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시집『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 박라연의 시집.
이번 작품에서 시인이 말하는 정원은 꿈의 공간이다. 현실 세계에서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열망들의 공간이기에 죽음과 대면하는 장소일수도 있으나 시인은 그러한 독자의 이해를 강하게 부인하듯 현실에서의 공중 정원으로 새순이 돋아나는 가지를 공중에다 펼치고 있는 나무를 주목해보이고 있다.
〔시인의 말〕
마흔아홉 해의 꽃잎
거북머리로 흘러들어간다
종착역인 양 門을 닫아버린다
마흔아홉 해를 다시 산다
금오산 거북이의 육체
뒷머리 깊은 곳에 이르러
놓고 가고 싶던
거북이 밖에서의 마흔아홉 해,
새끼 버리는 일처럼 부끄러워
스스로 停電!
거북머리 正동쪽에 엎드린다
수천 번쯤 오체투지!
內, 外의 꽃잎 겹쳐진다
거북이의 머리 다시 열린다
겹으로 살아내느라
얇디얇은 꽃잎에 박혀진 옹이
꽃 결이 된 옹이들을
받아 안아주실 것 같은
아직은 이름을 외칠 수 없는
나의 스승님께
겹꽃의 가시를 함께 견뎌줄
아직도 詩를 아끼는 분들께
덩달아 아프게 살 나의 짝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00년 9월
박라연
〔해설〕
죽음의 산란(産卵)
오형엽
박라연의 이번 시집은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이 만나 충돌하며 불꽃을 일으킨다. 이 불꽃은 때로 너무 강렬하여 우리의 눈을 현란하게 하지만, 그것은 우물 속에 잠겨 있는 불꽃과도 같아서 우리의 시선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으로 인도한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석양을 묘사하는 부분인데, 여기서 시인은 석양의 ‘빛’을 ‘알’로 치환하고 있다.
공중의 허리에 걸린 夕陽
사각사각
알을 낳는다
달디단 열매의 속살처럼
잘 익은 빛
살이 통통히 오른 빛
뼈가 드러나도록 푸르게 살아내려는,
스물네 시간 중 단 십 분만 행복해도
달디달아지는
통통해지는
참 가벼운 몸무게의 일상 속에서만
노을로 퍼지는
저 죽음의 황홀한 産卵
육백여 분만 죽음의 알로 살아내면
부화될 수 있다고 믿을 생각이다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던 한 生의 그림자
그 알을 먹고 사는 나날을 꿈꾼다
없는 우물에
부화 직전의 太陽이 걸렸다!
심봤다! ―「공중 속의 내 정원 1」 전문
석양은 태양의 이동 경로 중 끝자리에서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이 석양의 ‘빛’을 ‘알’로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달디단 열매의 속살처럼/잘 익은 빛”과 “살이 통통히 오른 빛”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석양의 ‘빛’에서 ‘알’이 잠재적으로 지닌 풍성한 생명력을 발견한다. 죽음의 예감 앞에서 죽음과 상통하는 새 생명의 도래를 기대하는 것인데, “뼈가 드러나도록 푸르게 살아내려는”과 “참 가벼운 몸무게의 일상 속에서만/노을로 퍼지는”은 이러한 전이가 가능한 조건이 무엇인지 암시해준다. 그것은 인간적 욕망의 근거를 이루는 살과 피를 덜어내는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던 한 생(生)의 그림자”에 그 몸무게를 자발적으로 덜어내는 고통을 부과하므로 가혹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음의 상황 앞에서 “죽음의 알로 살아내면/부화될 수 있다고 믿”는 생각과, “그 알을 먹고 사는 나날을 꿈”꾸는 일은 육신의 소멸을 각오하고 벌이는 육체적·정신적 모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과 생명이 상충하는 박라연 시의 상상력은, ‘틈새’의 이미지를 통해 그 중층적 의미가 드러난다.
1) 그 바위와 바위 사이의 응달
그러니까, 최소량의 穀氣인 흙과 수분 햇살이
산 자의 육안으로도 좀처럼 짐작되지 않는
저 폐허!
