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문학과사회』 통권 50호를 기념하여,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작품집. 현재 문단의 가장 젊은 층에 속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나게 된다.
[기획의 말]
『문학과사회』가 통권 50호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50권의 책들이 ‘문학과사회’라는 이름을 달고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해온 이 세상을 항해해온 것이다. 그 ‘50’이라는 숫자 앞에서 우리는 새삼 숙연한 감상에 젖는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마땅히 우리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점검하면서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에 잠긴다.
문학 잡지가 담당해야 할 일차적인 역할은 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연결시켜주고, 문학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문학 안팎의 다양한 현상들의 의미를 규명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활동하고 있는 문학 인력의 활동 무대를 제공해주는 일 못지않게 문학 생산의 유능한 인력을 새롭게 발굴해내고, 그들의 문학이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일 또한 문학 잡지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우리는 통권 50호의 자리에 선 『문학과사회』의 현 위치를 점검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지금까지 『문학과사회』를 통해 데뷔했거나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소설집을 낸 작가들의 신작 소설들을 한자리에 모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참고로, 그 동안 『문학과사회』를 통해 데뷔한 작가들로는 최윤(1988년 여름), 채영주(1988년 겨울), 주인석(1990년 여름), 심석구(1993년 여름), 박성원(1994년 가을), 김환(1995년 봄), 백민석(1995년 여름), 박청호(1996년 봄), 김연경(1996년 여름), 박무상(1997년 가을), 최대환(1997년 겨울), 김미미(1998년 봄), 김현주(1998년 여름), 윤형진(1998년 겨울), 류가미(1999년 봄)가 있다.
이 자리에 모인 작가들은 그 중에서도 1960년 이후에 출생한 작가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1960년 이후에 출생한 작가들의 신작을 한자리에 모아본 것은 현재 문단의 가장 젊은 층에 속하는 작가들을 통해서 우리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가늠해보는 계기를 마련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였다. 지난 1990년대에 ‘소설의 시대’가 한창 펼쳐지고 있을 때 이미 소설은 멀티미디어 환경이라는 새로운 사회·문화적 지평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소설의 융성 국면이 지속되고 있지만, ‘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소설 또한 그 ‘위기’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젊은 작가들의 열정이 우리 소설의 밝은 미래를 열어감은 물론, 나아가서 ‘문학의 위기’를 타개해가는 선봉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 자리에 모인 작가들 가운데는 이미 한국 문단의 중요한 자리에 올라선 작가들도 있고 이제 막 풋풋한 날갯짓을 펼치기 시작한 작가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문학에 대한 열정과 빛나는 상상력의 지느러미로 스스로를 발전(發電)시키며, 이 세계라는 바닷속으로 더욱 활기 있게 헤엄쳐나가기를 바란다. 그들이 윤기 있는 비늘을 빛내며 한국 문학의 미래를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변함없는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2000년 6월,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
[해설]
새로움의 진정한 의미
―젊은 작가들의 소설 세계
성민엽
이 책은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거나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작품집을 낸 1960년 이후 출생의 작가들 중 13명이 쓴 신작 단편소설을 싣고 있다. 이들 13명 가운데서 강동수와 박성원의 등단이 1994년으로 가장 빠르다. 그러니 이 책에 실린 소설 13편을 통해 우리는 1990년대 중·후반에 등단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그것은 문지 스타일의 세계일 뿐 일반적 의미에서의 젊은 작가들의 세계가 아니라는 항변이 있을 수 있겠다. 문지 스타일이라!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설사 존재하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일반적 의미에서의 젊은 작가들의 세계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일까. 그런 식의 파악이 얼마나 유용할는지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이지만, 아무튼 이 책에 실린 소설 13편을 읽다 보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절로 어느 정도 시사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젊은 작가들의 소설 세계’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1984년에 김현은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를 펴내면서 그 서문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젊음의 의미를 “굳어 있는 관념이 없다”는 말로 풀이한 바 있다. 그 말은 곧 이어 “나는 이런 시인이다, 라는 외침이 없다”는 표현으로 바뀐다. 다시 그 표현은, 젊은 시인들은 자기가 수용할 수 있는 것만을 수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수용한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김현은 논의를 자신의 관심사인 욕망의 문제로 이끌고 간다. 그에 따르면 젊은 시인들이 수용하는 ‘모든 것’은 “자기 내부의 욕망과 그 욕망에 감염된 모든 것”이고,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수용하기 때문에 젊은 시인들의 시는 삶의 전체성의 구현에 가장 가까워진다. 김현의 ‘욕망’론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다 수용하기 때문에 삶의 전체성의 구현에 가장 가까워진다는 ‘젊음’론은 음미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김현은 시인을 두고 말했지만 어디 시인만이 그러하겠는가. 소설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은 작가들은 바로 그 젊음을 통해 기존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 너머의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인 미지의 것들을 영토화하며, 그 영토화를 통해 삶의 전체성(그것은 항상 변화해가는 전체성이다)에 접근해간다. 새로움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경계 허물기와 새로운 영토화에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의미의 젊음과 새로움은 항상 활동하는 법이고, 그 활동이 활발할수록 그 시대는 창조적인 시대가 되는 법이다. 기성 질서의 입장에서 그 활동을 억압하거나 길들이려 한다면 이는 반(反)문화적·반(反)문학적 행태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활동의 역사적 필연성 여부를 묻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조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활동을 이해하고 그것과 생산적으로 대화하는 일이 먼저 요청된다. 대화를 통해 나 자신이 변화될 때 그 활동의 역사적 필연성 여부와 내용이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보일 것이다.
