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폭군』 『먼동』의 작가 홍성원의 장편소설. 영웅도 없고 승자도 없이 오직 패자만을 대량으로 생산한 한국 전쟁을 작가는 그 ‘패자’들의 눈을 통해서만 황량한 전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파악된 한국 전쟁의 전체 모습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6·25라는 고통스런 망령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여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소설 『남과 북』은 6·25를 졸업하기 위한 졸업 논문과 같은 것이다.
[해설 1]
6·25 콤플렉스와 그 극복*
김병익
1
홍성원의 소설 『남과 북』은 우선 우리의 의식 뒷면으로 이미 후퇴해버린 6·25의 처절한 기억들을 재생시키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감과 전율을 환기시키는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참담한 전투, 무책임한 죽음, 잔혹한 학살, 무자비한 보복 그리고 생명을 건 피난, 각박한 생활, 무질서·혼란·절망, 이런 모든 비극적인 이미지와 언어들이 소용돌이치며 스스로 묻어버리고 싶었던 참담한 체험들을 아프게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겉으로는 건강하고 현실적으로 안락을 즐기며 이미 그 암담한 파괴로부터 회복되었다고 자부한다 하더라도 소설 『남과 북』은 결코 완전히 6·25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을 각성시킨다. 오히려 이 소설은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의 가장 깊은 부분에 6·25가 자리잡고 있어 우리의 언어와 행동에 크게 간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오늘의 현실이 6·25체제의 연장선 위에서 더욱 경화되고 있으며 한국인에게 6·25는 강력한 민족적 콤플렉스로 작용하고 있다는 심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 문학에서 극히 희귀한 로망을 이루고 있는 『남과 북』에 대해 더 주목하고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 민족적 콤플렉스를 문학의 상상적 공간을 통해 진단·노출·해부함으로써 그 비극적인 증세를 자각시키고, 그리하여 6·25를 근원적으로 극복할 가능성의 계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 전쟁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대하소설인 『남과 북』이 제작될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마 ‘6·25 콤플렉스’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리라.
실상 6·25 콤플렉스는 식민지 콤플렉스와 더불어 오늘의 한국인 의식에 부정적 역할을 감당하는 2대 심성 구조의 하나를 이룬다. 30 여 년 동안 계속된 일제의 강점과 3년여에 걸친 골육상쟁의 역사적 체험은 현대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패배 의식·열등감·타율성·운명론·도피 심리의 병원체로 지목되고 있다. 그것은 현재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갈등과 부조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동시에 그 구조와 현상을 극복할 자신과 용기를 꺾어놓고 있다. 현대사에서 서로 시간적으로 계기되고 있는 이 두 개의 사건은 하나가 이민족의 지배인 반면 또 하나가 한 민족 안에서의 충돌이며, 전자가 전근대사의 붕괴와 더불어 초래된 반면 후자가 근대사의 진정한 기점이 될 8·15 해방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부정적인 압박을 가하는 데에는 오히려 상승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 중 식민지 콤플렉스는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각성되고 극복될 가능성을 오래 전부터 보여왔다. 예컨대 한일간에 국교가 수립되고 한국사 연구에 있어 주체적인 사관의 성립, 기틀이 마련된 것이 그렇다. 그러나 6·25 콤플렉스는 여전히 넓고 깊이 만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충분한 자각 증세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6·25 콤플렉스가 식민지의 그것보다 시간적으로 늦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다음 세 가지 점에서 6·25 콤플렉스는 우리에게 매우 미묘하고 난해한 특성을 갖는 것이다. 첫째는 6·25의 궁극적인 책임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의 약소성으로 귀속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원인과 결과에서 한국인의 잘못을 추궁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 전쟁이 한반도에서 한국인을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럼에도 한국인의 알리바이가 성립된다는 것은 이 전쟁의 지독한 역설을 이룬다. 그것은 한국인에 의한 전쟁이지만 한국인의, 한국인을 위한 전쟁은 아니었다. 둘째로, 우리의 적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식민지 콤플렉스의 근원이 일본이고 그 때문에 일본에 대한 비판과 공격에 아무런 유보가 요청되지 않지만 6·25의 그것은 이민족의 원조에 힘입어 우리 민족의 일부와 싸웠으며 그것도 엄격히 보자면 소수의 이념가들과의 전쟁이었고 그들의 이념조차 외래의 것이었다는 데에서 이미 상정된 적의 개념을 매우 흐리게 만든다. 셋째로, 오늘의 우리에게 6·25 체제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건은 그것이 아무리 충격적일지라도 근 1세대의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게 마련이며 그 상처도 아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과 그것의 경직된 대립은 오히려 1950년대의 그것보다 더 심각해지고 37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6·25는 현존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직된 체제가 국제 정치의 예상된 위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든 국내 사정의 어려움과 폐쇄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든 우리의 환부를 오히려 더 크고 심하게 덧나도록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로망이 나타나야 한다는 한국 문학의 오래된 제창은 이 같은 6·25 콤플렉스의 자각 없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6·25 로망의 대망론(待望論)은 결국 이 같은 민족적 콤플렉스의 극복이란 명제를 전제로 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로망이 가능하다는 것은 예컨대 한국 전쟁의 경우 그것의 객관적 인식, 전체적 파악, 전면적 묘사를 통해 그것이 이루어진 시간과 공간을 총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6·25의 로망화는 6·25의 상처·콤플렉스를 적어도 자각한 이해력 위에 성립하며 이것이 성공한다는 것은 순수한 의식사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6·25 콤플렉스가 극복되고 있다는 것을 사정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물론 한국 전쟁을 객관적이며 전체적 문맥에서 인식하고 혹은 이 전쟁에서 궁극적이고 능동적인 계기를 획득함으로써 6·25를 극복하려고 한 작가는 홍성원만이 아니다. 단편 「수난 이대」로부터 장편 『야호(夜壺)』에 이르기까지 하근찬은 식민지와 6·25의 수난을 민족사적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장편 『광장(廣場)』의 최인훈은 한국 전쟁을 이념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이들의 인식과 접근법은 당시 유행된 실존주의적 감수성으로 윤색되어 개인의 파탄과 가치관의 붕괴, 풍속적 변모 혹은 전쟁의 극한 상황성, 삶의 부조리 등을 묘사·절규하는 전중·전후 문학의 그것을 뛰어넘고 있다. 『광장』과 『야호』는 6·25가 개인적·내적 체험과 상처인 동시에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의 그것임을 분명하게, 그리고 높은 문학적 성과로 이해시킨다. 이들보다 약간 후배인 김원일의 「어둠의 혼」, 윤흥길의 「장마」, 조선작의 「시사회」는 소년기에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6·25가 오히려 그들의 세계 인식과 진실에의 집념을 향한 인간의 성장에 적극적인 계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70년대 작가들의 6·25 문학은 소년의 눈을 통한 회상의 기록으로 성인기에 전쟁의 현장에서 상처 입은 그들의 선배 작가들과 다른 시선을 통해 6·25 문학의 일방적인 수난 의식을 극복하고 있다. 