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이 책은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치수의 새로운 문학 평론집으로서, 그의 평론집『공감의 비평을 위하여』 이후 9년 만에 내놓는 것이다.
제1부에서는 해방 50년의 한국 소설을 그의 폭넓은 시선으로 아우르면서 21세기의 새로운 영상 시대에 문학이 살아남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제2부에서는 홍성원·김원일·이청준·박완서·김주영·박경리·오정희·박상륭·강호무·박범신·이문열·최명희·이원규 등의 소설 작품에 대한 작품론이, 제3부에서는 이인성·채영주·김소진·최윤·신경숙·서하진·김운하·김영하·이재실 등의 작품에 대한 작품론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
2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분야가 문학을 중심으로 한 미래의 문자 문화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확대로부터 시작되어 인터넷의 보편화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디지털 문명의 위력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세대 사이에 달라지고 있는 생활 방식의 차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심화되고 있는 빈부의 격차, 제조업의 생산을 근간으로 하지 않는 정보 산업의 약진, 기업의 벤처화로 인한 직장 개념의 변화 등은 반성을 기본적 덕목으로 가지고 있는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그 위기는 변화에 쉽게 대응하지 못하는 인문학 본래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도 있지만, 변화에 대응하기보다는 변화하지 않고자 하는 인문학자의 태도에서 유래하는 것이 더욱 많다.
문학은 비교적 그러한 변화에 유연성을 지닌 분야다. 독자의 절대적인 힘의 작용을 받고 있는 문학은 이미 한 세대 전에 ‘저자의 죽음’을 논할 정도로 변화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문학의 위기를 거론하는 것은 인터넷의 일반화가 문자 문화를 이용하지 않게 만들고 모든 평가 기준에서 속도가 우선 순위를 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쏟아지고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반성적인 문자 문화를 외면하기 시작한 오늘의 독자들은, 천재들이 쓴 걸작의 독자로만 남아 있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함으로써 글의 특권화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통신 문학의 등장은 익명 혹은 무명의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최근에 이루어진 한국 소설의 변화는 그러한 문학적 환경의 변화를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문학 형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이야기로서의 문학의 본질을 돌려놓을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와 비디오가 보편화됨에 따라 이야기로서의 문학의 역할이 끝날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또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대중화는 신문의 존재를 위협할 것으로 예언한 거짓 미래학자들이 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종이가 필요 없는 시대가 올 것으로 예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예언은 문자 미디어와 영상 미디어의 역할과 기능의 차이를 간과한 데서 일어난 착각일 수 있다. 그러한 예언자들은 이 세상에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것만 필요하지, 문학이나 인문학과 같은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것의 존재가 무용하고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로 인해서 오늘날 대학에서의 문학 교육이나 인문 교육이 필요 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자연을 파괴하고 생태학적 질서를 깨트리는 기술 교육만이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만을 발전의 척도로 생각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보편화되어도 신문이 건재한 사실, 영화와 비디오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멀티미디어의 발달이 문학의 죽음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입증하고 있다.
프랑스의 누보 로망이 1950년대에 이미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종말이나, 영웅으로서의 주인공의 죽음이나, 구성으로서의 소설 구조의 붕괴를 주장한 것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과 죽음과 붕괴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존재해온 그 모든 것의 양상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작중인물,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구성을 생각하지 않는 소설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소설이란 우리 일상적 삶과 관련된 하찮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하찮은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여러 번 살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삶도 이해하게 하는 데 있다. 그것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꿈을 갖게 하고 남과 함께 사는 삶의 보람을 생각하게 하며 각자에게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발견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문학이 많이 읽히고 있는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는 사회이고 살 만한 사회임에 분명하다.
『공감의 비평을 위하여』 이후 9년 만에 평론집을 내면서 그 동안 우리의 소설 가운데 어떤 작품이 우리 소설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 가운데 주류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게으름 때문에 그것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한 작품도 많고 거기에 속할 수 없는 작품이지만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다룬 작품도 있다. 매일 한 권의 시집이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행복을 누리면서도 그 결과를 글로 쓰는 것은 대학이라는 제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특히 글을 빨리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힘든 일이다. 앞으로 써야 할 목록만 작성해놓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더 주어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 동안 써놓았던 소설에 관한 글만을 모으면서 한국 소설의 풍요로움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작품을 읽는 도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작가의 치열하고 처절한 정신과 부딪칠 때마다 느끼는 감동과 전율은 때로는 외경심으로 밤을 새우게 했고 때로는 문학을 공부한 행복감에 도취하게 했다. 그 감동과 행복에 비하면 여기 모아놓은 글들은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책이 한국 소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2000년 6월, 이화동산의 연구실에서
[차례]
제1부
해방 50년의 한국 소설
예술의 자율성과 현실 참여
문학과 인문학의 새로운 조건
제2부
남성 문학의 세계 ―홍성원의 소설
개인과 역사 1 ―홍성원의 『먼동』
개인과 역사 2 ―김원일의 『늘푸른소나무』
한의 삶과 삶의 한 ―이청준의 『서편제』
깊고 통렬한 삶의 진실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
사실주의로부터 환상적 사실주의로 ―김주영의 『홍어』
‘시장’과 ‘전장’의 절묘한 대비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외출과 귀환의 변증법 ―오정희의 소설
성장소설 혹은 꿈꾸면서 살아가기 ―오정희의 『새』
구도자의 세계 ―박상륭의 소설
감춤과 드러냄 ―강호무의 소설
부랑의 세계 혹은 깨달음의 길 ―박범신의 『흰 소가 끄는 수레』
분단 현실과 아버지 콤플렉스 ―이문열의 『변경』
두 개의 ‘혼불’ ―최명희의 『혼불』
역사의 몸살, 소설의 무게 ―이원규의 『천사의 날개』
제3부
두 개의 욕망 ―이인성의 『강 어귀에 섬 하나』
아버지 부재 속에서 살기 ―채영주의 『목마들의 언덕』과 김소진의 『고아떤 뺑덕어멈』
소설의 반성, 반성의 문체 ―최윤의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슬픔의 현상학, 혹은 잃어버린 시간 찾기 ―신경숙의 소설
여성주의자를 만드는 것 ―서하진의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저항과 순응 ―김운하의 『언더그라운더』
새로운 감각, 새로운 감수성 ―김영하의 소설
순환하는 입문 의식 ―이재실의 『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