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이 책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를 배경으로 씌어진 역사소설이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역사소설로 차라리 말과 소설의 형태에 대한 질문과 성찰에 가깝다. 이 연작소설에서는 한국과 이탈리아가 겹쳐지고, 현재와 과거가 충돌하며, 말과 서술이 뒤엉킨다. 이러한 소설 형태는 『철쭉제』부터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한 작가의 소설적 실험의 연장으로, 이 책에서는 그것이 내용에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살아 움직이는 장르로서의 소설을 새롭게 체험하고 소설에서의 문체 실험의 극한을 만날 수 있다.
[해설]
부서진 액자
-김태환
서정인이 이탈리아 르네상스기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을 썼다(최근 수사 사보나롤라의 순교를 다룬 『말뚝』이 출간되었고, 이 책 『용병대장』은 『말뚝』의 앞부분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지금까지의 서정인의 소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잘 알려진 그의 소설들은 모두─흔히 사람들이 소시민적 일상이라고 부르는─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그래서 서정인이라는 이름을 역사소설의 장르와 결부시킨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그가 한국 역사도 아닌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역사를 소재로 소설을 쓴 것은 큰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서정인의 소설에서는 이전에도 이미 아주 큰 변화가 있었다. 『강』으로 대표되는 서정인의 초기작들은 단편소설 특유의 압축미와 절제미를 갖춘 단편 미학의 진수로 평가되었으나, 80년대의 서정인은 고전적 단편소설의 세계를 버리고 방만하고 난해하면서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라는 장르의 틀에 잘 맞지 않는─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소설집 『철쭉제』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며(소설집 말미에 덧붙여진 해설에서 유종호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달궁』 『봄꽃 가을열매』 등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 시기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살펴본다면, 판소리투의 4?조의 등장, 단선적인 줄거리의 해체, 대화문과 서술문 사이의 구별의 와해, 인물과 말의 비중의 전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특히 마지막 문제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초기 소설에서 말(대화)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달궁』과 같은 소설에서는 인물이란 마치 말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인물이 오직 말을 하는 기능으로서 도입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화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서정인 소설만이 아니라 근대 소설사 전반을 살펴보더라도, 인물과 화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대화문과 서술문 사이의 엄격한 차원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것이 소설 발전의 일반적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서정인은 이러한 소설사적 발전을 개인의 차원에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러한 발전에 있어서 특징적인 현상이 자유 간접 문체 또는 체험 화법인데, 한국 소설가로서는 서정인만큼 이 기법을 의식적이고도 과감하게 소설에 사용한 예가 흔치 않다. 예를 들면 『달궁』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라.
그는 그 동안 흙 파먹고 살란 말이냐. (p. 253)
이것은 사실은 등장인물 윤씨의 말로, “나는 그 동안 흙 파먹고 살란 말이냐”라고 써야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윤씨 자신의 말이 그를 삼인칭으로 지칭하는 화자의 서술문 속으로 뒤섞여들어가 이 같은 혼성적 문장이 생겨난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How did she do?”와 비교할 만하다. 조이스는 “How do you do?”라는 등장인물의 일상적 인사말을 화자의 서술문의 형식으로 만들어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서정인의 전기 소설에서 후기 소설로의 변화에 비교하면, 『용병대장』에서 느껴지는 변모는 그렇게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변화는 소재적인 차원에만 국한될 뿐이고, 『달궁』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서정인 소설 특유의 문체와 기법들이 이번 소설에도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르네상스기라는 서양 역사에 대한 관심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서양 어문학자(영문학)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작가의 나이 또한 관심의 이동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사회·문화·기술의 변화가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일종의 분업 같은 것을 제안했다. 나이든 세대는 새로 생겨나는 것을 흡수하는 데 있어서 젊은 세대를 따라잡을 수 없으나, 지나간 것을 탐구하거나 옛날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분야에서는 비교 우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작가 서정인이 근대 문화의 시원기에 눈을 돌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여겨진다.