이 책에 실린 13편의 소설은 주제상으로나 형식상으로나 저마다 나름대로의 강한 독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 개성은 “나는 이런 작가다”라는 주장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그들 각자가 삶의 전체성을 향해 나아가는 벡터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이해되어야 한다. 그 벡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속의 것이고, 그 변화는 예측 불허의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전제하고 그 벡터들의 현재의 지형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렇게 보면 한쪽 끝에 류가미의 「고래야 고래야」가 있고, 다른 한쪽 끝에 김환의 「나는 늘 술래였네」가 있다.
류가미의 「고래야 고래야」는 형태상으로 우화소설이라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하늘에서 찾아온 고래의 등에 앉아 바다 한복판으로 날아가 지구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는 이야기의 뼈대는 거의 동화에 가깝다. 그러나 그 뼈대에 붙는 살들이 이 작품을 동화 이상으로 만들어준다. 여기서 고래는 시간 바깥에 있으면서 시간의 순조로운 진행을 돕는 존재이고, 1인칭 화자는 시간 속에서 희망을 잃고 소모적 일상을 살아가는 서른 살을 훌쩍 넘긴 여자이다. 여자와 고래 사이의 대화는, 여자가 본래 고래였으며 지구로 내려와 여자가 되었는데, 지구로 내려온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이 이야기에는 전래의 설화에서부터 과학소설, 영화에 이르는 여러 다른 장르들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가령, 속세로 떨어진 천상의 존재가 본래의 자신을 알지 못하고 속세의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설화에서 흔히 보이는 이야기이다. 진리를 알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고래는 과학소설 『지구 유년기 끝날 때』의 오버로드를 연상시킨다. 고래의 이름 플리버는 영화의 주인공 돌고래 이름이다. 영원한 존재가 스스로 원하여 지상으로 내려와 유한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런 다른 장르들로부터의 차용은 이 소설의 의미망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고래야 고래야」는 희망에 관한 소설이다. 지상의 존재인 1인칭 화자는 서른이 되고 나서 희망을 버렸다.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희망은 반드시 절망을 부를 뿐이니, 차라리 희망을 버림으로써 절망도 겪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없는 소모적 일상이야말로 더 큰 절망인 것이다. 지구로 내려가 인간이 된 친구 고래의 이야기는 그 절망의 삶의 의미를 완벽하게 반대로 뒤집는다. “보편적인 진실, 영원한 진리, 무한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불명확한 진실, 모호한 진리, 제한된 사랑”(p. 369)을 체험하기 위해 그는 지구로 내려가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구에 도착한 순간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기억이 있다면 지상의 삶이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겠지만 기억이 없으므로 지상의 삶은 단지 절망의 삶일 뿐이다. 1인칭 화자는 기억 대신 상상을 한다. 시간 바깥에 머물렀던 시절에 대한 상상. 그 상상이 지상의 삶을 다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럴듯함(혹은 현실다움)이라는 리얼리즘 미학 원칙에 입각해서 본다면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환상이겠는데, 이 환상은 작가와 독자에 대해 1인칭 화자의 상상과 같은 작용을 한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바로 그 작용이 문학의 작용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김운하의 「아틀란티스의 주사위」는 「고래야 고래야」와는 판이하면서도 유사한 점이 있다. 이 소설 또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상정하고 있고, 그 세계와 이 세계의 관계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른 세계는 아틀란티스 세계이다(그곳 사람들은 그 세계를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아틀란티스는 플라톤에 기대어 화자가 부르는 이름이다). 그 세계는 인과율이 부재하며 전적으로 우연성에 지배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무질서하고 혼돈된 우연적인 세계이다. 예술, 축제, 게임(특히 주사위 놀이. 주사위 놀이는 우연의 긍정이다)이 그곳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이다. 스콧의 남극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화자 로렌스 오츠는 남극점으로부터의 귀환 도중 이 아틀란티스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는 차츰 그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 세계에 동화되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세계의 인간들이 얼마나 조화로운 질서cosmos라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았는지를 새삼 떠올리게 되”고, “연속성과 지속에 대한 편집적인 집착도 얼마나 가공할 폭력이었는지를 생각”(p. 316)하게 된다. 요컨대 아틀란티스 세계는 지상 세계의 ‘진정한 이면’인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삶의 형식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우연의 법칙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상의 세계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아틀란티스인도 아니고 지상인도 아닌, 그저 방랑객일 따름이다.