그러나 전전 혹은 전후 작가와 더불어 최인훈·하근찬 및 70년대 작가들에 대해서 우리는 6·25의 로망화란 관점으로 보자면 그들 나름의 한계성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6·25의 전체를 객관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물론 6·25를 객관적이고 전면적으로 보여준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그렇지 않았던 작품들, 가령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와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김동리의 『실존무』와 손창섭의 『비 오는 날』, 서기원의 『암사지도(暗射地圖)』, 송병수의 「쇼리 킴」 혹은 하근찬·최인훈·김원일·윤흥길의 작품들이 우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요망해온 6·25 로망은 홍성원의 『남과 북』에서 처음 발견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같은 확인은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로망이 다른 어떤 주제보다 작가 의식에서나 창작 기술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을 정면으로 다루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앞에서 말한 6·25 콤플렉스 없이, 혹은 그것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인식의 문제다. 우리는 이 전쟁에 대한 내외의 각종 전사와 기록으로부터 우리 스스로의 목격과 증언을 통해 너무 많은 자료와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것이 우리의 6·25관을 적극적으로 구성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6·25의 역사적 정리, 사회 문화적 평가, 정신사적 의미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아직 객관적이며 정직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6·25란 극적인 사건이 아직 우리에게 너무 밀착되어 있고 그것의 작용과 영향이 종잡을 수 없으리만큼 너무나 막대한 것이다. 둘째로, 6·25의 총체적 취급에는 한 사람의 작가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방대한 지식과 사실의 이해가 요구된다. 그것은 당시의 정치적·외교적·국제적·전략적 지식으로부터 30여 년 전의 사병 계급과 피난 수도의 시장 모습에까지 능통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과 실증이 상상의 사건들과 정확히 봉합되어야 한다. 6·25만큼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기이하고 극적인 소재를 가진 사건도 드물 것이며,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도 그만큼 고무되는 것이지만 이 픽션의 모든 것들이 사실과 상식의 그물에 구속되어야 하며 픽션과 논픽션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셋째로, 한국 전쟁을 전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작가에게 가장 큰 제약점은 우리의 적이자 동족인 북의 실상에 관해 충분히 기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작가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의 저 밖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지점을 어느 한 면의 정치적 지지라는 응축된 진술밖에 허용하지 않는 곳에 제한시키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적에게 편들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체제의 이해도 어렵게 되어 있으며 이것은 자유로운 상상과 판단에 기초할 작가 정신에 배반감마저 안겨준다. 홍성원의 야심적인 『남과 북』 역시 이 한계를 분명히 노출시키고 있으며 작가 스스로 그 고충을 고백하고 있다(그의 「한국 전쟁에 대한 새로운 조명」, 『문학과지성』, 1973년 여름호). 한국 전쟁의 로망화는 이 같은 객관적인 여건 위에서 숱하게 벌어진 각양각색의 사건과 에피소드, 현상과 인물들을 유기적으로 종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전쟁은 어느 계층에만, 어느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 민족 전체, 이 한반도 전면에, 이 사회 모두에 두루 파급되고 체험된 총체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2
홍성원의 『남과 북』을 읽는 독자에게 먼저 압도해오는 것은 『세대』지 1970년 9월호부터 1975년 10월호에 이르기까지 5년 2개월 동안 한번도 결하지 않고 62회나 연재된 그 방대한 규모다. 아마 문학적 평가를 획득하면서도 이처럼 긴 초장편의 한국 소설은 벽초의 『임꺽정』과 아직 미완인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황석영의 『장길산』 정도일 것이다. 물론 작품의 길이가 작품의 질적 평가와는 무관계한 것이므로 그의 지구력을 존경하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대한 작품량이 조금도 지루함을 허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자의 관심과 긴장을 요구할 때 우리는 그 방대성을 그저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어떤 힘으로 독자에게 1만 장의 원고를 읽도록 위협하는가? 독자가 『남과 북』에 매혹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기성의 6·25를 체험한 세대라면 이 소설에서 실증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숱한 사건들을 이미 알고 있거나 목격했을 것이며 이러한 친숙성이 이 작품을 끝까지 던지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대부분 있을 수 있는 것의 친숙성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적극적인 계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작가가 항상 새로운 사건과 특이한 에피소드를 제공하면서 그것들을 박진감 있고 치열한 터치로 묘사하는 그의 작가적 능력일 것이다. 홍성원은 대부분의 작가가 하나의 단편으로 구성할 만한 이야기를 대담한 생략과 경쾌한 화법을 구사하여 에피소드로 처리하고 있다. 예컨대 6·25 직전 사병 박노익이 빤빤한 신참 소위 최완식을 보복 구타하면서도 중대장 오영탁 대위로부터 처벌을 면제받는 이야기가 그렇다. 이 부분은 직업 군인다운 오대위와 비열한 최소위, 당차면서도 명사수인 박하사 등의 인물 설정을 위해 서두에 삽입한 에피소드이지만 독자는 이 간략한 이야기에서 이 인물들이 갖는 각양한 개성과 이 개성들의 불가피한 충돌에서 이 세계의 한 단면이 보여주는 진실과 이 개성들의 상호 대조를 부감할 때 생기는 박진한 통쾌감을 만족스럽게 획득하는 것이다.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홍성원의 스토리텔러로서의 탁월성, 헤밍웨이의 문체를 연상시키는 스피디하면서도 드라이한 문체는 이 『남과 북』에서 십분 발휘되고 있다.
비는 폭음과 섬광 속에서도 시름시름 꾸준하게 내리고 있다. 호 주위로 위장된 떡갈나무 잎들이 계속 내리는 비를 맞아 후들후들 떨곤 한다. 문득 컴컴한 노익의 시야가 괴괴한 달밤처럼 훤하게 밝아온다. 호박색 신호탄과 연갈색 조명탄들이 컴컴한 골짝 위로 소리 없이 둥실 떠오른다. 노익은 그제야 자기 발 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대하고 육중한 검은 물체들이 입으로 불을 토하며 우릉우릉 숲속을 질주하고 있다. 그것들은 잡목과 고목들을 까뭉개며 등뒤로 진흙과 풀뿌리를 공 던지듯 휙휙 내던진다. 흰 꼬리를 뒤로 기다랗게 드리운 채 수십 개의 신호탄들이 검은 하늘에 무수한 곡선들을 그리고 있다. 크고 작은 종류의 각종 포탄들이 이동중인 메뚜기 떼처럼 무수하게 남쪽으로 치달린다. 너무 갑작스레 당한 일이어서 노익은 이런 일들이 막연히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고 예고 없이 시작된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노익에게 약 10분쯤의 시간이 필요했다. (제1권, pp. 140∼41)
『남과 북』의 문체 샘플을 보이기 위해 인용한 6월 25일 미명의 예고 없는 개전을 묘사한 이 문장에서 우리는 거의 신문 기사에 육박하는 객관적인 서술, 그러나 싱싱한 비유를 통해 이 벅찬 순간을 생동감 있게 전달해주는 효과에 강력하게 유인된다. 그리고 『남과 북』 전편이 이런 영상적인 수법과 박진력 있는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작가는 6·25가 야기한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 절박한 장면과 서사적인 분위기를 정연하고 생생하게 재현시키는 데 성공한다.