『용병대장』에서 서정인이 시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소설적 스타일의 변화라기보다는,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의 일반적 이미지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한국 문학의 콘텍스트 속에서, 역사소설에는 대중적인 장르라는 관념이 따라다니는 것이 사실이다. 『소설 동의보감』 같은 경우는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통속적이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역사소설은 친숙한 서사 문법을 기초로 하고 있어서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역사소설에서 장대한 규모의 이야기, 즉 전통적인 서사를 기대한다. 역사소설은 형식적인 실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인 소재에 관심을 가지는 작가들은 대체로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과 가치 평가를 하고 있고 소설을 통해서 그러한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때 작가들의 관심은 대체로 실험적이거나 기법적인 형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적·내용적 차원에 있다. 형식 실험은 역사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될 뿐이고, 허구가 아닌 실제 역사를 대상으로 형식 실험을 해본다는 것도 작가에게는 부담되는 일일 수도 있다. 서정인은 이러한 역사소설의 장 속에, 뚜렷한 줄거리가 없고 말만 많은 등장인물들로 가득 찬 자기 소설의 스타일을 그대로 가지고 뛰어든다. 이로부터 쉽게 읽혀지지 않는 낯선 역사소설이 생겨났다.
『용병대장』은 형식적 완결성이란 것과는 철저히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기이한 소설이다. 한 가지 문제는 완결편인 『말뚝』이 이 책에 함께 묶이지 않고 출판사까지 달리하여 독자적으로 출간되었다는 점. 『용병대장』에서 적어도 「순교」부터 끝까지는 수사 사보나롤라의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는 사보나롤라의 최후를 다룬 『말뚝』 없이는 책이 중간에서 뚝 끊어지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작품 외적인 사정에서 비롯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어느 정도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태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서정인은 『말뚝』에 부친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수사 이야기의 끝부분이다. 그의 죽음은 이미 예고되었다. 그것은 용병들의 이야기의 뒷부분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것 없이 이것만 읽으면 그만큼 독자의 몫이 커서 더 좋을 듯하다.” 여기서 독자의 몫이라는 표현이 소설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작가에게는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의 앞부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독자가 이야기의 이해를 위해 스스로 구성해야 할 부분이 더 많아지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친절한 설명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읽혀지는 역사소설을 쓰는 것이 서정인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 대목에서도 다시 한번 분명해진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용병대장』의 처음 두 장과 나머지 장들 사이의 관계다. 「불타는 집」과 「대화」는 용병대장 이야기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 부분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모두 현재의 한국으로서, 「불타는 집」은 죽은 친구의 문상을 가는 이야기이고, 「대화」는 어떤 두 남녀 주인공의 전화 통화다. 중심 인물은 두 장에서 모두 ‘그’이지만, 이 두 ‘그’가 동일 인물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 어떤 이유에서 이 두 장이 용병대장 이야기 연작의 서론 격으로 배치된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차라리 이들 작품을 다른 책으로 보내고, 본격적인 용병대장 부분과 「말뚝」을 한 책으로 모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처음에 심지어, 책을 묶는 과정에서 어떤 착오가 개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는데, 그러한 인상은 셋째 장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용병대장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난 뒤 앞부분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다시는 거론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 그래서 뭔가 모자라는 느낌, 작가가 소설을 쓰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할 지점을 잊어버렸다는 느낌이 생겨난다.
첫 두 장과 나머지 장들 사이의 다리 구실을 하는 것이 셋째 장 「용병대장」의 서두 부분이다. 「용병대장」의 첫 문단은 여전히 앞부분과 유사한 분위기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눈이 와서 전화를 했다.” 시간적 배경은 현재다. 공간적 배경은 한국의 어느 식당(송송식당)이다. 여기서도 다시 ‘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 그를 앞에서 나왔던 그와 동일시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첫 문단 마지막 줄에 첫 장의 제목인 ‘불타는 집’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랑이 없으면 불타는 집이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작가가 앞부분과 뒷부분 사이에 연속성을 설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두번째 문단에서 ‘그’는 ‘그녀’와 얘기하다가 용병대장의 이야기를 꺼낸다.