주목할 것은 이 소설이 격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렌스 오츠를 화자로 하는 이야기가 다시 간접 화자인 ‘나’(‘나’는 로렌스 오츠로 자처하는 사람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에 의해 재진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 형식은, 환상을 그 자체로 제시하는 「고래야 고래야」와는 달리 그럴듯함의 원칙과 일정하게 타협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 타협이 이 소설의 의미망을 중층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로렌스 오츠라고 자처한 사람 역시 간접적인 화자에 불과할지 모르는 것이며, 어쩌면 무수한 간접 화자들이 있을 뿐 이야기의 기원은 부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는 기원이 부재하는 이야기의 무한한 분산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분산 속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이야기라는 것이 그 태생부터 이미 이 세계의 확고한 질서를 해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김설의 「텔레비」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지배되고 관리되는 사회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격렬한 풍자이다. 텔레비를 ‘Tele-Bee’로 표기하는 말장난을 통해 텔레비가 발산하는 전자파와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 내용은 벌떼의 공격성으로 형상화된다. 주인공 금오는 텔레비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텔레비가 보여주는 세상을 자신의 기본 시스템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금오의 현실은 텔레비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세상과 같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시시한 직업과 시시한 학벌, 촌스런 외모와 촌스런 태도, 흐릿한 시력과 흐릿한 목소리, 빈약한 체구와 빈약한 좆”(p. 176)이 금오의 현실이다(그런 그에게 태양이라는 뜻의 金烏―“파라오가 아닌 금오”라는 구절을 보면 金烏임이 분명하다―를 이름으로 붙인 의도는 물론 아이러니이다). 이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 이 소설의 기본적인 갈등 구조인데, 실제로는 이상이 거짓이고 현실이 진실이지만 금오에게는 사정이 정반대여서 이상이 진실이고 현실이 거짓이다. 그 전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 그 전도를 강제하는 것은 텔레비이다. 그러니 텔레비와 함께하는 한 그 대립의 귀결은 텔레비 속으로의 함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렇게 금오는 텔레비를 따라 푸르른 물 속으로 사라져갔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소설의 풍자는 대단히 격렬하다. 그 격렬성이 내적 정합성의 형성을 방해한다.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정합적이지 못하니 전체적으로 허구 안에서의 그럴듯함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다(「고래야 고래야」나 「아틀란티스의 주사위」는 그 이야기의 환상성에도 불구하고 허구 안에서의 그럴듯함은 이루고 있다). 그러나 부분들 각각에서는 통렬한 풍자적 언어들이 급박한 리듬을 타고 생동한다. “피로가 허리를 바닥에 붙여놓으면 벌떼들이 금오의 머리통에 독침을 쏜다. 머리통이 부풀어오른다. 터질 것 같은 머리”(p. 182)라든지 “뼈에 스민 벌침의 독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떠돌 것이다, 금오는”(p. 192) 같은 대목을 보라. 무엇이 작가를 이토록 격하게 만든 것일까. 김설의 격한 리듬에 나 자신을 동조시키기가 쉽지 않다.
