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화가 이중섭
이중섭처럼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화가도 드물다. 평전이 씌어졌고 두어 차례 무대에도 올려졌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에 관한 에피소드는 심심치 않게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 또한 화랑가에 이중섭전이 열리면 이중섭을,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신화에 열광한다.
이중섭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월남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한국 전쟁 이후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한 체제 모순적 고통, 사랑하는 연인과 같이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했던 태도와 그로 인해 맞게 된 비극적 죽음, 그리고 천재적 영감이 넘치는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그의 신화를 걷어내고 이중섭의 진면목을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특히 보론에 실린 소그림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논의와 그의 생애와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모성 콤플렉스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이중섭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풍요로운 자료가 될 것이다. 이제 전인권의 새로운 책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의 발간으로 인해 신화가 아닌 뜨겁게 살아 숨쉬는 그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책머리에〕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또한 천재 화가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신화 또는 천재라는 말이 남용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런 말들이 이중섭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시작했던 것도 그런 신화를 걷어내고 이중섭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중섭이 신화적인 화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그는 신화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했던 태도, 그로 인한 비극적 죽음, 야마모토 마사코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사랑, 그리고 천재적 영감이 넘치는 그림들은 영원히 살아 그의 신화적인 삶을 증언하고 있다.
1956년 40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 그에게는 몇 가지 구원의 길이 있었다. 만약 오래도록 사는 것이 구원이었다면 그런 의미의 구원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과 인생이 어느 지점에선가 타협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지켜온 예술의 길을 온몸으로 수호하려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으며, 그의 요절은 명백한 예술적 자살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이중섭이 국민적 차원의 의미를 갖는 화가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소그림,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어린이 그림은 식민지 시대에 위협받던 민족의 정체성과 자아를 회복시켜놓았다. 그의 작품들은 예술이란 좁은 영역을 넘어서 우리 민족이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성스러운 공동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나 이중섭은 아직도 먼 곳에 있다. 그는 아직도 진정으로 이해받지 못했다. 1976년 시인 고은은 “이중섭 사후 20년이 된 오늘날까지 그의 넋은 봉안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바 다. 그렇다! 지난 40년 동안 이중섭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떠도는 영혼이었다. 그러나 이제 진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영혼이 고이 잠들기를 기원해본다.
이 책은 부족한 점이 많다. 나는 미술에 대한 비전공자로서 많은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러나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미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람들─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의 입장에서 쓸 수 있었다. 아무튼 이 책이 이중섭과 이중섭을 사랑하는 관객들과의 사이를 좁히고, 한국 미술을 이해하는 데 미약하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 책이 나오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먼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의 선생님·선배·동료·후배 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히 최명 교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초고를 읽고 세심하게 교정까지 보아주시는 자상함을 보여주셨다. 황수익·김홍우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서울대학교 16동 644호에 모이는 ‘독립신문 사설 읽기 모임’ 참석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성균관대학교 미술교육과의 조선미 교수님, 시인 구상 선생님, 이중섭의 조카 이영진 선생님, 경원대학의 윤범모 교수님, 이중섭 전문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최석태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히 구상 선생님께서는 교통 사고를 당하셔서 수술을 받는 등 불편하신 몸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선 다시 전화를 주시기도 하셨다. 현대갤러리 박명자 사장님과 큐레이터 이화익 선생님에게도 많은 폐를 끼쳤다.
김흥수·이만익·임옥상·방혜자·노원희·오수환·한묵·오경환·김종학·강은엽·강명희·이준·변종하·김호득 선생님과 김환기·장욱진·이응노·최욱경 선생님의 유족 또는 관계자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림 게재를 허락해주셨다. 이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더운 여름 이 책의 출판을 위해 묵묵히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0년 9월
전인권
〔이중섭 연보〕
1916년(0세)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형 중석은 11살 위. 누나 중숙은 10살 위. 지주 집안으로 매우 부유했음.