작가는 이 에피소드와 장면들의 다양함 못지않게 매우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각자의 뚜렷한 개성과 신분을 갖고 있으며 그 처참한 상황에서 각자 나름의 고통스런 궤적을 그리고 있다. 사학자 설규헌 박사와 그의 아들인 외신부 기자 경민, 딸 소영, 설박사의 스승이며 시골의 명문 지주인 우동준과 그의 아들인 대학의 사학과 강사 효중, 화가 효석, 딸 효진, 우씨의 소작인이며 포수인 박두식 노인과 그의 세 아들 한익·수익·노익, 탁월한 직업 군인인 오영탁과 그의 부인이며 무용 교사인 강윤정, 그녀의 정부인 변호사 서태호, 중대장 오영탁의 부하인 최완식 소위·손정남 소위, 그리고 허세웅·조만춘·서동필·변칠두 등등 많은 하사관들, 북에서 월남한 의사 신동렬과 그의 형수이자 애인인 민관옥, 유일한 북한군으로 등장하는 그의 이복형 신학렬, 역시 자유를 찾아 진남포에서 서울로 온 한상혁과 거구의 모희규, 포화 속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미쳤던 인텔리 박가연과 인민군 보조 간호원으로 포로가 되었던 최선화, 그리고 한국전에 참전 또는 취재하러 온 터너, 댄, 킬머와 한국계 2세인 로이 킴 등 주요 주인공들은 무려 30여 명을 헤아린다. 작가가 이처럼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이 전쟁이 어느 한 집단만의 것이 아닌 모든 계층, 모든 신분에 두루 파급되고 참여되는 전쟁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동시에 이들을 통해 그 역으로 이 전쟁과 이 전쟁이 파급된 모든 부분을 면밀하게 재현·관찰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령 설경민과 로이 킴, 킬머 등 신문 기자들은 6·25의 내외적·시사적 추이를 설명하는 역할을, 설규헌과 우효중은 이 전쟁의 역사적 관점을 제시한다. 군인들은 물론 전투와 전선의 이동을 따르고 있고 민관옥·설소영 등 여인들은 고달픈 피난살이를 보여주며 신학렬과 박수익이 인민군과 포로 수용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박가연과 최선화는 고아들과 창녀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박한익과 서태호·최완식이 전쟁의 혼란을 이용하여 치부하는 부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신동렬의 병원 근무는 산적한 죽음과 그 죽음의 무의미성을 증언한다. 작가는 이 많은 인물군들을 적절히 연결 배합시키면서 어윈 쇼의 『젊은 사자들』과 같은 수법으로 각자의 행동 반경을 병렬시키고 있다. 소설은 전방에서 후방으로, 적 치하의 서울과 피난지인 부산으로 두루 순방하면서 한반도와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각양한 생태를 입체적으로 조립시키고 있다.
『남과 북』의 등장인물은 연령적으로 보아 노인층인 설규헌·우동준·박두식 그리고 고아인 진숙 등 몇몇의 방계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20대초에서 30대 안팎의 청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6·25의 주역들이 이 세대이며 이 전쟁으로부터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세대가 바로 이 연령 집단이었다는 사실에 상도할 때 작가의 이같은 연령층 설정은 아마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인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미흡점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데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첫째로는, 인물들의 신분이 상류층 지식층으로 편중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적 구조를 사실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설씨·우씨의 집안과 신동렬 형제, 한상혁·서태호·박가연 등이 부유한 가정 출신이며 최상급 교육을 받은 사람들임에 비해 이들에 상응할 만큼 상세히 묘사된 집안은 소작농인 박두식과 그 아들들뿐이다. 6·25가 전인구 구조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비참함·처절함이 하급 계층에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라면 『남과 북』 주인공들의 이 같은 인물 배열은 공정한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호의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 같은 신분 배열은 보다 지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 한 작가의 의도로 말미암은 것이리라. 어떤 사건에 대한 정확하고 전체적인 이해는 이들 지식인의 사유와 행동을 통해 보다 적절하게 대변·증언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북의 현실과 인물이 겨우 신학렬에 의해서만 단편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한계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어쩔 수 없는 객관적 여건 때문으로 유보시킬 수 있지만 6·25 이후의 월남인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는 것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전쟁이 초래한 가장 큰 사회적 변동은 계층의 변화와 더불어 인구의 이동이다. 1·4 후퇴 때의 참혹한 남하 행렬과 그들이 연고 없는 피난지에서 보인 끈질긴 삶의 의욕은 소설적 관심에서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전전에 월남한 신동렬·한상혁·모희규를 죽이고 민관옥을 미치게 만듦으로써 소설 『남과 북』에서 북한 출신의 인물들을 전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남과 북』의 인물들은 6·25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성격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지적인 설경민 남매, 온건하면서도 지적인 신동렬·한상혁, 생활력이 강하고 의지력에 충만한 박한익·모희규, 비겁한 최완식, 무뚝뚝한 오영탁, 기민한 박한익, 우직한 박두식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처음 소개될 때의 인상과 성격을 끝까지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6·25의 충격과 체험에도 불구하고 개성의 어떤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직선적으로만 발전한다. 오연한 우효진과 약간 감상적인 그녀의 오빠 우효중만이 어느 정도의 성격적 변모를 보이고 있지만 그 정도는 미미하며 분명하지 않다. 요컨대 홍성원의 인물들은 성격상 변증법적인 발전을 얻지 않는다. 이것은 홍성원의 소설들이 갖고 있는 인물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며 아마 이것은 그의 문학에서 약점이 되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인물이 소설 속에서 반드시 변모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거의 일률적으로 성격의 단선적인 전개만을 보이게 될 때 우리는 인간의 오묘한 심상과 복잡한 내면에의 긴장된 관심이 약화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3