최대환의 「샤워하다 뒤돌아보면」도 일종의 우화소설인데, 그 우언의 의미가 모호하다. 작가는 첫머리에 자크 프레베르의 유명한 시구를 인용해놓았다. “당신은 안다/이제 다시는 저 새들처럼/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날아다닐 수 없음을”(p. 215). 벤치에 앉아 있는 절망, 그것은 늙음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 시구를 인용한 것은 늙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음을 겨냥한 것이다. 작중화자는 돌이킬 수 없음을 두 번 겪는다. 한번은 “왜 나는 샤워를 할 때 뒤를 돌아보지 않는가”(p. 216) 하는 의문이 떠오른 것. “이미 떠올라버린 그 생각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p. 217). ‘나’는 그뒤로 그 의문에 거의 병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두번째는 결국 샤워하다 뒤를 돌아보아버린 것. 욕실 모퉁이에 펭귄 한 마리가 눈을 깜빡이며 서 있는 모습을 보아버린 것이다. 그뒤로 ‘나’는 펭귄과 함께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첫번째 돌이킬 수 없음의 체험 이전에 ‘나’의 삶은 일상의 행복을 충분히 향유하는 그런 삶이었다. 샤워 후 소파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TV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그런 삶이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두번째 체험 이후로 ‘나’는 정상적인 인간 관계, 특히 여자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된다.
뒤돌아보기는 성경과 신화를 통해 이미 익숙한 모티프이다. 소돔에서의 뒤돌아보기와 오르페우스의 뒤돌아보기는 모두 상실을 초래한다. 생명의 상실과 사랑의 상실이다. 이 소설에서의 뒤돌아보기는 타인과의 관계의 상실을 초래한다. 그러나 상실과 더불어 획득도 있다. 펭귄이 획득되는 것이다. 펭귄은 무엇인가. 산발한 귀신도 아니고 사랑스런 여자도 아니고 왜 하필 펭귄인가. 펭귄은 ‘나’의 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자아, 혹은 무의식이 아닐까. 뒤돌아보아 펭귄을 발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자아, 혹은 무의식과의 대면이 아닐까. ‘나’가 욕실을 병적일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나’의 또 다른 자아, 혹은 무의식이 펭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가. 펭귄이 또 다른 자아라면 그것과의 대면은 일상의 거짓 행복을 벗어나 진실을 만나는 일이 되겠고, 무의식이라면 그 대면은 분열증의 발병이 될 것이다. 말미에서 화자가 뒤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문자 그대로 경고로 들리기도 하고 반어로 들리기도 하는 것은 그 이중성 때문이다.
박성원의 「이상한 가역 반응」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일어나는 일종의 착란을 그리고 있다. 일단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보자. ‘나’는 노상 강도를 당해 뒤통수를 둔기로 맞고 쓰러진다. 뒤통수에서 뜨듯한 피가 왈칵거리며 뿜어져나온다. 지나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적지인 H병원으로 옮겨진다. ‘나’는 원래 H병원 닥터 H의 실험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뒤통수의 상처를 치료받고 ‘나’는 실험에 임한다. 함께 실험에 참가한 다른 두 사람(H라는 여인과 H라는 사내)과 어둠 속에서 대화를 한다. 그 두 사람은 도중에 실험을 포기했고 ‘나’는 계속 실험에 임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의사가 실험을 포기한다. 그런데 의사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은 ‘나’ 혼자라고 한다. 의아해하는 ‘나’는 뒤통수를 만져보지만 상처 자국도 없고 그저 맨살이다. 귀가하여 아내에게 말을 걸지만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때 뒤통수에서 따뜻한 피가 흘러내린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좀 길지만 인용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모든 게 헷갈렸다. 닥터 H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H라는 여인과 H라는 사내가 원래 없었는지…… 실험실로 가던 날 아침에 강도를 당해 내 머리가 터졌는지 아니면 지금 어디엔가 부딪혀 상처가 났는지…… 내가 냉장고 문을 지금 열었는지, 아니면 조금 전에도 열었는지…… 내가 실험실에 어제 갔다가 오늘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오늘 갔다가 어제 돌아온 것인지…… 어쩌면…… 실험을 끝내고 분명 집으로 왔는지, 아니면 아직도 실험실에 눌러앉아 상상만 하고 있어, 이 모든 것이 아직 상상 속인지…… 그것도 아니면 애당초 나라는 인간이 있었는지…… 아니면 나는 없고 속성만 있는지…… 나는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p. 42)
합리적 질서를 기준으로 본다면 앞에서 작중화자에 의해 진술된 이야기에는 참말과 거짓말이, 그리고 사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는 것이 된다. 그 구별은 모호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합리성을 기준으로 우리는 몇 가지 일관된 설명을 시도해볼 수 있다. 다만 어느 설명이 진실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머리가 터져 피가 났다―상처 자국도 없는 맨살이었다―다시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라는 전개에 주목하여보면 이 전개는 영화 「식스 센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영화 「식스 센스」는 사후의 영혼(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의 시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결국 자신은 이미 죽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장자의 호접지몽의 서양판인 셈이다. 이 소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가 ‘나’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식스 센스」처럼 읽힐 여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것도 몇 가지 가능한 일관된 설명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소설은 가능한 설명들을 모두 모호성 속에 녹아 있는 상태로 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그 모호성이 대결을 벌이는 상대는 합리성이다. 여기서 합리성은 흐물흐물해져서 온갖 이질적인 것들과 구별 없이 뒤섞이고 결국 혼돈을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어버린다. 이 소설은 우리 삶의 진실이란 혼돈이 아닌가 하고 묻고 있다.