그 틈새서도 수백 년쯤 거뜬히 살아낸
해마다 붉은 기운을 암자 가득히
바다 가득히 물들여내는 동백
그의 거처에서 뿜어져나오는 살아 있음의
생생함을 본 후에도 살고 싶지 않으면
태어나기 이전의 제 세포의
숫자를 헤아려볼 일이다 ―「靈龜庵 육체론 1」 부분
2) 우면산의 나무 한 그루에
돌담을 둥그렇게 쌓는다 제 몸집만
으로는 쉽게 틈이 생길까 두려워
아무나 함부로 넘보지 않게 하려고
산에 오를 때마다
그 나무 옆구리에 돌무덤을 쌓는다
저 집은,
아픈 마음들이
미리 들어가 쉬기도 하는 곳
〔……〕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사는 일이 참혹할 때
저 집이,
한시적인 죽음으로 시간을 끌어주면
죽음의 나체 같던 겨울 나뭇가지에
피가 돌 듯
시커멓게 그을린 마흔 넘은 그림자에도
생피가 흐르기를 바라면서, ―「돌무덤」 부분
“자살하고 싶은 자(者), 영구암(靈龜庵)에 가보라”로 시작되는 1)의 시는, 자살하고 싶은 사람에게 삶의 의욕을 권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인용한 부분에서 화자는 바위와 바위 사이의 응달에 주목한다. 이 ‘틈새’는 “최소량의 곡기(穀氣)인 흙과 수분 햇살”이 있을 뿐인 ‘폐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틈새의 폐허에서 수백 년쯤 거뜬히 살아낸 ‘동백’은 “해마다 붉은 기운을 암자 가득히/바다 가득히 물들여”낸다. 시인은 ‘틈새’에서 뿜어져나오는 “살아 있음의/생생함”을 삶의 의욕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반면 2)에서 화자는 “제 몸집만/으로는 쉽게 틈이 생길까 두려워” “우면산의 나무 한 그루에/돌담을 둥그렇게 쌓는다.” 바위와 바위 틈새의 폐허에서 동백의 생명력을 발견한 시인이, 자기 몸의 틈새가 두려워 나무 옆구리에 돌무덤을 쌓는 모습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나 함부로 넘보지 않게 하려고”라는 구절은, 돌무덤을 쌓는 작업이 보통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고독과 자존의 방식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아픈 마음들이/미리 들어가 쉬기도 하는 곳”은 이 길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암시한다. 이 죽음은 역설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돌무덤이 “한시적인 죽음으로 시간을 끌어주면” “시커멓게 그을린 마흔 넘은 그림자에도/생피가 흐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인은 1)에서 틈새의 폐허에서 동백의 생명력을 발견함으로써 삶의 의욕을 얻는 반면, 2)에서 자기 몸의 틈새를 막음으로써 한시적인 죽음으로 죽음을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박라연이 생명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과 죽음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그의 시에서 전자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수혈’이 등장한다.
枯死木을 베어낸다
죽어가던 한 사람 몸의 일부도 벤다
그 자리에 진달래 눈빛을 수혈한다
진달래 눈빛들이
다 살아내지 못한 채 떠나는 소나무,
와 한 사람의 몸의 일부를
공중 속의 정원
햇살 많이 드는 곳에 심어주겠지
비비새 한 마리
滿開한 산벚꽃나무를 흔들며
꽃상여 되어주자, 되어주자 조른다
지 지 배 배 지 지 배 배
요령 소리를 낸다 ―「공중 속의 내 정원 5」 전문
이 시는 고사목과 죽어가던 사람의 몸을 베고 그 자리에 진달래 눈빛을 수혈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진달래의 눈빛은 생명이 고갈되는 죽음의 자리에 새로운 자연의 생명력을 심어준다. 여기서 진달래 눈빛을 수혈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제목으로 제시된 ‘공중 속의 내 정원’과 3행의 “그 자리에 진달래 눈빛을 수혈한다”로 미루어, 그것은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수혈이 이루어지는 곳, 즉 ‘공중 속의 정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실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형성된 시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공중 속의 내 정원 1」에서 위 인용 시에 이르는 ‘공중 속의 내 정원’ 연작시는 시인이 독창적인 상상력에 의해 형성한 시적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이 ‘공중 속의 정원’에서는 ‘태양의 빛’과 ‘진달래 눈빛’뿐 아니라 ‘동박새’ 등의 자연으로부터의 ‘수혈’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인용 시에 나타난 ‘비비새’를 보라. “만개(滿開)한 산벚꽃나무를 흔들며” “지 지 배 배 지 지 배 배/요령 소리를” 내면서 발랄하고 충만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 시에 나타난 ‘수혈’의 주체는 시인 자신인 듯하지만, 진달래 눈빛과 비비새와 산벚꽃나무 등의 자연이 그 실질적 주체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자연의 주인됨을 더 선명히 보여준다.