그러나, 아마 6·25에 있어 인간의 변증법적인 변모는 사치스러운 기대일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전쟁을 극도의 혼란과 광기, 폭력과 비인간화, 무의미와 파탄의 치명적인 언어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홍성원과 그리고 그의 6·25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에게 존재와 죽음은 인간의 바람직한 변모에 우선하고 있다. 사실 『남과 북』의 등장인물들은 자기의 생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틈도 없이 죽음을 향해 치닫는다. 그 시대가 허용하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하는 인간적인 고민의 여유가 아니라 오직 삶과 죽음의 급박한 택일뿐이었다. 설규헌은 피납 도중 피살되며 우동준은 인민 재판으로 처형당하기 직전 박두식에 의해 구출되지만 구속중에 얻은 병으로 사망하며 그의 둘째아들 효석은 재판도 없이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총살당한다. 모희규·손정남·조만춘·변칠두는 물론 전사하고 오영탁은 전사를 스스로 택하며 신동렬·우효중·최선화는 자살하고 강윤정·최완식은 피살되며 미국인 종군 기자 킬머는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물 중에서 민관옥은 미치고 박가연은 발작을 일으키며 설경민은 성한 나머지 다리마저 총상을 입고 완전한 불구가 되며 최후로 휴전까지 맞이했던 한상혁마저 박노익의 오발 사고로 죽는다. 그들의 죽음의 양상과 그 동기는 가지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그 죽음의 대부분이 당사자에게 선택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필연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피할 수도 없으며 무차별하게 찾아온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총알에는 눈이 없고 담벼락을 꿰뚫듯이 사람의 몸도 간단하게 꿰뚫는다. 한데 어째서 그녀의 머릿속에 그만은 죽지 않으리라는 맹랑한 확신이 떠올랐을까? 왜 그는 그녀의 머릿속에 죽지 않을 것이라는 불사의 부적을 달고 있을까? 그것은 희망이다. 그는 지금쯤 죽어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또 내일쯤 죽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제2권, pp. 400∼01)
무수한 적의 눈이 자기 몸에 집중되자 모희규는 갑자기 쑥스러움 비슷한 고약한 기분이 된다. 이런 골짝에서 죽으리라고는 그는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일이 없다. 아니 그는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자기만은 꼭 죽지 않는다는 묘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적의 총구를 눈앞에 보게 되자 나도 드디어 죽는구나 하는 피할 수 없는 낭패감이 느껴진다. (제6권, p. 217)
이들의 죽음은 이미 맞아들이도록 예정된 것도 아니며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전장에 있었고 자기들의 죽음을 도대체 마땅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한없이 서럽고 절대로 고독한 것이다.
아아 씨팔 여기서 죽다니, 이 이름없는 외진 골짝이 내가 죽을 장소라니…… (제6권, p. 218)
고통은 없다. 맞은 것은 알 것 같은데 어디를 맞았는지 알 수가 없다. 온몸이 한없이 땅으로 잦아들고 눈앞의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것이 죽음이다, 나는 지금 죽고 있다, 하고 조상사는 막연히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아아, 나는 죽는다. 내가 죽는다. 나 혼자 죽는다……’ (제5권, p. 342)
모희규와 조만춘의 이 저주와 절규는 ‘눈 없는 총탄’ 앞에 선 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선에 있든 후방에 있든 그들은 모두 전투의 아비규환 속에 절망하며 내일을 알 수 없는 전율적인 현실에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가 미치고 현실이 미치고 있는 이제, 그들 연약한 인간들이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과 이 여인 둘 중에 누군가가 분명히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실은 두 사람 모두가 전쟁 공포증에 미쳐버렸는지도 알 수 없다. 사실 두 달째로 접어든 이 전쟁은 이 나라 전체를 미친 짐승처럼 광포하게 몰아가고 있다. 하늘도 미치고 땅도 미치고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광란의 소용돌이로 휘몰려가고 있다. (제1권, p. 420)
“두 사람이 다 미칠 수는 없어. 전쟁이 세상을 깜빡 미치게 만드는군.” (제2권, p. 405)
전쟁이 죄악이고 폭력이며 그 자체가 삶의 카오스며 인간의 카타스트로프란 생각은 사실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1차 대전 이후만 해도 한 인간의 영웅담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 가능한 인간의 결정적인 선택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말로의 행동주의도 그렇고 레마르크의 휴머니즘도 그러하며 헤밍웨이의 상실된 세대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인간의 것이었고 의지적인 것이었으며 가능성에의 탈출로였다. 그들이 비록 전쟁에서 절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미의 배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노만 메일러, 하인리히 벨의 2차 대전 이후의 세대에게 있어 전쟁은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이었고 그것은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이었으며 역사와 명분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을 유도했다. 이 시대 인간들의 심리 상태에 실존주의가 압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에 있어 그것은 더욱 절망적이며 허망한 것이었다. 죽고 자살하고 불구가 되고 미치고, 설혹 그 아수라장에서 용케 살아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심층부에 깊은 상흔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 전쟁이 살육과 보복의 유례없이 치열한 인간 비극을 이루고 있으며 더구나 그것이 동족간에, 형제간에 총을 맞대고 무차별 학살하는 부조리가 전부였다는 데에 우선적인 이유가 있었다. 오영탁 대위가 “아아, 이건 전쟁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이런 엉터리 같은 전쟁”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건 살인이다! 전쟁이 아니다!”라고 절규하고 미군 사병이 기자에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전쟁이 아니고 살육”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전쟁의 현장적 성격을 웅변한다.
상혁은 그제야 이름도 모르는 적병과 자기가 왜 서로에게 총격을 가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가를 깨닫는다. 쌍방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적도 살고 나도 사는 일은 전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제3권, pp. 62∼63)
그리고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들의 목숨을 노려야 하는 그 ‘적’이 자기의 동족이며 형제이고 자기들을 돕고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외국인보다 더 친숙한 상대라는 데 이 전쟁의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극점에 달한다. 예컨대 손정남은 미군이 “공산주의자인 적들을 미워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적이지만 “한국인 민간인을 일종의 인종적 우월감으로 학대하거나 모멸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로들이 “적이 아니라 같은 아군처럼 느껴지고, C 레이션을 먹고 외국어를 지껄이는 유엔군이 북한군보다 더욱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은 다른 전쟁에서는 전혀 목격할 수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 전쟁의 특성이었다. 이 민족적 비극, 전대미문의 아이러니는 박수익이 인민군에 입대하면서 형 한익과의 대화를 통해 국군 사병인 노익이 이미 죽어 있기를 바라는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헌데 그 녀석이 살아 있다면 우리 집안은 대체 무슨 꼴이 되는 거유?”
“무슨 꼴이라니?”
“형과 아우가 총부릴 마주 대구 서루 죽일려구 맞총질을 할 게 아니우?”
[……]
“형, 난 죽는 건 무섭지 않은데 노익일 만날까봐 제일 무섭수. 그 녀석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수. 죽었으면 적어두 형제간에 맞총질은 안 헐 게 아니우……”
한익은 아우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떨려 나온다고 생각하자 자기에게도 갑자기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다.
