구적 경험
1. 죽음의 시간과 불멸의 시간 사이에서: 『댈러웨이 부인』
2. 『마의 산』
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로질러 간 시간
결론
옮긴이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