오를 수 없는 山이어서
온갖 마음들의 육체가 되기도 하는 山
사람의 무게만 희고 파래져서 돌아갈 뿐
山의 무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질량 보존의 법칙 1」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자연은 산인데, 산의 무게는 변화가 없고 사람의 무게만 희고 파래져서 돌아간다. 사람이 ‘희고 파래진다’는 것은 오염되고 퇴색된 몸과 마음이 원초적 생명력과 순결을 회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무게가 희고 파래진다’라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개입되어 있을 것 같다. 인용 시의 내용을 변주한 듯한 작품인 「아직은 5월」에는 “배냇적 무게만큼 몸의 일부가/희고 파래질 때 일어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배냇적 무게만큼”에 주목하면, 희고 파래진다는 것은 몸무게가 줄어들어 태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인용 시의 3행은 사람들이 태아의 상태로 회귀하면서 몸과 영혼의 불순물이 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몸무게 줄임’ 혹은 ‘태아로의 회귀’는 죽음을 극복하는 두번째 길, 즉 죽음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빚의 무게와 색채가 만져지는 순간
사람의 등으로 잠시 비켜서주시는 神,
적십자병원에 들러
아직 남은 순결한 세포들을 늘리려고
헌혈을 한다 더 이상 사람의
무게를 축내지 않으려고 단식하듯
제 이름을 지운다
상처도 너무 오래되면 빚의 무게가
될 것 같아 함께 지운다 ―「질량 보존의 법칙 4」
‘헌혈’은 ‘수혈’과 상반되는 방식이지만, 죽음을 극복하려는 목적은 동일하다. 시인이 “아직 남은 순결한 세포들을 늘리려고/헌혈을” 하는 것은, “단식하듯/제 이름을 지”우는 것과 같은 작업이 된다. ‘단식’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끊음으로써 더 건강한 생존을 추구하는 일이며, ‘이름 지우기’는 “빚의 무게”와도 같은 ‘상처’를 지워서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는 일이다. 박라연에게 있어 이러한 상황이 육신의 실제적 병고에서 생기는 일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시적으로 이 상황은 자아의 껍질을 벗음으로써 자아 이전의 원초적 존재의 상태, 즉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헌혈’과 ‘단식’과 ‘이름 지우기’로 표현된 이 자기 소거의 모험은, 자연의 주인됨을 수락하는 것과 동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연의 주인됨과 동궤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소거의 모험은 “영면했을 때/내세(內世)이든 내세(來世)이든/그 내부가 더 선명해지는/온전한 뿌리가 되는/종교처럼/누워서/끝에 닿아보고 싶다”(「느티나무」)에서 내면 깊은 공간으로 누움으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청량 누에가 뽑아내는 비단실이 그러하듯/꽃잎을 무수히 떨어낸 과즙이 그러하듯/유지매미의 울음이 그러하듯/그대에게 가는 길에도 속도와 예의(禮儀)가 있으리”(「죽음에 대한 禮儀」)에서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인식하는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소멸시킴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어쩌면 좌절이 예고된 무모한 싸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무모한 싸움이 시다운 시를 낳는다.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오백 날쯤
살아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히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향기가 악취 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내게 하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神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전문