“씨팔, 무슨 놈의 세상 꼬라지가 형제끼리 서루 맞총질을 해야 되우? 난 솔직히 아무것두 모르겠수. 공산주의구 나발이구 뭐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우.” (제2권, pp. 26∼27)
작가 홍성원은 이 비극의 원인이, 이 전쟁의 참혹한 양상이 6·25가 바로 ‘남의 전쟁’이란 특이성에서 온다는 것을 누차 강조한다. 그는 이 전쟁이 한국인과 관계 없이, 한국인의 선택과 관계 없이 오직 한국인만을 희생으로 하는 철저한 ‘잘못된 전쟁’이라는 데 분노하고 있다. 그는 이 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혹은 남북 분단과 38도 선이 한국인과 무연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학자 설규헌의 생각을 통해 전쟁은 “어떤 명목으로든 가장 큰 죄악”이며 한국전은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생각’의 차이로 빚어진 것이고 그 ‘생각’마저 외국에서 ‘잠시 꾸어온 것’임을 주장한다. 그가 한국 내의 사상적 대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고 서양에서 서양 사람들이 그들 사회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창출해낸 사상 체계이자 통치 이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 나라 백성들의 전통적인 생각과는 좀처럼 융합할 수 없는 낯선 생각이요 꾸어온 남의 사상이다. 말하자면 버터나 러시안 수프처럼, 김치로 길들여진 이 나라 백성의 구미에는 어딘가 맞지 않는 느끼한 음식인 것이다. 그러나 북녘 사람들은 러시안 수프가 영양가 많은 음식이기 때문에 그 음식을 우리 백성에게 먹이기 위해 부득이 이번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나 러시안 수프가 영양가 높은 음식이라는 것만을 강조하여 주장할 뿐, 그 음식이 훈련 안 된 이 나라 백성의 위장에 어떻게 소화될지는 미처 꼼꼼하게 챙기지 못한 것 같다. 아무리 영양가 높은 기름진 산해진미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영양은커녕 설사를 일으키는 악식(惡食)이 될 수도 있다. (제2권, p. 65)
설규헌의 이 같은 ‘꾸어온’ 사상 대결관은 그의 아들이고 신문 기자이고 이 소설에서 가장 지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등장하는 설경민에게 보다 강력한 사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싸울 것을 준비하지 않은 평화로운 한국 국민에게 도대체 누가 지금과 같은 싸움의 발단을 만들어놓았는가? 위도 중의 하나인 38도 선을 한반도 복판에 누가 제멋대로 걸쳐놓았는가?” 질문하며 터너와의 토론에서 한국 전쟁의 결말에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스탈린과 모택동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한국은 국제 정치의 흥미를 위한 제물이며 한국인은 열강의 줄놀음에 따라 일방적인 희생만을 감당해야 하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그는 한국군이 패전만 한다는 외국 기자에게 항변한다.
지금의 한국은 옛 로마 시대의 원형 투기장과 같은 곳이오. 한반도라는 이름의 이 극동의 투기장에서 남북한의 한국인들은 지금 방패와 창을 들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관객을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시범 경기를 하고 있소. 따라서 이 투기장에서 다치거나 피를 흘리는 사람은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남북한의 한국인들뿐이오. 관객들은 높고 안전한 객석에 올라앉아 있기 때문에 아무런 위험도 없고 다칠 염려는 더욱 없소. 그들은 다칠 염려가 없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자기들이 키운 검투사가 좀더 과감히 가열차게 싸워주기를 원하고 있소. 그러나 투기장의 검투사들이 좀더 잘 싸운다는 것은 상대편에게 좀더 큰 상처를 입히거나 상대를 아주 죽이는 것이오. 말하자면 ‘아레나’에서 싸우는 가련한 검투사들은 어차피 한쪽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고, 설혹 살아남아 승자가 된다 하더라도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마련이오. 결국 한국인들은 자기를 키워준 주인에게서 서푼 어치 밥이나 얻어먹고 민주주의 공산주의라는 두 낯선 관객들에게 목숨을 건 사생결단의 검투 시합을 서비스하고 있소. 한데 이 오만한 민주 공산 양편의 관객들은 그것도 부족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남북한 검투사들에게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적개심이 부족하다고, 좀더 열심히 싸우라고 화를 내며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소. 대체 이 염치없는 관객들은 한국인 검투사들이 얼마나 더 열심히 싸우기를 원하는 거요? (제4권, pp. 367∼68)
내 마누라두 양공주야. 부끄러워 말라구, 우리 모두가 양공주니까…… (제6권, p. 15)
투기장의 검투사, 양공주의 위치로 전락해버린 한국의 처지에 대한 분노가 이렇게 만든 외국에, 그들의 한국인에 대한 맹목에 화살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작가는 킬머가 한국 전쟁의 취재 활동을 마치 “사냥을 수행하는 기분으로 유쾌하게 따라다니는” 무책임자라고 야유하며 한국 소년들에게 권투 시합을 시키는 GI들에게 “멕시코 사람의 닭싸움처럼 구경하는” 야만인이라고 공격하며 나체로 끌려다니는 인민군 여맹원으로 하여금 그녀의 사진을 찍는 미군에게 침을 뱉도록 만든다. 미국인의 편견과 비난에 끊임없이 대결하던 작가가 마침내 킬머의 어머니로 하여금 한국 전쟁은 “한국인의 잘못이 아니라 청부 맡은 것”으로 실토케 하며 터너로 하여금 한국인에 대한 경멸이 ‘한국식 보복’을 당한다고 두려워하도록 만들며, 무엇보다 한국과의 혈연을 부단히 거부하려는 로이 킴에게 “이 나라에 깊은 유대를 맺고 있음”을 각성시켜 한국에 되돌아올 것을 결심시키는 것은 매우 의연하고 통쾌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 ‘청부 맡은’ 전쟁이 우리에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명을 허용하지 않는 부조리이며 무의미한 희생일 뿐이다.
사람이 무언가에 목숨을 던질 때는 목숨을 내던져도 좋은 논리적인 이유나 목표가 있는 법이오. 헌데 난 이 꼴이 되고도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제4권, p. 376)
4
소설 『남과 북』에서 강렬한 개성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인물들은 설경민이나 우효진, 신동렬이나 한상혁 같은 사회적으로 상류층이며 지적인 체질을 강하게 보이는 인간들보다 “전쟁 외에는 얼빠진 사람”인 오영탁, “어디 갖다 놓아도 죽을 것 같지 않은” 거구의 모희규, 그리고 “물샐틈없는 타산가”인 박한익과 그의 동생이며 명사수인 노익 등 행동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부류들이다. 이들의 기민성·명쾌성·대담성·치밀성, 그리고 인간다움은 약간 과장된 묘사의 느낌을 주지만 작가가 이들에게 갖는 호감은 독자들의 그것처럼 상대적으로 매우 크다. 이것은 홍성원이 이런 부류의 행동인 편에 서 있다는 시사를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6·25와 같은 혼란과 무질서의 사회에서는 이런 인간형들이야말로 적자생존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사실 냉철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비판하는 설경민과 행동하고 책임지는 오영탁은 두 부류의 대표적인 존재인데 삶과 죽음의 운명은 이 두 사람에게 엇갈려 나타났지만 경민이 이 전쟁통에서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투에 못 이긴 미군의 총격으로 불구가 되었으며 영탁이 충분히 살아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는 것은 한상혁이 부하의 오발 사고로 죽고 모희규가 부하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또 다른 대조와 더불어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환언하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행동하는 자, 현실에 충실하는 자가 주인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이야말로 쉽사리 패배하지 않는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이 점이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명백히 제시되는 것이 명문 지주인 우씨 일가의 몰락과 그의 소작농인 박씨 일가의 부상이다.