1920년(4세) 아버지 사망.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주면 그린 후에 먹었다고 함.
1925년(9세) 서당에 다니다가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 평양 외가에서 학교를 다님. 김병기와 같은 반이 됨. 초등학교 시절 고구려 고분 벽화를 관람하고 감명을 받음.
1930년(14세) 오산학교에 입학. 하숙 생활을 함.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 교사의 지도를 받음.
1935년(19세)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
1936년(20세) 보다 자유분방한 문화학원으로 학교를 옮김. 친구 김병기와 오산 선배 문학수가 상급 학
년에 있었고,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의 지도를 받았음.
1938년(22세) 1937년 결성된 ‘자유미술가협회’ 2회 공모전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고 격찬을 받음.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연애.
1940년(24세) 문화학원 졸업. 4번째 ‘자유미협’ 공모전에 「서 있는 소」 「망월」을 출품. 연말 고국을 방문하였다가 마사코에게 엽서그림을 보내기 시작.
1941년(25세)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 김종찬·김학준·이쾌대·진환·최재덕·문학수 등과 ‘조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 개최. 이 전시회에 「연못이 있는 풍경」 출품. 이어 똑같은 전시회를 서울에서 개최. 5번째 ‘자유미협’ 공모전에 「망월」 「소와 여인」 출품. ‘자유미협’의 준회원 격인 회우(會友)로 추대됨.
1942년(26세) 6번째 ‘자유미협’ 공모전에 「소와 아이」 「소묘」 「목동」 등을 출품. 일본 식민 당국의 강요에 의해 ‘조선미술가협회’가 ‘신미술가협회’로 개칭.
1943년(27세) 7번째 ‘자유미협’ 공모전에 「소묘 1」 「소묘 2」 「소묘 3」 「망월」 「소와 소녀」 「여인」 등을 출품.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 회원(會員)으로 추대. ‘신미술가협회’ 전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전쟁 상황으로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포기.
1945년(29세) 마사코가 한국으로 건너와 결혼. 10월 서울에서 열린 ‘해방기념문화대축전 미술전’에 출품하려 했으나 기한이 늦어져 실패. 대신 미도파 백화점 지하에 벽화를 그림. 이 벽화는 복숭아나무에 아이들이 매달린 그림이었다고 함(아마도 「도원」과 비슷한 작품이었을 것임). 연말에 평양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 개최.
1946년(30세) 북한 체제 아래 결성된 ‘조선예술동맹’의 회화부 부원이 됨. 원산사범학교 미술 교사가 되었으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몰라’ 일주일 만에 사직. 닭을 키우다 닭그림을 그리게 됨. 첫아들 사망. 이로 인해 군동화(群童畵) 연작이 시작됨. 일본인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친일 부르주아지로 지목받는 등 창작의 고통을 겪음.
1947년(31세) 8·15 기념 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하여 소련인 평론가의 호평을 받음. 아들 태현 출생.
1949년(33세) 아들 태성 출생. 강원도 금성군에 거주하던 화가 박수근과 교류.
1950년(34세) 형 이중석 행방불명. 원산 수복 후 대한민국 체제 아래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초 피난길에 오름. 부산 범일동 창고에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 거처를 정함. 부두에서 막노동.
1951년(36세) 제주도로 피난. 서귀포 현치수·김순복 부부의 집에 거처를 정함. 고구마와 배급으로 받은 보리로 연명. 게를 잡아 반찬으로 하며 게그림을 그리게 됨. 장차 그리게 될 벽화를 위해 조개껍질을 수집. 부산으로 나와 다시 범일동에 거처를 정함.
1952년(37세) 대한민국 국방부 ‘종군 화가단’에 가입. 황염수의 소개로 부산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회사’ 작업실에서 약 2∼3개월 간 침식을 함. 이때 대학생이던 김서봉과 함께 지냄. ‘3·1절 기념 경축 미전’에 출품. 아내와 두 아들이 생활고로 일본으로 건너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시작됨.