시인은 다시 꿈꿀 수 있다면 나무 속에 살면서 자기 몸의 일부를 썩히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다. 박라연은 “해탈의 곰팡이 피어날 때까지/몸을 썩히는 일”(「메주」)에서도 나타나듯, 자신의 육신을 썩히고 혼을 베어내는 작업을 통해 삶의 향기뿐 아니라 죽음의 악취까지 껴안으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까지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운명에 대한 큰 사랑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시인은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새가 되어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내고 싶다고 말한다. 타인과 이웃의 슬픔을 울어주는 새의 소리는, 개인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슬픔이 자기 연민의 차원을 넘어서 보편적 슬픔으로 승화되는 시적 서정의 비밀을 말해준다. 마지막 구절인 “축복은 신(神)이 내리고/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인정하는 일”은 인간의 주인됨을 포기하고 신의 축복을 기다리는 사유의 전환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다시 꿈꿀 수 있다면”이라는 간절한 소망과 더불어 시인이 처한 비극적 상황을 눈물겹게 드러낸다. 자기 몸의 일부를 썩히고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이러한 작업은, 그 연장선에서 세상의 사물들에 개입하여 그것을 말리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미 시체뿐인 네 몸에서
내 혼을 찾아내리라
내 혼은 이제 오직 나 혼자만의 것
매춘은 아름다운 시작,
날마다 만나게 될 세상의 풍경들을 말리리라
도톰한 입술처럼 말려졌을 때
향불이 되어 스며들리라
나는 쉬 사라지고 너는 너무 넓지만
내 맑은 醉氣로 드넓은 세상
단 한순간만이라도 醉中得道시킬 수 있다면
나의 매춘은 오래오래 유효하리라
내 몫의 고통스런 풍경들을
말리고 말리리라 아무도 없는
하늘 아래서 너무 멀리 떠밀려온
빈 배 위에서 ―「아름다운 시작」 부분
시인은 자기 몸과 혼의 일부를 덜어낸 후에 다시 폐허의 세상 속으로 침투하여 자신의 혼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고통스런 세상의 풍경들을 말리고자 한다. 자기 소멸을 통해 세상의 풍경에 개입하는 이 과정을 시인은 ‘매춘’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풍경들을 말린다는 것은 오염되고 변질된 세계의 육체를 공기 중에 펼쳐두고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헌혈’과 ‘단식’과 ‘이름 지우기’를 통해 자신의 육신과 혼을 덜어낸 자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 된다. 시인은 그것을 “내 맑은 취기(醉氣)로 드넓은 세상/단 한순간만이라도 취중득도(醉中得道)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박라연은 자기 소멸을 통해 세상의 폐허에 개입하여 그 고통스런 시체의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 나타나는 ‘취기’와 ‘취중득도’는 시인의 이러한 시도가 ‘기(氣)’와 ‘도(道)’라는 정신적 혹은 영적 차원의 추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원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1) 너의 아름다운 혼들이
고된, 마른, 검은 마음 속에
한올한올 문신하듯 새겨진다는 거
붉은 꽃잎 떨굴 때 붉은 氣를
초록 잎사귀 떨굴 때 초록의 氣를
그의 혼에 고스란히 넣어주고 영면한다는 거
나의 半도 너와 함께 떠날 거라는 거
나, 잊지 않을게 ―「獻花歌 」 부분
2) 만물의 마음속 악마가
어느 한순간 화들짝 善해질 때
나타나는 초록 가지 사이로
알이 되어 스며들고 싶은 곳 ―「어머니, 靈山」 부분
1)에서 시인은 “너의 아름다운 혼들이” “붉은 꽃잎”을 떨굴 때 “붉은 氣”를, “초록 잎사귀”를 떨굴 때 “초록의 氣”를 “그의 혼에 고스란히 넣어주고 영면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너’와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분명치 않지만, ‘혼’에서 ‘혼’으로 전달되는 ‘기(氣)’의 차원을 박라연이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다른 시에서 ‘육체’와 더불어 ‘혼’에 대해 말할 때 이미 영적·종교적 차원에 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혼’과 ‘기’의 차원은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되지 않고 그 자체로 작품의 표면에 노출될 때 자칫 관념화될 우려도 지닌다. 인용된 1)뿐 아니라, “너 맞지?/도망 나온 氣 맞지?/빨강 풍선의 둥근 몸에서/어제의 부푼 마음에서/뿌리내릴 사이가 못 된다구?/기(氣)란 헤매기 위해 태어나는 거야”(「열정」)나, “누군가를 취하게 할 기(氣)가 되는 일/그 기(氣)를 아낌없이 빌려주는 일”(「그림자」) 등에서도 그러한 위험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더 강하게 나아가면 “창에 서랍에 컴퓨터에 책장에/먼지를 알뜰히 키웠다./〔……〕/세월이 흐르고 흘렀을 때/먼지들은 보랏빛 나비들이 되리라”(「이어도」)에서처럼 과도한 신념과 소망의 상상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에서 박라연은 폐허의 현실을 통과하는 고통과 오래 견딤을 통해 이 정신적·영적 차원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의 제목에 나타난 ‘영산(靈山)’은 이미 “오를 수 없는 산(山)이어서/온갖 마음들의 육체가 되기도 하는 산(山)”(「질량 보존의 법칙 1」)에서 그 모습을 보인 바 있는데, 자칫 관념화되기 쉬운 대상을 ‘어머니’의 이미지와 결부시킴으로써 시적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산’이라는 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홀로된 새끼들이 풀어낸 독을 쓸어주고, 요절한 새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정화와 재생의 공간이다. 