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51

김정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11월 27일 | ISBN 9788932012148

사양 · 110쪽 | 가격 5,000원

책소개

〔개요〕

『해가 뜨다』는 눈〔雪〕과 눈물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사랑과 죽음, 역사 등 눈을 맞거나 눈〔雪〕에 파묻히는 것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눈물이 흘러나오는 육체적인 상처의 구체적인 지점이 서로 부대끼면서 시는 묻어나온다. 시인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눈물이 번져나오는 삶의 구체적 감각을 언어로 봉합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바다’와 ‘음악’으로 합쳐지는 장시 「바닷속」에 이르는 시의 장정을 이 시집 속에서 그려보인다.

〔시인의 말〕

나=아버지=역사의 죽음. 그 죽음을 다리삼아 나는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건너왔다.
그, 죽음으로, 역사가 생동한다. 다리는 다리가 된다. 기이한 생동이고 다행의 일상이다. 그리고, 그…… 다리가 또 하나 있었구나. 여전히, 시는 내 문학의 원인이자 결과다.

2000년 11월
김정환

〔해설〕
의지의 충만에서 무의미의 역동성으로
―김정환론

정과리

우리가 말의 힘을 말한다면 김정환의 시만큼 그에 맞춤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시가 진화해온 역사를 보면 그렇다. 가령,

나는
네가 이렇게 말짱히 살아서
내 앞에서 눈이 부시게
나타나 서 있는 것만 해도
그저
말문이 떨리고 목이 메고
꿈만 같구나
―「 지하철 정거장에서·둘 」, 『 지울 수 없는 노래』

라고 그가 말했을 때, 말은 발성되자마자 사건을 낳는다. “ 말문이 떨리고 목이 메”일 뿐만 아니라, “ 꿈”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런데 꿈이야말로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 무의식의 언어로 무언가를 쓰자마자 그대로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세계인 것이다. 물론 위 시구만 보고서 어떤 이는 꿈의 세계로 유도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시선’이라고 핀잔할 것이다. 말문의 떨림 등을 유발한 것은 “ 네가” “ 내 앞에서 눈이 부시게/나타나 서 있는,” 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구만 보지 않고 시를 본다면, 이것은 눈의 사건이 아니라 분명 말의 사건이다. 이 시의 ‘너’는 지하철 정거장에서 ‘나’가 겪은 환각 속에서 상봉한 친구이다. ‘나’는 지하철 정거장에서 “ 열차”를 보고 “ 열차의 기적 소리”를 듣는다. “ 친구여 나는 네가 이렇게/사지가 둘로 동강나는 아픔을 치르어내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친구는 개인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표상이다. “ 네 수척한 수천 수만 개의 표정”이라는 묘사에 의한다면, 그 친구는 단수가 아니라 집합체이다. 이런 ‘친구’는 환각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공간과 부피와 무게와 시간 등 모든 존재의 경계들이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환각 속에서 ‘내’가 보는 것은 “ 몹쓸 병” “ 곪고 썩어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 “ 희망” “ 안쓰러워 행여 슬퍼 보”이는 표정들이다. 이 참상을 “ 치르어내고/〔너는〕 생생한, 살아 꿈틀거리는 비린 몸짓으로/서 있”다고 ‘나’는 말한다. 어떻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건으로부터 ‘눈부신’ 사건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매개물은 이 시 안에서는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 두 개의 광경에서 시선은 태어나자마자 유폐당한다. 이 광경들은 시선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폐-시선의 원인이다. ‘눈뜨고 볼 수 없고’ ‘눈부시기’때문이다. 이 폐-시선 사이의 이행을 주도하는 유일한 중개자는 그것을 그렇다고 진술하는 ‘나’의 말뿐이다.

말과 사건의 이 초고속 전이(轉移), 두 눈시울의 급속한 점멸을 가능케 하는 이 시의 ‘말’은 말이 아니라 의지 혹은 갈망의 권화이다. 아니, 말의 바른 의미에서 가장 본질적인 말이다. 말이란 그것이 태어났을 때 진실의 지시자이자 견인자로서 우뚝 섰기 때문이며, 그런 말들만 인류의 기억 속에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말의 원형은 성서와 사서삼경이다. 김정환의 초기시가 경전을 지향한 것은 그 때문이다. ‘황색 예수전’은 의지와 갈망의 총체이다. 폐허를 성전으로, 치욕을 위엄으로 단번에, 그러니까, 오직 글자의 운동만으로 치환하는 기계이다. 이 시절의 시가 온통 모순어법들로 뒤덮여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자유여 참상이여”(「 하기식 」, 『 황색 예수 2』), “ 패이면 패일수록 불꽃이 튀는/아아 저 피비린 얼음의 살을 보아라”(「 두 사람 」, 『 회복기』)……

그러나 김정환의 시는 잠언이 아니다. 잠언과 시를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은 말의 위치이다. 잠언에서 말은 항상 사건의 위에 혹은 앞에 있다. 벌어진 사건에 대해 발설된 말이라도 그렇다. 왜냐하면 잠언은 항상 궁극에 기댄 말, 종말론적 담화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김정환의 시는 사건 속에 있다. 아무렇게나 시구를 뽑아보자.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커스로 데리고 갔다.
9장 8-9절