윤형진의 「무서운 얼굴」은 감시라는 푸코적 주제를 다룬 우화 소설이다. 주인공 박은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주거지 밖으로 나와 생활해야 한다는 법을 어겨 유치장에서 사흘을 보낸다. 누군가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박은 날마다 오전 10시가 되면 대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한 시간을 보낸다. 감시당하고 있음은 아는데 누가 감시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전형적인 원형 감옥이다. 감시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박의 욕구는 원형 감옥의 구조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그 욕구는 충족되지 못하고 강박관념으로 바뀐다. 여기서 감시는 ‘무서운 얼굴’이라는 구체적 형상을 띠게 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모든 얼굴들이 반죽처럼 짓이겨져 섞이는가 싶더니 눈·코·입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은 달걀귀신 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평평한 그 얼굴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 아니 입이 있어야 하는 자리의 살가죽이 실룩거리는 것을 보며 박은 그것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pp. 347∼48)
실제 감시자를 찾아내면 그 무서운 얼굴은 사라질 것이다. 박은 감시자 찾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다가 결국 추운 겨울날 밤에 얼어죽는다.
박의 저항은 원형 감옥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저항의 의미를 변질시킨다. 하루 한 시간 이상 주거지 밖으로 나와 생활해야 한다는 법의 부조리함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의 죽음을 계기로 그 법은 무효화되지만 실제로 박의 저항의 의미는 누구에게도 이해되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셈이다. 법안 제정의 취지가 된, 타인에 대한 직접 경험을 중시하는 발상 자체나, 혹은 사람들이 박의 죽음에 부여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 자체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감시의 문제이다. 아무리 정당한 명분이라 하더라도 원형 감옥의 구조 안에서는 감시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원형 감옥의 감시를 다른 어떤 명분에도 앞서는 근원적인 문제로서 제시하고 있다(같은 경험을 한 청년은 그렇게 되지 않는데, 문학을 하는 박만이 무서운 얼굴의 강박에 빠진다. 문학이야말로 그 사회의 통증을 가장 잘 느끼는 신경인 것이다).
박청호의 「몸의 사랑」은 위태롭게 느껴진다. 그의 몸 개념이 나로서는 아무래도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하다고 말하기에 앞서 그의 이야기에 찬찬히 귀기울여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몸 이야기를 빼고 보면, 헤어졌던 옛 애인의 뜻밖의 전화를 받고 그녀와 함께 지내던 시절을 회상하고 그녀와의 새로운 시간을 예감하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특이하다면 옛 애인의 용건이 묵은 빚을 갚으라는 건조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와의 새로운 시간에 대한 예감 역시 담담한 것이라는 점 정도이다. 그러니 몸에 대한 작중화자의 진술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중화자는 그녀를 떠올릴 때 거의 동시에 그녀의 몸을 느낀다. 그 몸은 단순한 성욕의 대상이 아니라 몸끼리 대화하는 그런 몸이다. “손이 말하는 걸 느끼니?”(p. 79)라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들의 손이 무엇을 말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내 손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까. 그리고 무어라고 응답했을까”(p. 79)라고 자문한다. 여기서 몸은 정신에 대해 자율적인 존재이다. 몸과 정신은 확연히 구별된다. 작중화자에게 사랑은 몸의 사랑이지 정신의 사랑이 아니다. 정신의 작용인 기억은 사랑에 관련된 사건들을 조금씩 왜곡하지만, 몸은 그녀와 ‘나’ 사이에 벌어졌던 행위 그 자체를 고스란히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몸과 다른 사람들의 몸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나와 그녀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게 사랑이 아닐까. (p. 88)
심지어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몸이 먼저이기까지 하다. 사랑했기 때문에 몸을 나눈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몸이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몸이 배반하면 사랑도 끝난다. 이것이 최근 확산되고 있는 젊은 세대의 프리 섹스가 품고 있는 진실일까.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의혹이 인다. 하나는 정신과 확연히 구별되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몸이란 결국 육체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정신에 의해 몸이 억압되어왔다는 근자의 유행 담론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억압 메커니즘은 몸의 자율성 내지 주도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과 몸의 통합(신체라는 개념은 거기에 가깝다)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둘은 이 몸 개념이 정치적으로는 파시즘 지향성을 잠재하고 있고 정신분석적으로는 일정한 도착성을 잠재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몸을 지니고 싶었다. 어쩌면 그 사랑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면 나는 그녀를 감금하고 그녀의 몸을 완벽하게 노략질하였을 것”(p. 95)이라는 진술은 그저 수사가 아니라 그 도착성의 징후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몸의 사랑’이 근대 이래의 도저한 정신주의를 돌파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겠다.