1953년(38세) 오산 후배 마영일에게 거액의 금전 사기를 당해 일본에 있던 아내에게 커다란 빚을 지게 함. 7월말 아내와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으나 일주일 만에 귀국. 유강렬의 호의로 통영에서 작품 생활. 이때 많은 걸작이 탄생함.
1954년(38세) 박생광의 주선으로 진주에 머물며 작품 활동. 서울로 상경.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 출품. 종로구 누상동 정치열의 집에 거주하며 작업에 몰두. 연말에 입원 치료를 받음.
1955년(38세) 1월 ‘미도파 전시회’를 개최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음. 전시회 이후 수금이 안 되어 의기소침. 친구 구상의 권유로 5월 대구 미국 문화원에서 ‘대구 전시회’ 개최. 이후 거식증과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며 대구 성가병원에 한 달여 입원. 이종사촌 이광석과 함께 상경하여 그의 집에 머무름. 수도육군병원, 성베드로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음. 정릉 시절 사실상 마지막 작품인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그림.
1956년(40세) 미국 ‘모던 아트 뮤지엄’에서 은지화 3점을 영구 보관. ‘청량리 병원’을 거쳐 9월 6일 ‘적십자 병원’에서 사망. 직접적 사인은 간장염.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고 유해의 일부가 망우리 공동 묘지에 묻힘. 또 다른 유해의 일부는 일본에 있던 아내에게 전달되어 야마모토(山本) 가문의 묘지에 묻힘.
1960년 부산 ‘로타리 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림.
197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 기념 전람회 개최되고 유작 작품집이 마련됨.
1973년 시인 고은에 의해 『이중섭 평전』이 출판됨.
1978년 문화훈장이 추서됨. 아내 마사코가 대신 수상.
1986년 30주기를 맞아 ‘호암 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작품집이 발간됨.
1996년 서귀포시가 이중섭 기념관을 개관하고 ‘이중섭 거리’를 제정함.
1999년 1월 문화관광부는 이중섭을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갤러리 현대’가 특별전 개최.
〔작품 목록〕
글을 시작하며
1) 「애들과 끈」, 종이에 유채, 32.4×49.7cm.
2) 「봄의 어린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cm.
3) 「네 어린이와 비둘기」, 종이에 연필, 31.5×48.5cm.
4)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종이에 먹과 수채, 25.8×19cm.
5) 「두 어린이」, 종이에 먹물, 6.7×38.3cm.
6) 「손」, 종이에 유채, 18.4×32.5cm.
7) 「손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17×14cm.
제1장
8) 「흰 소」, 종이에 유채, 34.5×53.5cm.
9)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0) 「투우」, 종이에 유채, 17×39cm.
11) 「제주도 풍경」, 종이에 잉크, 35×24.5cm.
12) 「황소」, 종이에 유채, 26×36.5cm.
13) 「황소」, 종이에 유채, 25×35cm.
14) 「파란 게와 어린이」, 종이에 유채, 30.2×23.6cm.
15) 「실에 매인 게를 끄는 아이」, 은지화의 부분도.
16) 군동화의 어린이 포즈들.
제2장
17) 엽서그림 「새 사냥」, 엽서에 펜과 수채, 14×9cm.
18) 엽서그림 「두 사슴」, 9×14cm.
19) 엽서그림 「두 사람과 나무」, 14×9cm.
20)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21)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22) 「투계」, 종이에 유채, 29×42cm.
23) 「애들과 끈」, 종이에 유채, 19.2×26.4cm.
24) 「천도화와 노란 어린이」, 종이에 유채, 32×24cm.
25) 「가족」, 종이에 유채, 40×27.5cm.
26) 「동그라미」, 목판화에 도장밥, 14×9cm.
제3장
27) 「청룡도 강서대묘 현실 동벽」.