아직은 내 곁에 둘 수도 없고
버릴 수 없네, 꽃은 새가슴 새근대는 향기를 지니고
연약한 허리, 하얀 허벅지를 지니고
흔들려, 속이파리째 파르르 떨리는 동안
흔들려 흔들려 참을 수 없이
그러나 내게는 땟국 젖은 입술이 있어
갈라져 두터운 손바닥이 있어, 사내의 털난 가슴
거칠은 호흡, 열매를 바라는
숨가쁜 욕망 피비린 혁명이 있어
꽃에게 줄 것은, 순식간에, 짓눌러 부숨.
그러나 꽃과 나 사이엔 빼앗긴 식민지가 있어
분내 나는 프랑스가 아메리카 성병이 있어
칼날 숨긴 유혹과, 도취와, 타락과, 메스꺼움과, 아름다움과, 지배, 피지배
아아 왈칵 쏟아질 ―「 다시, 꽃 」, 『 황색 예수 2』

시 머리에 인용한 구절은 성경에서 옮겨온 것이다. 시인은 이 성경의 말씀과 자신의 시구를 이어서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시가 진리의 개진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둘의 말법은 그저 동일하거나 연속적이지 않다. 머리 인용은 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사울의 행적을 성경을 통해 미리 알지 못한 상태의 독자라면 더더욱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은 아래의 시구와 대조되어 서서히 사건의 배후로 물러난다. 그 첫번째 표지는 동사의 시제이다. 성경의 과거형은 독자에게 곧바로 그 지나간 사건의 결과를 궁금케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아래에 씌어진 시의 내용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시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현재적 상태, 결코 결정되지 않았고 안타까움과 갈등으로 몸부림치는 상태를 적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도 결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 내게는 땟국 젖은 입술이 있어/〔…… 〕 피비린 혁명이 있어”로 숨가쁘게 나열된 확신의 항목들은 시 또한 미정의 상태로부터 곧바로 단호한 결론으로 직행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확신은 대번에 “ 그러나 꽃과 나 사이엔 빼앗긴 식민지가 있어/분내 나는 프랑스가 아메리카 성병이 있어”의 확인에 의해서 뒤집어진다. 갈등의 상황은 확언에 의해 무마되지만 확언은 다시 확언에 의해 뒤집어져, “ 도취와, 타락과, 메스꺼움과, 아름다움과, 지배, 피지배”라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모순의 상황, 즉 현재진행형의 상황으로 욱신거린다.
그러나 경전은 시의 끈덕진 배후로 작용한다. 그 때문에 시는 현상들의 세계를 관통하는 대신에 끊임없이 진리와 말씀을 향하여 치받는다(이 시가 확언들의 순환으로 귀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그대/앙칼진 사랑의 무기”(「 사랑 노래·셋 」, 『 지울 수 없는 노래』)라고 말하는 표현을 읽었을 때, 혹은 “ 기름 묻은 근육에 핏줄 불끈불끈 솟는 것”(「 타는 봄날에 」, 『 지울 수 없는 노래』)을 볼 때, 독자는 그 치받음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치받음이 잠언의 내리침과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면이다. 치받음은 내리침과 어떻게 다른가? 사건의 내부에 머물면서 사건 넘어로 초월하려는 의지가 압도할 때 사건의 현장은 단박에 무의미의 파편들로 산산이 조각난다. 시인이 시의 기본 정황을 “ 저질러진 역사”라고 지칭하고, 그의 시에 “ 희망은 곪고 썩어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러도”(「 지하철 정거장에서·둘 」, 『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서처럼, 피·똥·오줌·눈물 등 질펀한 액체성의 이미지들로 넘실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액체성이야말로, 이미 썩고 있는 무너짐, 그리고 대책 없는 쏟아짐이다. 그것은 의미의 붕괴를 넘어 무의미의 만연, 아니 격렬한 무의미화를, 그가 자주 쓰는 용어를 빌리자면, “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아마도 김정환을 ‘물의 시인’이라고 명명해도 괜찮으리라. 그에게서는 어떤 감각들도 물의 이미지를 경유한다. “ 흩뿌리고 지나간 남은 불빛”(「 순천역 」, 『 황색 예수 2』), “ 이 밤 또다시 별빛은 이슬로 쏟아져내리고”(『 황색 예수 3』), “ 배추 껍질 진흙창에 나뒹구는 시장 바닥”(『 황색 예수 3』) 같은 시구들은 그의 시에 편재한다. 이 물들은 죽음의 물이다. 김정환의 물은 넘쳐남, 썩음, 더러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삶에 가해진 폭력으로 인해 탈의미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존재들의 붕괴의 광경, 끝없는 무의미의 복제이고 그것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이다.
김정환의 물은 ‘오물’이다. 모든 단단한 것들이 곪아터져 질질 흘러내린 것, 그것이 김정환의 액체성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오물은 역설적으로 생명수이다. 그가 왜 이 오물들이 증가하는 사태를, 오물들이 넘쳐나는 광경을 되풀이해 보여주는가? 그것은 죽음의 순간을 최대한도로 늘이는 행위이다. 본래 죽음은 시간의 정지이다. 그런데 시인에 의해서 그 정지는 영원한 운동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죽음 안에 가장 밀도 짙은 생이 개입한다. 이것이 시인이 경전을 도입한 실상이다. 굴러떨어지는 것들의 되풀이되는 치받음이 그것의 의미이다. 생의 가속적인 무의미화에 죽음의 반복적인 의미화가 포개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해체와 분산의 액체성의 이미지들은 끈적거리는 점액질을 통해서 실물감을 획득한다.