우동준에 의해 버드내에 정착하고 그의 주선으로 결혼한 포수 박두식이 그의 상전에게 보내는 충성과 헌신은 봉건 체제의 소작농이 보여주는 그것처럼 극히 전형적인 형태를 이룬다. 그러나 그의 세 아들은 “한국 고유의 양반과 상인이란 계급 사회에서 출발한” 해묵은 콤플렉스에 상이한 반응을 보인다. 차남 수익은 인공(人共) 치하에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맹렬한 반발을 보이고 삼남 노익은 일찍부터 반상의 관계권으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장남 박한익은 적절한 화해를 통해 자신의 현실적 이득으로 유도한다. 그는 자신을 치부케 만든 쌀을 우씨의 집 안에 숨겼고, 우씨의 남매 구출에 힘쓰며 우동준의 장례와 효석 남매의 생활비에 돈을 대준다. 그의 이 같은 출연은 결코 보은이 아니라 우씨의 재산과 명예를 흡수하며 오연한 효진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었다. 경멸하면서도 현실적인 무력감에 몰려 한익에게 도움을 청하는 효진과 열등 콤플렉스를 자학적으로 처리하면서도 결코 야심을 버리지 않는 한익의 대결은 또 하나의 전쟁을 보듯 치열하고 극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효진이나 한익이 이미 운명적으로 예감한 것처럼 상민 박씨 일가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효중은 자학하여 폭음에 젖다가 폐인이 된 끝에 자살하며 한익은 지방 유지로 군림하고, 수치심을 누르고 그와 결혼한 효진은 그의 출세를 돕는다. “인생은 싸움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익힌” 박씨의 형제들이 “꼿꼿이 서서 말라 죽는” 우씨의 전통을 찬탈한 것이다.
“[……] 왜 전쟁이 우리 집안에만 이런 시련을 안겨주는 거죠? 어째서 우리 집안에만 이런 불행들이 닥쳐야 하는 거죠?”
“고목이야 우리집은. 꺾이지도 않고 꼿꼿이 서서 형해만 남은 채 말라 죽는 고목 말이야. 우리집도 이젠 건강한 새 거름이 필요해. 박한익이 같은 우리와 다른 질기고 강인하며 끈적끈적한 새 거름 말이야. 네가 그렇게 된 건 오히려 잘된 일이야. 아버님도 아마 그런 과정을 다 아시고 돌아가셨을 거야.”
“허지만 그런 수치와 고통을 왜 제가 당해야 해요?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먼저 죽었어야 했어요.”
“참어, 그건 수치가 아니야. 넌 오히려 우리들 중에 선택된 존재인지 몰라. 역사는 제가 가야 할 길은 한치도 옆으로 비켜가지 않아[……].” (제4권, p. 148)
효진에게 타이르는 이상과 같은 효중의 설명은 사학자답게 냉철한 현실 인식이며 역사의 진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다. 그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진실이며 과연 효진은 “양쪽 가계를 걸친 채 두 가족을 결합시킨 상징적인 존재”로 한익의 아이를 갖는다.
그리고 이것은 급격한 사회 변동이 동반하는 계층 구조의 변동에 대한 작가의 정당한 관찰이다. 6·25를 통해 작가의 말대로 “역사는 이미 낡고 오랜 한 장(章)을 떠나 다음 장의 새로운 주인공인 그들을 편들고 있었”고 이에 따라 “머릿속에 학식이 제아무리 많이 들었어도 학식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 이상 돈만이 확실한” 시대가 된 것이다. ‘돈의 확실성’에 대한 신뢰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계층의 변동이 ‘돈만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더구나 그 돈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어질 때 그 변화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진다. 황금 만능주의의 해독과 병폐, 그 가치관이 초래하는 사회 현상의 타락은 오늘날 거의 구조적인 것으로까지 악화되었다. 소설 『남과 북』은 이미 그것을 예진한다. 박한익이 전시의 혼란을 틈타 미곡으로 치부하고 그를 바탕으로 정치적 야심을 품는 것까지는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서태호 변호사는 전쟁 모리배로 활약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정부 강윤정의 육체를 팔기까지 하고 전선에서 도주한 비열한 최완식은 후방의 병참, 헌병 장교로 마구 현금을 거둬들이며 돈으로 강윤정을 사들인다. 작가는 가령 장교가 쌀을 훔치고 계급을 사칭하며 피난선에 사람을 태우기보다 재물을 실으며 시골 여인이 부상병에게 논[畓]물을 팔고 그 부상병들의 인솔 하사관이 여비를 남기기 위해 중도에 환자들을 팽개치고 달아나며 병원장이 의약품을 부정 반출하는 모습들을 묘사하고 마침내 악명 높은 국민 방위군 사건과 같은 부패의 극을 폭로한다. 홍성원이 분노하는 것은 ‘돈에의 신뢰’가 유도한 부정이 이미 개인의 저항으로는 교정될 수 없는 사회악으로 구조화되었다는 점이다. 지성의 결단에 의해 방위군에 자원 입대한 우효중은 “조직적인 불의와의 싸움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절망감”으로 ‘박살’되어 이후의 행동이 완전히 좌절 속에 빠져든다. 사실 그가 매제(妹弟)인 박한익의 재물과 돈을 훔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강윤정이 서태호의 돈을 훔쳐 고아원에 뿌리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만용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들은 황금 만능의 억센 추세에 감상적인 저항을 시도했던 것이다.