카트로첸토라는 말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태리 말로 사백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서기 일천사백년을 의미했고, 그해부터 시작되는 십오세기를 가리켰다. 서기 십오세기는 거기서 문예가 부흥하던 때였다. 희한하게도, 용병대장들이 희랍 인문학을 되찾고 되살리는 일을 후원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그들이 저지른 못된 짓들을 그렇게 해서나 삭치고자 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썼다. 그런 용병대장들 중에 시지스몬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pp. 46~47)
소설은 이런 식으로 한국에서 이탈리아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간다. 이러한 이행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유 간접 문체이다. 자유 간접 문체를 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 문체의 핵심적인 특징은 무엇보다도 등장인물의 말을 마치 화자의 말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어디까지가 등장인물의 말이고 어디까지가 화자의 말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데 있다. 위의 인용문은 이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했다”라는 구절은 등장인물인 그가 카트로첸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따옴표가 제거되어서 그의 말과 “그가 말했다”는 화자의 말 사이에 외형적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카트로첸토라는 말 있었다”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과거 시제에 주목하라. 여기서 과거 시제는 카트로첸토라는 말이 과거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래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카트로첸토라는 말이 있다. 이태리 말로 사백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서기 일천사백년을 의미하고 그해부터 시작된 15세기를 가리킨다” 등등. 다시 말하면 “카트로첸토란 말 있었다”에서 “가리켰다”에 이르는 문장은, 내용은 현재적인 것인데 시제는 과거형으로 한 데서 어색한 느낌이 생겨난다. 이 현상은 ‘그’가 한 말이 화자의 말 속으로 통합되면서 화자 서술문의 기본 시제인 과거형(“그가 말했다”)을 취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처럼 일탈적으로 사용된 과거 시제는 문제되는 진술이 화자의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라 등장인물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의 인용임을 표시해준다.
여기에 이어지는 문장은 한층 모호하다. “서기 십오세기는 거기서 문예가 부흥하던 때였다.” 이것은 ‘그’의 말인가 아니면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화자의 말인가? 과거 시제는 더 이상 아무런 표지 구실도 하지 못한다. 화자가 말했더라도 이 문장은 과거 시제를 취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외형적으로는 화자 자신이 독자를 향해서 직접 이야기하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맥으로 보았을 때는 카트로첸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그’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즉 용병대장 시지스몬도의 이야기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그가 그녀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시지스몬도 이야기는 다음 문단(셋째 문단)에서 바로 이어지지 않고─이 문단은 첫째 문단의 내용에 연결된다─그 다음 문단에 가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리미니, 파노, 체세나의 영주였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 ‘그’라는 인물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그녀’라는 인물도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는 이제 화자로부터 직접 용병대장 시지스몬도와 그의 집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에서 주인공이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장면(여기서 관객은 과거의 일을 간접적으로 접한다)에서 직접 그 과거의 장면으로(관객이 직접 과거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넘어가는 기법에 비교할 만하다. 서정인은 자유 간접 문체를 통해 이 이행을 잘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예를 들어서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영화에서, 주인공은 버스 정류소 앞 벤치에 앉아서 우연히 옆에 앉는 사람에게 자기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의 과거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그의 과거 이야기를 직접 보게 되고, 그러면서 벤치에서 있었던 대화 상황을 일시적으로 잊어버린다. 그러나 영화는 중간중간에 다시 벤치에 앉아 있는 포레스트 검프와 그의 대화 상대자로 되돌아오며, 이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포레스트 검프에 대한 영화가 실은 그가 벤치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임을 환기시킨다. 당연하게도 영화의 마지막은 벤치 장면에서 끝나고, 바람에 날리는 깃털과 같이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사이에 수미쌍관적 연관을 수립하려는 장치가 사용된다. 그런데 서정인의 소설에는 이러한 기억의 환기 장치가 없으며 어떤 대칭적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그’와 ‘그녀’는 소설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난 뒤 일시적으로 독자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완전히 실종된다. 그들은 「용병대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말뚝」을 포함한 이 소설 전체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은 마치 처음부터 화자가 직접 독자를 향해 카트로첸토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되어버린다.
작가는 처음부터 카트로첸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불타는 집」이나 「대화」 같은 장을 앞에 배치해 이야기를 빙빙 돌리다가는 결국 그와 그녀의 입을 빌려 시작할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이처럼 작가는 처음에 화자와 독자 사이에다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의 차원을 더 도입시키려 했으면서, 뒤에 가서는 이 차원을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구상이 도중에 바뀐 것일까? 그리고는 처음 구상의 흔적을 미처 다 지워버리지 못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이 모순을 단순히 작가가 정신없이 저지른 실수로 치부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현상이 소설 뒤에 가서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제되는 것은 「잔치」와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화가인 안드레아 델 사르토(안드레아 다뇰로)가 친구 야코포 산소비노(야코포 타티)에게 사보나롤라의 순교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르토는 그해에 죽었다. 죽기 전에 그는 로마 약탈 때 로마를 탈출해서 베네치아로 간 피렌체의 조각가, 그의 친구 야코포가 고향에 들렀을 때, 그에게 사보나롤라의 순교 이야기를 전했다.” 이것은 「잔치」 바로 앞의 장 「순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잔치」에서 사르토는 자기가 여덟 살 때 경험했던 어느 잔치─사보나롤라도 이 잔치 자리에 있었다─에 관해 보고하는 것으로 사보나롤라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도 화자는 직접 독자에게 사보나롤라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야기 속 인물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사정은 좀더 복잡하다. 사르토는 당시 나이가 고작 여덟 살이었기 때문에 잔치 자리에서 오고 갔던 얘기를 기억에 따라 보고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훗날, 사르토는 함께 자리에 있었던 밧치오 델라 포르타(바르톨로메오)로부터 당시 상황에 관해 듣게 된다. 그러니까 사르토가 야코포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자기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밧치오가 자기에게 해준 이야기를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되는 셈인데, 이로부터 아주 흥미로운 구조가 생겨난다.