가령, “ 그대는 내 눈물 거치른 시야 속에서/출렁거리나니, 대책 없는 물기로/목젖에 미치는 불덩이로/뜨거워 뜨거워 못 참고 흘러서 적실 때”(『 황색 예수 3』)라고 시인이 말할 때 저 눈물의 출렁거림은 “ 거치른 시야”의 ‘거’을 더욱 부각시키며, 동시에, 그 ‘거’에 습기를 스미게 해 “ 못 참고 흘러서 적”시게 한다. 생의 파열은 그대로 죽어가는 생명체들의 꿈틀거림이 된다. 물[水]로부터 오물(汚物)로의 전화는 그러니까 박탈당하는 의미의 공백에 존재의 구체성을 채운다. 그것은 진리의 절실성에 못지않은 생의 절실성을 확보하는 절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로부터 김정환적 액체는 부정적 현상이기를 그치고 적극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왜냐하면, 액체는 그의 늘어나는 성질로 말미암아, “ 우리들 사랑에 섞인/액체”(「 사랑 노래·하나 」, 『 지울 수 없는 노래』)에 표현되어 있듯이, 보편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매질이기 때문이다. 그 액체는 “ 그 어쩔 수 없음의 어마어마한 액체”이다. 애초에 죽어가는 것의 어쩔 수 없는 터짐은 이제 그 어쩔 수 없음의 불가피성을 그대로 간직하고서 생의 필연성을 선취한다. 이때가 되면, 메마른 것, 깨끗한 것, 확실한 것이 오히려 무의미이다: “ 30킬로그램도안된다는결벽심한몸매그결벽의한계에대해서 나 는 절 규 했 다!”(「 광복절 일기 」, 『 회복기』); “ 헤어지고 또 헤어지는 이 공복 이 갈증으로/세상은 의미 없는 아우성만 남고”(「 이별 노래 」, 『 황색 예수 2』). 그리고 넘치는 액체성은 해방과 희열의 표상으로 확대된다: “ 내 잠자리는 밤마다 밤마다 젖어도 좋다”(「 한강·둘 」, 『 지울 수 없는 노래』); “ 꿈에도 그리던 해방 되고 바닷물 굽이쳐 춤췄어”(『 황색 예수 3』).

김정환이, 채광석과 더불어, 사회 변혁의 담지자로서 노동자를 지목하고 그 노동자의 존재적 특성을 “ 헐벗었기 때문에, 헐벗을수록, 더욱 차오르는 새 삶의 가능성”으로서 규정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정치적 태도가 그의 시적 마술과 맞물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로부터 독자는 중요한 한 가지 발견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정치적 논리가 소박한 민중주의와 다르다는 것이다. 후자에게서 민중의 변혁 가능성은 그의 ‘순수성,’ 즉 부르주아 사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추정)로부터 온다. 이 순수성이 그러나 일종의 허구임을 우리는 8,90년대의 실제적 경험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이것은 또한 20세기 중반기에 서양의 몇몇 지식인들이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에 비추어볼 때 김정환의 정치적 논리에는 ‘순수성’이 매개항으로 놓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순함, 더러움이 매개항으로 놓인다. 그것은 그가 폐허의 정황 속에서 파괴된 것을 보지 않고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파괴되어감의 운동성이 그에게는 곧바로 건설의 운동성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 부디 살아 있는 자만이라도 아픔의 생생한 상처를 찾게 해달라”(「 사랑으로서의 지진에 대하여 」, 『 황색 예수』)고 그는 말했거니와, 그 생생한 상처야말로 그 전환의 심원,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편재적 심원이다. 왜 편재적이냐 하면, 그것은 상처입고 피 흘리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든 형성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이야기되겠지만, ‘순수성’은 시인의 항상적 강박관념으로서 작용한다. 그것이 『 기차에 대하여』에서 추진된 배제의 변증법의 근거가 된다. 순수성은 김정환 시의 매개항은 아니지만 끈질긴 간섭항이다.)