김현주의 「잃어버린 정원」과 김미미의 「그의 편의점에서는」은 오정희의 어떤 측면을 이어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니까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결 낯이 익다는 뜻이다. 하지만 낯이 익다고 해서 새로움이 없겠는가.
「잃어버린 정원」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신희. 뇌성마비였던 아이는 사고로 죽었고, 비열한 남편과는 벌써 그 이전에 이혼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정원뿐이지만 자신의 시력이 상실되어감과 더불어 그 정원조차 사람들에게 약탈당하고 있다. 그녀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그녀는 아이의 유골을 태운 상자를 안고 정원으로 나가 그 가루를 허공중에 흩뿌린다. 그러자 아이의 영혼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켰던 정원의 자물쇠를 열고 충만한 생명감에 사로잡혀 저수지를 향해 뛰어간다(그 뛰어감의 끝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상실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비극적인 충일로 마무리짓는 이 소설은 일면 고전적이고 일면 탐미적이다. 섬세하고도 감각적인 묘사와 풍부한 정서적 울림이 이 소설의 특장인데, 아마도 이 책에 실린 13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예외적인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의 편의점에서는」 역시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편의점을 하는 ‘그’는 아마도 독신인 듯한데, 자신의 편의점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살고 있다. 관찰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익명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남자 1, 남자 2, 여자 1, 여자 2라는 식으로 불리고, 기껏해야 멋진 여자 1, 아니면 별명(마도로스)이나 관계(후배)로 불린다. 그들의 삶은 일상의 건조함으로 특징지어진다. 건조하다는 것은 에로스의 상실, 생명의 상실의 징후이다(이 작가는 건조한 분위기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데 솜씨가 있는 듯하다). ‘그’는 왜 그들의 건조한 삶을 관찰하는 것일까. 심지어 ‘그’는 CCTV에 녹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되풀이해서 보고 또 보는가 하면, 그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한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관찰이다. 변사자 신원 수배의 전단은 상실의 끝이 죽음임을 암시하지만, 그 암시까지를 ‘그’는 관찰하는 것이다. 그 관찰은 대상을 담담하게, 그러나 따스하게 감싼다. 그 감쌈이 에로스를 되살릴 수 있을까.
박무상의 「구두 소리」 역시 비교적 낯익은 모습이다. 이 소설은 소통의 어려움을 주제로 하면서, 같은 것이 입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제시한다. 1)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끼고 경찰에 신고하는 여자의 입장, 2) 단지 그 여자의 구두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인 맹인 남자의 입장, 3) 맹인 남자의 친구인 또 다른 남자의 입장. 결국 3)의 남자는 1)의 여자에게 2)의 남자가 남긴 원고 「구두 소리」를 전해주는 일을 포기하고, 1)의 여자의 구두 굽은 부러져 바닥에서 눈먼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구성상 흥미로운 것은, 1)과 3)이 3인칭으로 서술되고 있는 데 비해 2)는 1인칭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작중의 맹인 남자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데 2)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맹인 남자는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서술되지 않은 그 다음이 그의 교통사고사(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분명치 않지만)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2)를 1인칭으로 서술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만약 2)를 맹인 남자가 남긴 기록으로 본다면 끝에서 암시되는 교통사고사는 사실의 그것이 아니라 허구의 그것이 될 것인데, 이 역시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보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무래도 전자의 방식으로 서술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텐데, 그렇다면 작가는 과거에 죽은 자가 현재에 서술한다는 자연스럽지 못함을 일부러 꾀한 것일까. 일종의 기술의 모험으로서?