안드레아 다뇰로가 야코포 타티에게 말했다.
“그 잔치가 있었을 때 나는 여덟 살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육 년 전이었다. 나는 그때 스물두 살이었던 바르톨로메오를 따라서 거기에 갔었다. 몇 해 전, 밧치오 델라 포르타가 죽기 전에 나에게 그때 이야기를 자세히 해줬다. 그가 말했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p. 215)
화자가 먼저 사르토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그런데 사르토는 다시 바르톨로메오의 말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인용 부호는 생략되어 있지만 “화창한 봄날이었다”부터는 바르톨로메오가 사르토에게 한 말이다. 좀더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과 마주치게 된다. “지오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너하고 나를 제외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어렸다”(p. 216). 여기서 ‘나’는 밧치오이고 ‘너’는 사르토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르토가 야코포에게 이야기하면서 바르톨로메오를 직접 화법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르토는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바르톨로메오의 시점에 따라서 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사르토가 야코포에게 말했다. “바르톨로메오가 나에게 말했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때 너는 너무 어렸다 등등……
사르토의 말로 열린 큰따옴표가 다시 닫히는 것은 「잔치」의 마지막에서다. 바르톨로메오가 잔치에 관한 이야기를 끝냈을 때 큰따옴표가 닫힌다. 그러니까 「잔치」 전체가 거대한 큰따옴표 안에 묶여 있는 셈이다. 우리는 큰따옴표가 열리고 닫힐 때까지 장장 25쪽 분량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말을 닫는 큰따옴표의 성격이 애매하다. 형식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르토의 말에 걸려야 한다. 사르토가 말을 시작할 때 큰따옴표가 열렸고, 그 후 처음 나타나는 큰따옴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읽으면(그리고 이 지점에서는 이미 많은 독자들이 앞부분의 상황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영락없이 바르톨로메오의 말에 걸리는 것으로 보인다. 「잔치」 마지막 부분을 함께 읽어보자.
사보나롤라는 맨 끝까지 똑바로 앉아 있었고, 이튿날 아침 딴사람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보통 때처럼 일어나, 흐트러지지 않은 발걸음으로 산 마르코를 향해서 갔다. 그의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p. 239)
이것은 잔치에 관해 보고하는 바르톨로메오의 목소리이다. 작가가 「잔치」 시작 부분과의 구조적 대칭 관계를 설정하려 했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내야 했다.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르톨로메오가 그날의 잔치에 관해 내게 해준 얘기라네.”
안드레아 다뇰로가 야코포에게 말했다.