김정환의 물의 시학은 넘치는 주관성의 세계, 비린 육체의 세계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가 그의 『 기차에 대하여』를 전율과 함께 읽고서 그 이후 다시 들쳐보지 않았던 것은. 『 기차에 대하여』는 절정이자 동시에 정지였다. 그것은 헐벗음, 충만함의 김정환식 정치학을 가장 높이 끌어올리는 동시에 헐벗음의 폐기를 집행한다. 물론 그곳에서도 헐벗음, 굶주림, 약함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여전히 생의 조건, 아니 ‘살아냄’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 헐벗음, 굶주림, 약함은 곧바로 과거로 물러나버린다. 가령, 『 기차에 대하여』의 화자는 말한다: “ 물론 그렇다 끝내 완강하게 버팅긴/슬픔의 변혁 의지가/배부른 자 최고의 지평을 적실 뿐만 아니라/또한 아프게 넓힌다”고. 그러나 그는 서둘러 잇는다: “ 그러나 그렇게 약한 고리는/강하기 위해 있다”라고.

그전의 시에서 헐벗음과 충만함은 함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 시간이 개입한다. 시간이 개입하여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구절이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기차를 뺀다면 80년대는
그렇게 환장할 백치미의 양갈보와
식민지 半封建의 어머니
그리고 고층 빌딩의 바퀴벌레 같은
매판 세일즈맨과
눈물과 색정을 섞은
음란 영화 포스터 말고 뭐가 남겠나
―「 우리가 누추하다는 말은 」, 『 기차에 대하여』

이 구절에서도 저질러진 역사의 세목들은 빠짐없이 재등장한다. 그러나 이 세목들은 여기에 와서 집중된다. 기차로. 그렇게 집중되는 대신, 다른 것들, ‘양갈보’ ‘어머니’ ‘세일즈맨’ ‘음란 영화 포스터’는 모두 배척된다. 그것들은 기차에 비한다면, 그저 부정적 생의 부정적 양태들일 뿐이다. 오직 기차만이 부정적 생을 부정하는 힘이다. 기차의 부정성은 이제 선택적 부정성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의 개입은 배제의 변증법을 발동시켰다.

이와 더불어 물은 빛과 결합한다. 선택된 부정성(기차)은 이미 성화된 것이다. 김정환의 근본 이미지가 물이라면, 저 피비린내 나는 썩은 물은 어느새 빛을 머금는다. 그리고 빛을 머금은 물은 곧바로 쇳물로 딴딴해진다.

음침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기름 묻은 이슬이 검게, 선로 위에서 반짝인다
―「 검붉은 눈동자 」, 『 기차에 대하여』

검게 젖은 나뭇가지 사이 촉촉한
―「 나비 」, 『 기차에 대하여』

함성 위에 굵은 눈물로
더욱 강인한
철길 위해 ―「 철길 위에 쓴다 」, 『 기차에 대하여』

눈물의 빛
강인한 눈물의 토대로 생산과
찬란한 눈물의 근육과 투쟁과
영롱한 눈물의 얼굴과 젖가슴과
―「 서시·美人 」, 『 기차에 대하여』

이슬은 이미 기름 묻어 반짝이고, 나뭇가지는 젖어도 검게 젖어 딴딴하게 빛난다. 눈물의 물길은 강인한 “ 근육으로 역동한다.” 그리하여 “ 눈물에도 화살이 들어 있”(「 전선은 눈물을 향해 」, 『 기차에 대하여』)어 다음의 구절:

혼자이지만, 하나가 아닌 울음 속에서
탄생한 빛을
무쇠로 부딪쳐왔던
방패와 어깨의 충돌 속에서 탄생한
강철보다 견고한 눈물의 조직을
―「 울음, 그리고 빛 」, 『 기차에 대하여』

은, 이 눈물+빛=근육 무쇠의 연산식을 집약적으로 지시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무쇠의 구조물이 바로 기차이다. 그 “ 기차는 역사이므로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 『 기차에 대하여』). 그리고 이 기차에까지 와서 눈물은 이제 없다. 오직 번쩍이는 빛만이 있을 뿐이다. 『 기차에 대하여』의 마지막 시구는 이렇다:

그날, 낮과 밤은 노동자 계급으로 찬란하고
마지막 남은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것은 모두 의로운 죽음이나니
―「 찬가, 그날 」, 『 기차에 대하여』

그러나 “ 그날”은 오지 않았다. “ 내가 달려간 곳에 너는 없었다”(「 우리가 없다면 」, 『 사랑, 피티』); “ 봄이 왔지만 혁명은 오지 않았다”(「 메이데이의 노래 」, 『 사랑, 피티』). 아직도 관성처럼 치솟음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 찬란한 절정에서 배제의 변증법은 몰락한다. 그것이 시의 내적 결과인지 아니면 오직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어쨌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끔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시적 질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더 이상 너를 빛낼 어둠이 없다/더 이상 너의 눈물을 빛낼 꽃이 없다”(「 사랑 노래 1 」, 『 희망의 나이』).