28) 「무용총 수렵도」.
29) 「문자 추상」(이응노), 캔버스에 유채, 130×131cm.
30) 「작품」, 사진으로만 남은 작품.
31) 「십자가 위의 순종」(루오), 에칭과 아콰틴트 부식 동판화, 58.7×42.8cm.
32) 「서 있는 소」, 사진으로만 남은 작품.
33) 청자상감진채포도동자문표형주자.
제4장
34)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40.3cm.
35) 「화가와 가족」,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편지에 동봉한 그림.
36)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종이에 연필과 유채, 10.5×12.5cm.
37) 「물고기와 아이」, 종이에 연필과 수채, 13.2×17.2cm.
제5장
38)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제6장
39) 엽서그림 「아이와 여인과 물고기」, 9×14cm.
40) 엽서그림 「삼두일체의 동물을 탄 여인」, 9×14cm.
41) 엽서그림 「큰 말과 작은 사람들」, 9×14cm.
42) 엽서그림 「교차하는 직선과 작은 사람들」, 9×14cm.
43) 엽서그림 「사랑에 관한 추상」, 14×9cm.
44) 엽서그림 「두 오리와 아이」, 9×14cm.
45) 엽서그림 「클로버와 아이」, 9×14cm.
46) 엽서그림 「해변과 클로버와 오리」, 9×14cm.
47) 엽서그림 「물고기와 여인」, 9×14cm.
48) 엽서그림 「물고기와 여인들」, 9×14cm.
49) 엽서그림 「세 개의 동그라미와 아이」, 14×9cm.
50) 엽서그림 「두 사람」, 14×9cm.
51) 엽서그림 「육욕」, 14×9cm.
52) 엽서그림 「육욕과 네 사람」, 14×9cm.
53) 엽서그림 「세 사람」, 9×14cm.
54) 엽서그림 「얼굴」, 14×9cm.
55) 「사나이와 두 아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39.5×48cm.
56) 은지화 「애정」.
57) 「가족」, 종이에 연필, 15.7×11cm.
58) 은지화 「가족」.
59) 「천도복숭아」, 종이에 연필, 13×8cm.
60) 「두 개의 복숭아」, 종이에 유채, 20.2×26.7cm.
61) 「도원」, 종이에 유채, 65×76cm.
62) 「일월도」.
63) 「십장생도」.
64) 「서귀포 환상」, 합판에 유채, 56×92cm.
65) 은지화 「도원」, MoMa 소장품.
66) 은지화 「도원」, MoMa 소장품.
제7장
67) 「세 사람」, 종이에 연필, 18.2×28cm.
68) 「소년」, 종이에 연필, 26.4×18.5cm.
69) 「돌아오지 않는 강」,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cm.
70) 「가난한 사람들의 꿈」(디에고 리베라).
71) 「우이차판의 저수지」(막시모 파체코).
72) 「해변의 아이들」, 종이에 연필과 유채·수채, 32.5×49.8cm.
73)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제8장
74) 「노상의 여인」(박수근), 캔버스에 유채, 25×20cm.
75) 「월매」(김환기), 유화, 100×72.7cm.
76) 「까치」(장욱진), 캔버스에 유화, 41×32cm.
77) 「모자상」(이만익), 캔버스에 유채, 45.2×60.8cm.
78) 「춤추는 가족」, 종이에 유채, 22.7×30.4cm.
79) 「춤」(마티스), 캔버스에 유채, 258.1×389.8cm.
80) 「자화상」(장욱진), 캔버스에 유채, 27.2×22cm.
81) 「자화상─ 달마의 콧수염」(한묵), 캔버스에 아크릴, 200×150cm.
82) 「자화상」(방혜자), 55×46cm.
83) 「자화상」(오수환), 캔버스에 유채, 63×33, 63×33, 63×33cm.
84) 「자화상」(최욱경), 종이에 연필, 200×91cm.