김연경의 「불안」은 김연경답게 재기가 넘친다. 결혼한 부부인지 혼전 동거인지 분명치 않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 여자는 대학원생이고 연구소 조교 일을 하는 데 반해 남자는 백수이다. 여자는 지금 임신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생리일이 되었는데도 기미가 없는 것이다. 불안해하는 여자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이 여자의 불안감을 고스란히 되비추며 그려진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의 조심스러움 또한 단순히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문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불안해하는 여자 옆에서 그는 책을 읽다가 “불안은 파국,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불안은 선명한 것이 아니고 막연하고 두려운 것, 신경을 팽팽하게 하는 끝없는 전율과도 같은 것이다”(p. 99)라는 문장에 걸려 그 문장을 세 번 네 번 되풀이 읽는데, 이 문장은 소설의 첫머리에 제사로 제시되고 있다. 소설의 결말은 좀 싱겁다. 자고 일어나 보니 밤새 생리가 있었던 것이다. 작중의 진술 그대로 (비교적) 진지한 소설이 (비교적) 우스꽝스러운 소설로 바뀐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너스레일 뿐이다. 이 결말 부분은 다음과 같은 소설 첫 대목과 조응되어야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들은 급하게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온다. 6월의 날씨라고는, 그것도 그토록 무더운 5월 뒤에 찾아온 6월의 날씨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서늘하다. [……] 도시의 건물을 요리조리 파헤치고 다녀야 할 도둑고양이가 느닷없이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고 하는 이상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 해도 너무한다. (pp. 99∼100)
이 첫 대목은 제사 및 이야기의 불안과 불화를 이루고, 또 결미에서의 “그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라는 진술이 담고 있는 안도와도 불화를 이룬다. 이 소설의 비밀은 그 불화에 있다. 진부한 일상과 위태로운 불안 사이의 길항 속에 삶이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전언인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김연경은 오정희와 연결될 수 있는데, 김연경의 방법은 경쾌하고 발랄하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강동수의 「아를르의 여인」은 전통적인 스토리 텔링 방식에 비교적 충실한 소설이다. 외견상 이 소설은 한 특이한 형제의 이야기를 아우를 1인칭 화자로 하여 서술하고 있다. ‘나’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생모도 어디론가 사라져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 ‘나’를 데려가고, 그리하여 ‘나’는 형과 만나게 되었다. 형은 성장정지증 환자이다(성장정지증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의 그것을 연상시키지만 양자는 문맥이 아주 다르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고를 당해 성장이 멈춘 괴이한 병에 걸린 것이다. 무관심한 아버지와 형의 어머니, 그리고 형과 함께 사는 이 집에서 ‘나’는 ‘주워온 자식’이 되어버린다. 아버지가 떠난 뒤 남은 세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새는 괴상하다. 형의 어머니와 형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있고 ‘나’는 그 관계 바깥으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나’는 그 모자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그리하여 음모를 꾸미는데 그 음모의 예기치 않은 결과는 형의 죽음이다. 이렇게 스토리의 표면만을 살펴보면 이 소설은 최인호의 『내 마음의 풍차』를 연상시킨다. 『내 마음의 풍차』는 서자인 형과 적자인 아우가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함께 성장해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를르의 여인」에서는 서자가 적자를 죽인다.
이 소설에서의 아우와 형은 내밀한 의미에서는 한 인물의 두 모습인 것처럼 읽힌다(형의 성장정지증이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에 시작되었고 ‘나’가 중학교 1학년 여름에 형과 만난다는 시간적 설정도 심상치 않다). 처음에 ‘나’는 사생아이지만 나중에는 업둥이로 변한다. 그 변화의 과정에 작용하는 것은 형의 어머니와 형 사이의 긴밀한 관계이다. 그 관계는 외디푸스적 관계이다.
어머니의 손이 형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어서 귓불과 목덜미를, 그리고 러닝 셔츠 안으로 새가슴처럼 작고 메마른 가슴을 그녀의 손이 집요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에 안긴 형의 작은 몸피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너무도 얇고 가벼워 보였다. 형의 몸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은 아기를 목욕시키는 엄마의 손길과 같았다. 어쩌면 사랑하는 남자를 쓰다듬는 여인의 관능적인 손길 같았는지도 모른다.