희한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시인은 그의 시적 정황의 모태로 회귀한다.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은 현실, 오직 무의미를 향한 찢김과 붕괴와 피흘림의 현상학적 현실로. “ 오 나는/붙들 것이 현실밖에 없다”(「 첫눈 」, 『 희망의 나이』)고 시인은 쓴다. 이 말을 김정환만이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정환의 이 진술은 다른 누구의 어떤 말보다도 절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현실에 역사와 기억의 힘을 가지고 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강물로 비유한 것은 옳지 않았다 세월도
보라 옳은 것은, 사실 옳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역사 속에
남은 자의 몫일 뿐이다
남은 자의 기억은 옳지 않았다
피비린 기억보다 더 많은 것이 이룩되었다
―「 스텐카라친 」, 『 하나의 2人舞와 세 개의 1人舞』

실은, 역사를 강물에 비유한 것은 스텐카라친이 아니라 시인이었다. 그 비유가 옳지 못했다고 시인은 쓴다. 그것은 그가 물 무쇠의 변증법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기억은 무엇인가? 본래 김정환에게 기억은 주요 의미소가 아니었다. 기억은 그것이 되풀이의 가능성으로 존재할 때만, 다시 말해 순환의 형식을 가질 때만 의미 있다. 그 순환이 다람쥐의 순환이든, 나선형이든, 소용돌이든, 영원한 파문이든. 그런데 그는 순환을 거부했었다. 시인은 “ 모두 휩쓸려간 황량한 벌판의 끝에 서더라도/마침내 겨울이 오고 계절이 뒤바뀌는/역사의 순환 논리에 너는 귀기울이지 말거라”(「 아들 노래 」, 『 황색 예수 2』)라고 당부했었다. 그가 보기에 “ 역사는 앞으로 앞으로 진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에게는 기억이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이제 “ 우리들의 기억이/피비린 동안 그 모든 기억의 육체는 갔다”(「 프롤로그 」, 『 하나의 2人舞와 세 개의 1人舞』)고 말한다. 이 ‘기억’이 그의 역사를, 그런데 이제 ‘지나가버린’ ‘역사’를 뜻한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역사와 기억에서 어떤 힘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그의 물 무쇠의 변증법을 원리로서도, 체험으로서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그는 “ 거대한 탕진”이었다고 적는다:

다만 거대하게
탕진되는 무엇이 거대하게 무너지고
―「 스텐카라친 」, 『 하나의 2人舞와 세 개의 1人舞』

일찍이 그는 거대한 탕진을 예찬한 바 있다: “ 잠든 자를 깨우는 경건함으로/이 밤 너의 맘 모든 것을 탕진하라”(「 단식 노래 」, 『 황색 예수 2』). 이 거대한 탕진이 왜 필요했던가? “ 헐벗음과 찬 서리와 노동과 순결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 온통” “ 뒤덮”고 있는 “ 화려함”을 비워내고 “ 말라비튼 몸으로 현기증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이다. 이 대목에서 순결성은 목표가 된다. 그는 더러움과 피비린내를 생의 동력으로 삼긴 했으나, 그 동력은 라블레적인 거인의 파노라마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 더러움의 목표는 순결이었고, 마찬가지의 논리로 역사의 목표는 역사의 소멸이었다.

이 순결의 강박관념, 소멸의 꿈은 그의 시에서 은밀히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시의 미덕이기도 하다. 감추어진 것은 그만큼 목표로서의 힘을 상실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탕진의 분출력이 거대하게 용솟음쳤다. 그러나 숨어 있는 것은 기회를 만나면 거침없이 부상한다. ‘순수성’이 그의 시의 매개항은 아니지만 간섭항이라고 말한 소이이다. 그리고 그는 그 목표가, 혹은 강박관념이 탕진의 절정에서 단단한 형상으로 빚어졌다가 곧바로 무너지고 마는 것을 목격한다.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탕진과 순결 사이에 연속성이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다시 말해, 그 둘이 갈등을 일으켰다면? 아마도 시인은 성찰의 시학을 향해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의 개인적 체질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을 모든 시인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김정환에게는 김정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이제 시인은 다시 그 거대한 탕진을 말한다. 표면적으로 문제는 그 탕진이 아니라, 그 탕진이 무너졌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미 어조는 완연히 달라졌다. 예전의 능동성은 수동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탕진은 에너지의 이동이 아니라 그것의 붕괴로 지칭된다.

그러나 여기가 핵심의 지점이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시의 출발점으로 회귀하였다. 오직 현실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현실만이 존재하는 곳은 무의미가 만연한 곳이다. 그러나 그때 의미의 편재적 치솟음의 자리가 무의미가 낭자한 곳이었음을 회상할 수 있으리라. 시인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정확히 측정하고 있었다. 그에게 역사는 이제 힘이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덕분에 에너지가 다른 데로 빠져나가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그는 뚜렷이 본다.

역사상 쓰렸던 모든 패배들이 현실에서 중첩되고
스스로 무거워하고 있다, ―「 戰士 」, 『 희망의 나이』

는 그 인식의 표현이다. 그 인식은 무의미의 무거움을 의미의 불투명성과 동의어로 파악하게 한다.