돈에 대한 관념이 사회적 가치관을 대표한다면 섹스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 시대의 윤리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남과 북』은 이 성윤리의 파탄에도 조심스런 관심을 보인다. 손정남은 내무서원이었다가 구속된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육체를 바치는 여인과 부닥치며 최선화는 고아처럼 버려진 상태에서 설경민에게 몸을 맡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것은 6·25가 낳은 직접적인 필요악이다. 그러나 전쟁은 나아가 그 숨막히는 절망과 내일을 알 수 없는 허망감으로 하여 섹스에 대한 고착 윤리를 파괴시킨다. 형수와 시동생이란 민관옥과 신동렬간의 금단의 관계는 포탄의 전율 아래 깨지며 색광 증세를 보이는 강윤정의 끊임없는 남성 편력과 섹스에의 탐닉도 결국은 전쟁이란 극한 상황이 촉발시킨 것이다. 그녀의 성적 편력은 “결국 관능은 순간순간으로만 생을 지탱할 뿐 전쟁의 회오리에서 떠도는 그녀를 한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도록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한상혁이 입대하기 전, 설소영의 그의 손을 자기의 국부에 접촉시킴으로써 서로의 소유감을 확인시키는 아름다운 모습과 동질의 심리 반응이다. 『남과 북』에서 빈번히 묘사되는 남녀간의 관능이 서로의 절망적인 호소, 자기 파탄적인 존재 확인의 전율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전쟁이 기존의 엄격한 성도덕을 부숴뜨리는 전조를 시사하는 것이다.
5
전쟁의 무모성과 무의미성, 대상(代償) 없는 희생이 안겨주는 패배감, 무자비한 살육과 궁핍한 삶이 초래한 전율, 혼란과 무기력 속에 파탄되어가는 인간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동반한 사회적 현상과 구조의 변모와 기존 가치 체계의 와해는 한국 전쟁 문학의 주조를 이루어왔다. 이 집요한 수난 의식의 문학, 완고한 피해 심리의 문학은 서두에서 지적한 6·25 콤플렉스의 한 표현이며 그것은 근원적으로 우리 자신의 희생으로 수행된 ‘청부받은 전쟁’ ‘남의 전쟁’이란 관념에서 출발한다. 홍성원이 말하는 “우리는 51프로의 주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판문점 주주 총회에서는 발언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한국 전쟁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것은 이 전쟁에 대한 우리의 책임 회피, 거부 반응의 기초 심리를 만든다. 동아일보의 장편소설 공모에 『디 데이의 병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빙점지대」, 『세대』지 단편 공모에 「기관차와 송아지」 등 6·25의 후유와 군대를 주제로 한 세 장·단편이 한꺼번에 당선함으로써 가장 유력한 전쟁 작가가 된 홍성원의 이 『남과 북』에서도 이러한 피해 의식은 주동기를 이룬다. 무자비한 국제 관계의 역학 속에 빚어진 약소 민족의 일방적인 희생이며 한민족 약 3백만 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한 이 전쟁의 명분을 어떤 이유로도 우리가 수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도처에서 역설하고 있다. 『남과 북』의 커다란 문학적 성과는 이러한 사실들을 구체적인 행동과 증언, 절규와 논리를 통해 형상화시켜주었다는 점이다. 기왕의 전쟁 문학은 이것을 관념적으로 혹은 감각적으로 또는 개인적 차원이나 미시적 관찰로 전달해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남과 북』은 사실의 기록을 픽션화시키고, 픽션을 사실화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6·25를 거시적으로 포착하면서 개개인, 개개 집단의 수난과 변모를 전시한 것이다.
그러나 6·25 콤플렉스의 극복이란 의식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한국 전쟁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가해야 하는 문학적 입장에서 우리가 『남과 북』에 대해 최대의 관심과 평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이 ‘남의 전쟁’을 ‘우리의 전쟁’으로 환치시키려는 작가의 탁월한 착상이다. 이것은 6·25의 궁극적인 책임이 우리에게 귀속되어야 하며 우리가 그 책임을 감당할 때에만 이 전쟁과 그 전쟁의 희생에 의미가 부여되고 이 비극의 주체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주체적 결단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결단은 피해 의식과 도피주의를 거부하고 마치 우리 자신의 결점을 우리 것으로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듯, 민족적 콤플렉스를 극복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홍성원은 『남과 북』에서 가장 지적인 설경민을 통해 이 전쟁의 주체화를 다음 세 차례에 걸쳐 역설한다.
1) 그녀가 생각해온 지금까지의 전쟁은 자기와는 별로 관계 없는 남자들만의 일이었고, 자기는 오로지 전쟁에 휩쓸려든 선량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는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급적 전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전쟁을 자기로부터 엄격하게 분리시켜 가능하면 전쟁과는 어떠한 접촉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생각들을 애인 상혁과 오빠 경민은 정면으로 거부하고 부정했다. 그들은 이 전쟁이 우리들의 삶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을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없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전쟁에 온몸을 던져 참가해야 된다고 했다. (제2권, p. 318)
2) 경민의 손이 효진의 어깨에서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이런 개인적인 운명의 엇갈림도 전쟁 탓으로 돌려야 되나?”
“아뇨. 이건 전쟁 탓이 아니에요. 전 요즘 이 전쟁을 조금씩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 건 이 땅이 전쟁을 필요로 했기 때문인가?”
“그래요! 아무리 괴롭구 참담해두 우린 이 전쟁에서 한 발짝두 도망칠 수 없어요!”
“도망쳐봐야 소용도 없고 도망칠 필요도 없지. 바로 우리가 이 전쟁의 실질적인 주인이니까.” (제5권, pp. 77∼78)
3) 어쩌면 이 새로운 생명은 이 땅에 찾아든 전쟁처럼 운명적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을……’ 하는 것은 비극이 있기 전에나 고려해봄직한 가정사(假定詞)다. 일단 내 앞에 터져버린 비극은 더 이상 남의 것이 아닌 바로 나와 우리들의 비극이다. 그것을 완전한 나의 비극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가정사도 우리 주위에 거느릴 필요가 없다. 비극을 이기는 길은 비극의 본래 논리대로 철저히 비극을 부둥켜안아 비극과 한몸이 되어서만 가능하다. 비극으로부터 눈을 감거나 몸을 뒤로 물렸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남루한 절망뿐이다. 고통이 때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것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진정한 용기와 만났을 때인 것이다. (제5권, p. 99)
1)은 한상혁의 입대를 동의, 격려하면서 동생 소영을 설득하는 이야기이며 2)는 그가 당초에 사랑하던 우효진이 한익과 정혼하고 만났을 때 서로의 못 이룬 사랑을 고백할 적의 결론이며 3)은 양공주로 전락한 최선화가 자기의 아들을 낳고 진철이를 잘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소감이다. 그는 이 세 대목에서 이 전쟁의 소유격을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바꾸어야 할 당위성과 그 실현을 위한 능동적인 ‘참가’를 강조하고 나아가 전쟁의 당위성과 그것과의 정정당당한 대결을 역설하며 마지막으로 비극에의 사랑과 그것을 통한 존재의 가능성을 밝힌다.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amor fati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관련 없이, 그러나 자신에게 떨어진 비극적인 세계를 적극적으로 오히려 수용함으로써 그 비극의 참뜻을 발견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지양하려는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결단이다. 두 다리가 불구가 된 채 신문사에 복직하기 위해 편집국을 찾아온 경민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드러낸 채 우스꽝스럽게 쩔뚝쩔뚝” 걷는 모습은 6·25로 치명타를 입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경민이 “불구의 억압에서 정신을 구하는 길은 정신이 오히려 불구 쪽을 피로하도록 혹사하는 것”이며 “불구를 감추고 수치로 여기는 한 그의 미래는 볼품 사나운 자기 학대와 어둠뿐”임을 각성하고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용기를 떨치고” 회사에 다시 나가는 결단은 우리 민족 전체에 6·25의 상흔과 그 콤플렉스를 극복할 비전을 제시한다.