85) 「자화상」(임옥상), 종이 부조 아크릴, 67×120cm.
86) 「자화상」(김종학), 아크릴, 33.5×73cm.
87) 「자화상」(김흥수), 캔버스에 유채, 61×50, 33×24 25×33cm.
88) 「자화상」(강은엽), 아크릴, 40×160cm.
89) 「자화상」(강명희), 캔버스에 유채, 60.5×50cm.
90) 「자화상」(노원희), 아크릴과 유채, 72×190cm.
91) 「가디 가의 초상화」(아놀료 가디), 판 템페라화, 47×89cm.
92) 「자화상」(이준), 종이에 유채, 35×25cm.
93) 「자화상」(변종하), 캔버스에 유채, 16×11cm.
제9장
94) 제주도 주민의 초상화.
95)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71cm.
96) 「현해탄」, 종이에 유채, 21.6×14cm.
97) 「충렬사 풍경화」, 종이에 유채, 41×29cm.
98) 「흰 소」, 나무판에 유채, 30×41.7cm.
제10장
99) 「새장 속에 갇힌 새」, 종이에 유채, 26×35.5cm.
100) 「결박」, 종이에 유채, 12×15.5cm.
101) 은지화 「손발이 묶인 사람들」.
102) 「묶인 새」, 종이에 연필, 25×18cm.
103) 「성당 부근」, 종이에 유채, 34×46.5cm.
104) 「정릉 풍경」, 종이에 연필과 유채, 44×30cm.
글을 맺으며
105) 「길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10.5×25.7cm.
106)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5cm.
보론
107) 「소와 새와 게」, 종이에 유채와 연필, 32.5×49.8cm.
108) 「소와 아이」, 합판에 유채, 29.8×64.5cm.
109) 「소와 소녀」.
110) 엽서그림 「소와 소녀」, 14×9cm.
111) 「투우」.
112) 「망월 1」, 사진으로만 남은 작품.
113) 「망월 2」, 사진으로만 남은 작품.
114) 엽서그림 「소를 치켜든 사람」, 9×14cm.
〔차례〕
책머리에
글을 시작하며 이중섭과의 만남
제1장 소그림과 군동화
제2장 엽서그림과 닭그림
제3장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 1
제4장 편지분석과 완벽한 결합에의 열망
제5장 공동체적 자아
제6장 억제된 에로티시즘과 음담패설
제7장 이중섭 예술의 정신적 배경:
제7장 생명에 대한 찬양과 종족적 미의식
제8장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제9장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 2
제10장 비극적 종말과 폐쇄적 미의식
글을 맺으며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보론 황소그림의 의미와 모성 콤플렉스
이중섭 연보
작품 목록
참고 문헌
찾아보기
앗…
오른쪽 귀가 아니라 왼쪽귀….이군요..ㅎㅎ
은화지 그림의 윗쪽 네모난 틀속 말이지요.넹…
이중섭을 열애하는 일반인?입니다.
이중섭에 관한 책은 여지것 해서 두권이 전부입니다.
두권중의 이 책이 하나인데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번째.
그분의 그림에서 이남덕님의 모습이 몇점에서 (귀가) 부처 또는 보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이점에 관한 언급이 없는 걸로 봐서는…하는 의혹(?)..^^”’
두번째.
은지화 중 페이지 131쪽에 실린 애정에 관한 그림의 설명중에
‘~위쪽 네모칸 안에는 분명 남자의 성기와 손가락이 나타나 있다”페이지118의 글에 대해 의문이 드는 점은
그 네모난 틀속의 그림은 이중섭의 오른쪽귀를 애무하는 손가락이 아닌가 하는데요.거꾸로 보면 확실히 잡히는데..
다른책에선 또 다른 손가락의 모습이라는 글도 있더군요.
이에 대해 아시거나 관심있으신 분 계시다면 모쪼록 갈증을 풀어 주심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