그러나 지금
육체는 불투명하고
당분간 역사는
불투명한 채로 아름다울 뿐이다
―「 육체의 언어 」, 『 하나의 2人舞와 세 개의 1人舞』

혹은,

그곳은 더 멀어졌다 괴로운 사람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리도
距離 때문이 아니라 距離 속에서 아니
距離 속으로 괴로워야 한다 누가
분명하게 짓밟는다 ―「 별 」, 『 텅 빈 극장』

삶은 필연성이다, 때문에, 괴로움도 당연하고 짓밟힘도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삶의 현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 그 우울이 백성들을 이끌어온 내용이다”(「 삼중주 」, 『 순금의 기억』). 『 순금의 기억』은 이렇게 메지난다.

그러나, 그러니
부디 견딜 수 없는 죽음만 轉化, 電話하기를.
눈에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의 장관.
그러나 나는 그냥 반짝이는 우물을 보았을 뿐이다.
평양 기생의 눈동자처럼 엄정하게
검게 반짝이는 우물을. ―「 죽음의 전화 」, 『 순금의 기억』

이 검게 반짝이는 우물은 더 이상 저 검게 번쩍이는 무쇠가 아니다. 화자는 “ 그냥 반짝이는 우물을 보았을 뿐”이다. 우물은 쇠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무쇠는 더 이상 그의 육체, 그의 눈물의 권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쇠는 물로 환원된다. 그 환원된 물의 고임, 그것이 우물이다. 그 환원과 함께, 그것의 어느 한 부분이 삶의 경계 저 넘어로 탈락한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 그 자체의 꿈틀거림으로 증거하던 생의 원기가. 그것은 단지 저 넘어에서 반짝일 뿐이다. 여기에 남은 것은 거대하게 탕진된 죽음의 덩어리들이다.

『 순금의 기억』의 마지막 시편은 이제 우리가 펼쳐든 시집, 『 해가 뜨다』의 집약적 암시로 기능한다. 여전히 이 생에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의 덩어리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의 공간에 버려진 죽음의 덩어리이다. 그 덩어리의 빛은, 즉 뜻은 생의 경계 넘어로 건너가버렸다. 그 덩어리와 빛이 만나려면, ‘전화’가 있어야 한다. 그 전화(電話)는 전화(轉化)를 짝으로 한다.

영원은 아름다움의 주소가 아니라 무게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반짝인다
―「 금딱지 롤렉스 」

영원은 이곳에 무게로 남고, 저곳에서 반짝인다. 이것이 『 해가 뜨다』의 기본 구도이다. 이 기본 구도는 시인에게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우선, 시인은 전망을 버렸다. 그와 더불어 전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적 기제도 버렸다. 바로 물 무쇠의 변증법 말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전망을 도출하게끔 했던 삶이라는 재료는 버리지 않았다. 아니, 더 나아가, 전망과 전망의 방법론까지도 삶의 재료로 환원시켜버렸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삶의 재료는 더욱 두꺼워졌다. 그 환원의 결과, 전망은 이곳에서 붕괴하지만, 저곳에서는 “ 미래의 홍조”로 빛난다. 그것은 시인이 전망은 상실했으나, 옛날의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희망은 방법론이 없는 희망이다.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분열에 발목 잡힌 희망이다. 희망의 근거와 장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방법론이 없이, 이 치명적 분열을 안고 희망이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

「 죽음의 전화 」는 ‘전화(轉化)’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전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 부디 견딜 수 없는 죽음만 전화(電話), 전화(轉化)하기를.” 이것은 또한 배제의 변증법인가? 아니다. “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죽음만 전화가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요청이다. 그 속뜻은 “ 전화하려면, 견딜 수 없는 죽음이 되어다오”일 테니까 말이다. 또한 시는 분열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 전화(轉化)는 전화(電話)와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중개를 거쳐야 한다. 그 중개를 거치지 않으면 지난날의 탕진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 탕진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 설사의 공포 속으로 격리시킨다”(「 길을 돌아가다 」).

『 해가 뜨다』의 시적 전환점은 이 물음에 놓인다: 중개의 통로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시인에게 문제는, 그 통로가 발견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전망과 방법론의 폐기를 거쳐 삶의 재료들로 귀환하였으므로. 하지만, 발견할 수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그 스스로.

한데, 제작자로서의 주체는 삶의 재료에 머물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시의 주체를 시의 현장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개인으로서 독립한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라는 진술은 그 이전의 시에서 김정환적 주체는 결코 ‘개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 주체는 언제나 집단의 권화 혹은 계기였다. 그렇게 된 것은 그 집단이 인식의 주체이자 동시에 행동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 그렇게 시인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인식 주체와 행동 주체는 분리되었다. 행동 주체는 불활성의 덩어리로 굳었고 인식 주체는 그 덩어리로부터 떨어져나온다. 떨어져나오며 심한 외로움과 무기력에 시달린다. 그래서 묻는다: “ 빛이던 눈과 지도였던 두뇌와…… 그 모든 것이/사실인가”(「 and/between 」) 이 질문과 더불어 그에게 세상은 낯섦과 당혹감으로 가득 찬다.