불쌍한 내 새끼……
문득 하얗게 질려 있던 형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
그 언젠가 아버지에게 두들겨맞던 날 밤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몰입해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가슴을 쓰다듬던 형의 손이 툭 떨어졌다. 어느새 형은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든 형의 표정은 보통의 열세 살 소년의 그것처럼 씩씩하면서도 편안해 보였다. (pp. 155∼56)
구조적으로 보면 형은 ‘나’의 외디푸스적 측면이다. 그것은 사생아인 ‘나’의 숨겨진 욕망이 형을 통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이미 자신을 사생아가 아니라 업둥이로 인식하고 있다(“아버지가 나에 대한 관심을 거둠으로써 나는 말 그대로 ‘주워온 자식’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나’가 형 모자의 관계를 파괴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생아이기를 거부하고 업둥이가 되고 싶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현실을 수락하고 그것과 투쟁하는 쪽이 아니라 현실을 변형하는 쪽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결국 형은 죽지만 ‘나’가 완전한 업둥이가 되는 데 성공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목에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의 선뜩한 감각을 느꼈을 때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p. 167)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던 화자로 하여금 서술의 현재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하는 작가의 소설 쓰기는 분명히 업둥이로서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동수는 필경 낭만주의자인 것이다.
김환의 「나는 늘 술래였네」는 「아를르의 여인」과 함께 외견상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에 형태상으로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성인이 된 1인칭 화자가 이십몇 년 전 자신의 열다섯 살 시절 에피소드를 회상한다. 당시 ‘나’는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던 치기 만만한 소년이었다. 그런 ‘나’가 방학 한 달을 산사에서 지내면서 이창이 형을 만난다. 고작 두 살 더 많은 고등학교 퇴학생이었지만 그는 열등감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그가 성에 관한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말을 할 때 ‘나’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수치심을 느끼고 모욕감을 느끼는데, 그 구역질의 이면에 열등감이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찾아오던 날 밤에 ‘나’가 보고 들었던 사건의 내용과 다음날 이창이 형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건의 내용 사이의 차이는 ‘나’의 이중 감정의 분열을 극대화시킨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경찰에 신고하고 그는 경찰에 체포된다. 잡혀가면서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나’의 눈을 쏘아보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맞받아 쳐다본다. 그러자 오히려 그가 먼저 시선을 떨군다. 이 대목의 서술은 무척 교묘해서 표면적으로는 ‘나’의 오기가 느껴지지만 이면적으로는 서술의 진위가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결국 이 여름 방학 때의 체험이 ‘나’를 치기 만만한 소년으로부터 한 단계 성장시켜준 것인데, 그 성장이 이중 감정의 분열과 오기와 자기 기만의 혼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작가에게 성장이란 그저 투명하고 긍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듯하다. 게다가 회상기를 “한때는 심각하고 진지했으나, 이제는 농담으로 돌려도 썰렁한 이야기들이 참 많다”(p. 71)라고 마무리짓는 것을 보면 이 작가는 인간의 삶 전체에서도 불투명함과 가치의 복합성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사유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서술 방식 속에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가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이 책에 실린 13편의 소설들은 부분적으로 서로 거리가 가까운 것들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퍽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보이고 있다. 우화소설이 많다는 점, 기술의 모험이 비교적 많이 눈에 띈다는 점, 선배 작가나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과 연결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는 점, 그러면서도 각자 나름대로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될 수 있겠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거의 예외 없이 단선적이지 않다는 점과 이 세계의 질서와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의문 속에서 자아의 견고성과 현실의 확정성은 치명적으로 의심받는다. 그들이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실은 이 세계의 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세계로의 도피를 꿈꾸는 것이 아님은 재삼 확인해둘 필요가 있겠다.
흔히 이런 식의 글의 결론에서 종합과 평가의 권위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여기서 그런 시도로까지 나아갈 생각이 없다. 젊은 작가들의 세계에 대한 공명이 아직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열린 대화가 좀더 필요하다는 게 절실할 따름이다.
[차례]
기획의 말
박성원/ 이상한 가역 반응
김환/ 나는 늘 술래였네
박청호/ 몸의 사랑
김연경/ 불안
강동수/ 아를르의 여인
김설/ 텔레비
박무상/ 구두 소리
최대환/ 샤워하다 뒤돌아보면
김미미/ 그의 편의점에서는
김현주/ 잃어버린 정원
김운하/ 아틀란티스의 주사위
윤형진/ 무서운 얼굴
류가미/ 고래야 고래야
해설/ 새로움의 진정한 의미·성민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