따라서 ‘산’은 ‘어머니’의 이미지와 결부될 때 정신적·영적 차원으로 승화되며 ‘영산(靈山)’의 의미 공간으로 떠오를 수 있다. 시인은 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자연의 공간인 초록 가지 사이로 “알이 되어 스며들고 싶”어한다. ‘스며드는 것’은 자신의 육신을 지우며 가라앉는 과정, 즉 죽음의 길이지만, ‘알이 되는 것’은 태아의 상태, 즉 생명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된다. 결국 박라연은 ‘어머니’와도 같은 ‘영적 자연’ 속에 깊이 가라앉음으로써 죽음이 재생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갈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산(靈山)’은 다음의 시에서 “안 보이는 숲”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사람이 한순간
안 보이는 숲이 된다는 것은
오소리 꿩 멧새들의
산매화 산아카시아 산벚꽃의
나는 것과 정지되어 있는 것의
혈액을 동시에 수혈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온몸의 무기질이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암전의 순간,
이슬 한 방울 무지개 되어 머무르는 곳
안 보이는 사람의 숲 ―「안 보이는 숲」 전문
“나는 것과 정지되어 있는 것,” 즉 자연의 순결한 생명력을 수혈받는 것은, “온몸의 무기질이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자기 소실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수혈과 헌혈, 다시 말해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는 길과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길이 동시에 진행되어 하나로 결합됨을 의미한다. 역방향으로 진행되던 이 두 힘이 한자리에서 만나 충돌할 때 불꽃이 일어난다. 따라서 인용 시에 나타난 “암전의 순간”은 다름아닌 ‘불꽃의 순간’이다. 박라연의 시에서 “이슬 한 방울”이 ‘무지개’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적 동인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도/저승을 밀어낼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부디”(「生」)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시인에게 있어, “이슬 한 방울”이 “무지개 되어 머무르는 곳”은 바로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안 보이는 사람의 숲”이다. 따라서 그가 시도하는 영적·종교적 차원은 이 지상의 현실을 벗어난 천상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의 숲”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안 보이는 사람의 숲”을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니라 자아의 무게를 덜어낸 후 얻어지는 멧새들과 산벚꽃의 눈을 통해서 가능해질 것이다. “불임의 입술”과 “한 밭의 폐허”에 엉켜 있는 “비명(非命)의 뿌리들” 속에서 “목마름을 견디”(「한 밭의 후회」)고 있을 박라연 시인이, “안 보이는 사람의 숲”에서 ‘이슬의 무지개’를 거듭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차 례〕
▨ 시인의 말
공중 속의 내 정원 1
靈龜庵 육체론 1
돌무덤
공중 속의 내 정원 2
금오산 낙조
공중 속의 내 정원 3
공중 속의 내 정원 4
공중 속의 내 정원 5
질량 보존의 법칙 1
질량 보존의 법칙 2
질량 보존의 법칙 3
질량 보존의 법칙 4
질량 보존의 법칙 5
질량 보존의 법칙 6
새의 부리
꽃의 穴宮
죽음에 대한 禮儀
느티나무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얼룩말을 위하여
沈香
獻花歌
말린 장미 이야기
玉花
통유리창
만월
어머니, 靈山
生
아직은 5월
안 보이는 숲
굴비
이등변 삼각형
몸 속의 장미와 진달래의 묘지에서
靈龜庵 육체론
아름다운 시작
식물 인간, 혹은
노쇠한 꿈의 노래
동류항
꿈
사슴꽃장미나무 이야기
祭儀
신태인 일몰
도라지꽃 피는 계절
이어도
궁항
메주
한 밭의 후회
돌에도 봄이
열정
그림자
殘日
금시조
봄
예감의 액자 속에, 神을
무등산 호박꽃
지리산
4月, 마른 것들을 잠근다
감은사 가는 길
한 流配家의 정원에서
含月山
花石
▨ 해설·죽음의 산란(産卵)·오형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