88고속도로에 차가 밀리면서
내 뚱뚱한 뱃속에도 길이 난다 꾸륵꾸륵 소리를 내는 설삿길
―「 길을 돌아가다 」

차가 가득 밀린 88고속도로는 죽은-삶의 덩어리, 무의미의 덩어리이다. 이 덩어리가 화자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보라.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불변한다. 대신 두 개의 길이 난다. 하나의 길은 택시 운전사가 낼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덩어리를, 즉 세상을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회피하는 길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에 동조하지 못한다: “ 마음의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사처럼 씨팔 소리를 덧붙이지 못했다/마음으로도.” 왜냐하면, “ 설사 때문에.” 설사는 물론 생리적 현상이지만 이 시 안에서는 88고속도로의 내부로의 전이이다. 바깥에서 뚫리지 않은 길을 대리한다는 것이다. 그 대치는, 그러나, 비정상적 대치, 즉 바깥의 막힘을 보상하지 못하는 대치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바깥(무의미)을 재생산하면서(설사되는 음식물들), 다른 한편으로 몸의 고립(설사의 고통으로 인한 바깥으로부터의 격리)을 야기한다. 이 구조는 시인이 직면한 문제틀을 정확하게 되풀이한다. 이 문제틀에 의해서 과거는 되풀이되면서 동시에 파괴된다. 아니 실은 과거는 복구된다. 그런데 복구는 훼손된 것의 수선이 아니라, 은폐된 것의 드러냄이다.

한번은 너무 급해서 저 소음벽 사이를 꿰뚫은 적이 있다. 아파트
뒷동산 야트막한 숲, 그 속에서 엉덩이를 허겁지겁 까내리고 똥을 누다가
산책로를 심심하게 달리는 웬 평화로운 주부와 빤히 눈을 마주쳤었다
더 평화로운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숲은 야트막해서 내 백주 대낮의 배설을
발각시키지만 주부와 나 사이 수치심을 어느 정도 무마시켜준다. ─「 길을 돌아가다 」

그때는 괜찮았다. “ 주부와 나 사이 수치심”을 “ 숲”은 무마시킨다. 주부, 자연, 나 사이엔 자연스런 이어짐이 있다. “ 자연은 향그러운 내음과 분뇨 냄새 사이에 존재한다는 듯이.” 그러나 그때는 “ 모르고 들어가서 별천지였”다. 지금은 아니다.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의 자연스런 이어짐은 실은 의지를 자연화한 힘이었다는 것을(그는 자연의 순환성을 부인한 바가 있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순환성을 수직성으로 대치시킨 것, 그것이 자연이 되었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아니,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지며, “ 구슬 같은 현기증”(「 바닷속 」)을 느낀다.
19세기의 철학자 조아심 리터Joachim Ritter는 풍경의 탄생을 인간과 자연의 ‘반목divorce’(divorce의 통상적인 뜻은 ‘이혼’이다. 어쩌면 이 후자의 역어가 더 실감날 수 있겠다)으로 정의한 바 있다. 김정환의 ‘개인’은 ‘인간’과 ‘인간들’의 분리에서 비롯한다. 그 인간들의 세계는 그에게 괴이한 풍경으로 변한다. 그가 ‘파경’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세계, 그 세계이다.

이 최초의 개인은, 그러나, 제작자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 식의 개척자와도 다르고 돈 키호테 식의 광인과도 다르다.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그는 삶의 재료를 이미 인간 세계에서 가지고 있으며(적어도 재료화된 형태로), 돈 키호테처럼 생을 욕망화하기에는 그의 인식은 너무 명료해졌다. 이 ‘최초의 개인’은 인간의 생을 풍경으로 인식한다. 즉 그는 그것을 객관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객관성을 변형시키는 과제가 남는다.

이 제작자의 조건은 재료는 넘치는데 방법은 없다, 라는 것이다. 그 방법을 그는 재료에서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재료는 이미 방법조차 재료로 환원된 탕진된 생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그 자신밖에는 없다. “ 오 나는 붙들 것이 현실밖에 없다”는 그의 탄식은 그 스스로에 대해서는 “ 오 나는 믿을 것이 나밖에 없다”라는 진술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진술이 효과를 생산하는가?
그렇다. 그는 풍경(세상)을 보는 것, 그것 자체를 풍경을 재구성할 칼날로 변형시킨다.

눈이 내린다 무너질 듯, 내 몸을 파묻지 않고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말살하듯, 네 육체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사랑 노래 2 」

내리는 눈, 스스로 무너지고 내 몸을 말살할 듯이 내리는 눈 바깥에 ‘너’가 있음을 본다. ‘너’를 보는 것은, 그러니까, ‘눈[雪]’을 뚫어보는 ‘눈[眼]’이다. 이 무형의 ‘눈’이 드러나 쌓인 ‘눈’과 긴장한다. 그 긴장을 통해 그는 그 눈 넘어(이 눈 넘어가 세상 바깥으로 이탈한 빛, 홍조, 의미이다)의 존재와 신호한다. 이 눈의 이름은 ‘응시’이다. 그것이 개별자로 독립한 시인이 세상을 구성하는 방법의 첫 항이다.