그런데 작가는 마치 원래 대화 상황이 안드레아 다뇰로와 야코포 사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바르톨로메오의 말에다가 바로 큰따옴표를 하고 「잔치」의 장을 종결짓는다. 사르토의 말은 시작 부분에 큰따옴표가 붙었는데 끝나는 데는 큰따옴표가 없고, 바르톨로메오의 말은 처음에는 큰따옴표가 없다가 끝에는 큰따옴표가 붙는다. 이렇게 큰따옴표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은 다음 장 「화형」에 가면 좀더 분명해진다. 이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피코는 피렌체에서 프란치아의 군대가 입성하던 날, 서른한 살 나이로 죽었다.” 바르톨로메오가 계속했다. (p. 240)
여기서 큰따옴표는 바르톨로메오의 말에 직접 걸려 있다. 그런데 이때 “바르톨로메오가 계속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소설이 앞부분과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안드레아 다뇰로가 야코포에게 하는 말이어야 한다. 그러나 큰따옴표를 통해서 소설 담화의 차원을 가늠해볼 때, 그것은 화자의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잔치」 시작 부분에서는 안드레아 다뇰로의 말이 큰따옴표에 묶이고 바르톨로메오의 말이 그 말 속의 이차적 인용으로 들어갔지만, 이제 소설의 형태는 바르톨로메오의 말이 큰따옴표에 들어가면서 안드레아 다뇰로가 아니라 화자가 직접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이다. 사보나롤라 사건에 관한 보고는 처음에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시작됐지만, 이제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된다. 「용병대장」 서두 부분의 ‘그’와 ‘그녀’의 경우처럼 안드레아 다뇰로와 야코포의 대화 상황도 중도에서 실종되어버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 본 것처럼 「화형」의 첫 문단에서는 바르톨로메오의 말이 직접 화법의 형식으로 인용되어, 사보나롤라의 순교 이야기가 바르톨로메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점이 분명했다. 그러나 두번째 문단에서는 자유 간접 문체의 단계를 지나면서 슬그머니 화자 자신이 이야기하는 주체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바르톨로메오〕는 그〔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순교하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먹구름이 끼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롤라모는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p. 240)
바르톨로메오의 회상은 이렇게 화자의 서술문으로 통합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는 화자의 진술이 사보나롤라가 순교하던 날의 바르톨로메오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화자가 바르톨로메오의 말을 이어받아서 사보나롤라의 태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현상이 다시 일어난다. 화자는 바르톨로메오를 잊고, 그의 이야기를 듣던 사르토도 잊고, 그저 사보나롤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열중한다. 우리는 『용병대장』은 물론 『말뚝』의 끝까지 다 가보아도 과거를 회상하는 바르톨로메오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야기의 한 차원이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생략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단순한 이야기가 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서정인이 실수로 앞의 이야기를 빠뜨렸다는 말은 할 수 없게 된다. 서정인 소설의 비대칭적 구조는 구상의 변경에 따른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철저하게 의식적인 전략 구사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서정인의 전략을 간접화와 직접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겠다. 간접화란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의 틀 속에 집어넣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화자가 아니라 화자가 소개한 ‘그’라는 인물이 그녀에게 용병대장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이 간접화이다. 간접화의 결과로 액자 형태의 소설이 생겨난다. 직접화는 간접화의 부정, 즉 액자의 파괴이다. 「포레스트 검프」의 벤치에서 시작해서 이 벤치로 되돌아오지 않는 것, 이 벤치의 존재를 아예 부정해버리는 것, 그것이 직접화이다. 작가는 처음에 소설을 ‘그’와 ‘그녀’의 대화, 사르토와 야코포의 대화, 바르톨로메오와 사르토의 대화를 통해 삼중으로 간접화시켰다. 이 소설에서 사보나롤라의 순교는, 바르톨로메오의 이야기를 사르토가 듣고, 사르토의 이야기를 야코포가 듣고, 그것을 그가 듣고, 그의 이야기를 그녀가 듣고, 그것이 소설의 화자에 의해 이야기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다시 직접화를 통해서 이러한 이야기의 전달 경로를 부정해버린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모든 것을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이 보이는 화자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독자뿐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 왜 서정인은 이처럼 따옴표 사용의 기본 규칙조차 무시한 채 앞뒤도 맞지 않는 역사소설을 쓴 것일까? 이야기를 잔뜩 간접화시켜놓고는 뒤에 가서 이를 전부 부정해버릴 요량이면, 처음부터 화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으로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서정인의 간접화-직접화 전략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작가는 이러한 전략을 통해 과거사가 역사적으로 전승되는 과정을 재현하려 한 것이라고. 역사가가 역사를 서술할 때, 그의 관점과 판단은 알게 모르게 선대의 서술과 사료에 매개되어 있다. 역사가는 역사를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전승된 지식에 근거해서 서술하지만, 역사 서술에서는 이러한 간접성의 부정, 즉 직접화가 일어난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그에 관한 지식이 역사가에게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에 존재하는 까마득한 전달의 고리는 역사 서술에 결코 그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역사적 지식은 역사가 자신의 지식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직접화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역사소설이다. 많은 역사소설에서 화자는 그 무엇에도 매개되지 않은 확실한 지식을 갖춘 전지적 주체로 등장하며, 역사서에서 볼 수 있는 각주나 인용조차 제거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지식의 간접성이 철저히 은폐되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나 직접화는 우리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모차르트라는 음악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구를 통해서, 또는 무엇을 통해서 모차르트를 처음 알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나를 더 이상 상상할 수가 없다. 모차르트라는 존재에 대한 나의 지식은 직접적인 것으로 된다. 서정인은 간접화-직접화 전략을 구사하여 흔치 않은 기이한 소설 구조를 창조해냈는데(나는 앞 따옴표와 뒤 따옴표가 서로 다른 인물의 말에 걸린 그런 소설을 지금까지 읽은 적이 없다), 이 구조는 역사적 지식의 매개적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매개적 성격이 은폐되고 부정되는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거기서 나온 것은 단순히 직접성을 지향하는 전통적 역사소설에 대항하는 일종의 반-역사소설이다.