그러나 이 응시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객관적인 응시가 아니다. 눈의 동음이의성을 시인이 왜 ‘이용’했겠는가? 세상으로부터 독립한 이 개별자의 원천은 바로 세상이다. 그는 애초에 세상 바깥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곳으로부터 돋아났다. 그 눈은 그러니까, 죽은 나무 등걸 위에 돋아난 ‘새 눈’이다. 눈은 객관적 시선이고, 눈은 바깥의 상관물이고, 눈은 주관적 육체이다.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 ‘사이’를 하나의 자기장이 관통하며 흐른다. 그때, 바깥의 상관물은 주관적 육체 속으로 스며들며,

그렇게 아버지는 내가 되셨다 ―「 금딱지 롤렉스 」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다 ―「 2000-1 」

주관적 육체는 바깥으로 향하는 만큼 안으로 하강하고 침전하여 팽팽한 표면장력을 이루고,

흩어짐의 線.
울음의 흔들림.
웃음의 깊이.
눈물의 표면 장력.
이것이 나의 사랑 노래다. ―「 2000-5 」

객관적 시선은 마침내 안과 밖을 잇는 내부 서사를 지향한다. 그 내부 서사의 수일한 광경이 여기에 있다.

내 몸은 세상 속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무엇을 짓고 무엇을 허무느냐고
바람은 폐허 그 후에 잉잉거린다
그렇게 내 안의 자연이 또 완성된다.
내 등뼈를 파고들던
각목이 그렇게 이야기로 전화한다. 그래.
우리는 모종의
절벽을 품고 강을 건넜다. ―「 2000-3 」

이 자발성의 서사, 단성 생식으로 시작하여 다종으로 분화되는 이야기가 『 해가 뜨다』가 마침내 도달한 언어의 새벽이다. 그는 말한다: “ 그러나 수평선 위로 해는 언제나 뜬다”(「 해가 뜨다 」). 김정환의 문맥 내에서 이 말은 미학적 전범으로서의 자연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시인이 애초에 거부했던 자연의 순환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삶의 무의미가 그 자체로서 현현하는 역동성을 가리킨다. 무의미의 역동성은 개인화된 나의 응시를 구멍으로 해서 나의 내부에서 펼쳐진다. 그 무의미의 역동성, 즉 “ 상처는 기억보다 거대하다”(「 바닷속 」). 이 상처를 장관으로 펼쳐낸 것은 바로 개인으로 돋아난 ‘나’의 응시의 노동이다. 그 개인은 따라서 집단의 은유(압축하면서 달라지는 것)이며, 그 응시는 따라서 응집이다. 그 응집은 “ 폭풍의 고요한 중심보다 고요하고/폭풍의 강력한 외곽보다 강력한/눈물 방울의/떨림”(「 역사와 미래 」, 『 하나의 2人舞와 세 개의 1人舞』)이다. 그 응집 혹은 떨림이 이야기를 낳은 것이다.

보이지, 凝集이 문체를 낳았다 ―「 바닷속 」

라고 시인은 말하지 않는가? 덧붙이자면, 미학적으로 이 응집은 또한 언어의 정제를 가리킨다. 김정환의 시가 이렇게 명징한 적이 없었다. 의지가 언제나 언어의 가두리를 넘쳐 흘렀기 때문이다. 그 과잉을 지금 그는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잉된 것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정확히 알고 있는 시인이다.) 그 과잉은 억제되는 게 아니라 분화되고 병렬된다. 김정환의 이미지들이 정제된 형상으로 계속적인 연상을 통하여 이동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병렬 이동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저마다 충분히 아름답고 서로에 대해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긴장 다음은, 그들의 원격 통신 그 이후는 무엇이 있을지, 그것은 시인도 모를 일이다. 다만, 시의 손톱만이 그 이후를 조금씩 파며 나갈 것이다. ▨

목차

〔차례〕

▨ 시인의 말

제1부
사랑 노래 2
금딱지 롤렉스
해가 뜨다
길을 돌아가다
and/between
2000-1
2000-2
2000-3
2000-4
2000-5
다시, 그 후
동기동창
발인과 매장

제2부
被殺
碑銘
희망
길의 진리
낙엽
다이애나 혹은 다이어트
正初
등소평
독재, 생애, 눈물, 광경, 음악 나의 母校
포옹
사랑 노래
萬人譜 高銀篇
신호등
一瞬
오래 전 먼 훗날
구두 한 짝
소나무 한 그루

제3부
바닷속sea-depth

▨ 해설·의지의 충만에서 무의미의 역동성으로·정과리

작가 소개

김정환 지음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울 수 없는 노래』 『황색예수전』 『회복기』 『좋은 꽃』 『해방서시』 『우리, 노동자』 『기차에 대하여』 『사랑, 피티』 『희망의 나이』 『하나의 이인무와 세 개의 일인무』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 『텅 빈 극장』 『순금의 기억』 『김정환 시집 1980~1999』 『해가 뜨다』 『하노이-서울 시편』 『레닌의 노래』 『드러남과 드러냄』 『거룩한 줄넘기』 『유년의 시놉시스』 『거푸집 연주』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 『소리 책력(冊曆)』 등이 있음. 백석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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