작가의 말
‘용병대장’ 하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악명 높은 프랑스의 외인 부대나 주로 아프리카에서 용맹을 떨친 벨기에나 네덜란드의 전쟁, 또는 살인 청부업자들이 하나고, 십오륙세기 이탈리아에서 돈을 주면 아무한테나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움질을 해주었던 군인들이 다른 하나이다. 이탈리아의 용병들은 그래도 나라를 지킨다는 작은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스위스의 용병들은, 특히 외국에서 용역을 맡았을 때는, 철저한 직업 군인들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전통으로 지금도 바티카노의 경비는 스위스 병정들이 의전적으로 맡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대를 셋으로 나눴다. 민병, 용병, 원병 중에서, 나라를 지키는 데에는 막강한 외국 병대가 품을 파는 용병만 못했고, 용병이 백성들로 된 의용군만 못했다. 민병이 가장 좋지만, 나는 그것도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두보의 시가 아니더라도, 누가 고향에서 농사짓고 평화롭게 사는 것보다 수자리에서 백골로 썩는 것을 선호하랴. 우리나라에는 의병은 있었어도 용병의 전통은 없는 듯하다. 행주치마 주부 부대나 목탁 대신 칼을 든 승병이나 붓을 꺾고 창을 꼬나쥔 유림은 돈보다 의를 더 좋아했음이 분명하다. 전쟁이 이미 어리석음과 탐욕의 극친데, 약삭빠르게 실리를 취하는 것이 딴은 현명하지 않으랴.
이탈리아의 옛날 용병들은 솔직했다. 그들은 그들이 정치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돈벌기가 어렵다는 것과 전쟁이 이문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현대의 용병인 외인 부대보다 덜 시대 착오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시대가 오늘날보다 더 상업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살상 기술이 오늘날보다 덜 발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무술은 오늘날의 것에 비하면 거의 유희에 가깝고, 무예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세상이야 예나 지금이나 어차피 장삿속이다. 그때라고 특히 사람들이 욕심에 눈이 멀었을 리 없고, 오늘날이라고 사람들의 탐진치 (貪瞋痴)가 조금이라도 줄었을 리 없다. 국가 유도탄 방어와 같은 고도로 정밀한 과학 기술의 결정은 그것 또한 심오한 예술의 경지가 아니랴.
그 동안 여기저기 발표한 중, 단편들을 모아서 엮은 이 책이 한 권의 통일된 작품으로 읽혀지기를 나는 희망한다. 거기에는 용병들, 성주들, 수사들, 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것들은 서로 계속성과 인접성이 있어서 같이 읽히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처음 한두 편들은 요즘 이야기여서 나머지 옛날 이야기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같이 읽히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나는 처음 이런 책이 나오게 되면, 제목을 ‘불타는 집’으로 하고 싶었다. 앞엣것들이 정 외톨을 고집하면, 그것들을 서문 정도로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땅 이름이나 사람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의 표기에는 필자는 물론 편집진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한 물건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으면, 그것도 문학적 장치라고 여겨주시기 바란다. 이 책을 내주신 문학과지성사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2000년 7월
서정인
1. 불타는 집
2. 대화
3. 용병대장
4. 사팔뜨기
갈레오토|마테오|니콜로
5. 절름발이
수녀원|스포릇자|저녁 기도|피치니노
6. 거푸집
검둥이|교황의 아들|근친 상간|대성당의 살인|성 안젤로 성|라발디노|마키아벨리|검은 띠|똥
7. 순교
두 화가들|밑 빠진 독|가짜
8. 잔치
일천사백구십사년|도착|잔치|소금
9. 화형
선택|정의|파문|성자|공포|완성
10. 시련
엘리|손님|숯불|본당|환대|개판|재판
해설·부서진 액자/김태환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