한국 전쟁이 오늘의 우리에게 거듭 환기 음미 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의 위협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 위협이 상존하게 된 정치적 분위기와 사회 문화적 갈등 그리고 우리 의식의 도피주의와 비겁성의 원인으로서 6·25를 적발하고 그 비판을 통해 현실의 폐쇄성과 부조리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명제 때문이다. 우리는 설경민의 각성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구를 딛고 일어설 용기’를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육체적 불구가 정신의 불구로까지 악화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작가 홍성원이 끝내 낙관적인 현실관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으리라. 그는 자살을 앞둔 우효중으로 하여금 “살 만한 사람은 전쟁중에 다 죽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간들은 죽어야 마땅한 빈 쭉정이 같은 인간들뿐”이란 비탄의 절규를 외치도록 만든다. 작가는 『남과 북』의 로망을 노익의 오발탄에 명중한 한상혁의 “아니야, 아니야”란 수수께끼 같은 신음으로 끝맺는다. 이 두 개의 고통스런 발언은 오늘의 한국이 이 전쟁의 의미화·주체화에 실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콤플렉스를 진정으로 극복하고 개방된 민족적 자아를 획득했다면 이 소설은 한상혁의 마지막 말이 ‘그렇다!’는 감탄사로 바뀌어 대미를 이루었을 것이며 우리는 이 긍정의 결말에 유쾌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성원은 결코 그 같은 안이한 현실 만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해설 2]
주체 찾기의 모험과 그 의미
―개작된 『남과 북』에 부쳐
권오룡
이제 우리가 6·25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분명 세상은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6·25를 회상한다는 것은 많은 모험을 필요로 한다. 아니, 이 모험의 필요는 오늘의 시점에서 비로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홍성원의 『남과 북』이 처음 씌어졌던 그 시점에도 그것은 모험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모험에는 두려움까지가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두려움은 섞이지 않아도 되게끔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모험뿐이다. 어떤 모험인가?
우선 그것은 망각을 이겨내는 모험일 것이다. 이제 6·25는 거의 잊혀진 사건으로 화석화되어버렸다. 아니, 잊혀졌다기보다 잊혀지기를 요구받고 있는 사건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남과 북』을 새로 읽고 있는 동안 남북 정상 회담이 준비되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소식이 보도되었지만, 그 준비 절차나 정상 회담의 의제에 6·25에 대한 책임 규명이나 사죄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도 모처럼 조성된 화해 무드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식의 조심스러움 때문이겠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러한 하나의 사례를 통해 보더라도 이제 6·25는 차라리 잊혀지는 편이 더 나은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라는 판단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일어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그러니까 불과 반세기 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수백만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치유할 수 없는 불구의 처지로 몰아넣은 미증유의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재편성을 강요한 대격변의 진원이었다. 또한 국제적 맥락에서 그것은 냉전 체제의 구도를 결정짓고, 이 속에서의 열강의 반열을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 사건 자체의 엄청난 비극성은 세월의 희석 효과에 의해 기억의 망막에서 가물가물해지게 되었고, 그 의미의 중요성 또한 이념적 가치의 상실에 휩쓸려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실과 이에 대한 질감은 불과 반세기 전의 그것들과의 비교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 차이는 상상적 체험의 가능성마저도 봉쇄해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더하여 동구권의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대변되는 사회주의의 몰락, 그리고 이에서 비롯된 이념적 가치의 상실이라는 세계사적 변화는, 이념적 적대성만을 이유로 하여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토록 격렬하고도 처참한 전쟁이 치러질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의아한 것으로 만든다. 이런 모든 변화와 차이와 이질성이 6·25를 잊혀진 것으로 만든다. 아니,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6·25를 무의미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6·25는 잊혀져가고 있고 잊혀지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6·25를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망각의 늪으로부터 사실 자체를 건져올리는 일이고, 추상화의 유혹에 맞서 그 구체성의 질감을 회복시키는 작업에 다름아니다. 역사와 사실의 착잡한 상충이 빚어내는 긴장 앞에서의 문학적 당위성 위에 우뚝하게 세워진 소설, 바로 이것이 홍성원의 『남과 북』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이러한 모험으로서의 성격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새롭게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라기보다 벌써 30년 전인 그 탄생의 시점에서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이미 그 시점에서조차도 6·25는 잊혀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도 6·25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 시절을 잠깐 회상해보자. 『남과 북』이 처음 『6·25』라는 제목으로 『세대』지에 연재되었던 것은 1970년 9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장장 5년 2개월의 오랜 기간에 걸쳐서였다. 원고지로 따져 무려 만 매의 분량에 육박하는 이 대작에 대해 작가는 그것이 4년 남짓한 준비 기간을 통해 가다듬어진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구체적인 구상과 준비와 집필에 소요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 뿐, 필시 그것은 작가가 중학교 1학년 때 수원에서 맞았던 6·25의 체험 이후 줄곧 그의 뇌리 속에서 숙성되어왔던 것일 터이다. 홍성원에게 있어 6·25는 근원 체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6·25라는 사건이 이렇게 20년 동안이나 작가의 의식의 내벽에 들러붙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20년의 기간 동안 한국 사회는, 조금 막연한 용어이기는 하나, ‘전후(戰後)’라 이름지을 수 있을 그런 일상의 세태와 분위기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못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헐렁한 소매 끝에 둥그런 쇠갈고리를 삐쭉 내밀었거나 목발을 짚은 사내들이 별 긴요하달 것도 없는 물건들을 강매하다 행패를 부리곤 하는 모습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상의 풍속화였다. 미군 부대 앞에서는 아직도 야하게 화장한 여인들이 미군들과 흥정을 벌이고 있었고, 못된 병에 걸린 미군 병사들이 엉덩이를 엉거주춤 뒤로 뺀 자세로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곤 했었다. 속칭 양키 시장에서는 아직도 단속의 눈길을 피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비누며, 치약이며, 담배 등속의 물건들이 암거래되고 있었고, 6·25 때 익힌 군수 물자 빼돌리기는 월남전에 파병된 병사들을 담보로 하여 여전히 기승을 떨고 있었다. 미국은 한 점 의혹의 여지 없이 우리의 변함없는 혈맹이었고, 반공은 여전히 국시(國是)의 첫번째로 꼽히고 있었다. 때맞춰 간간이 북한이 일으켜준 무장 공비 남파 사건이나 노동당 간부의 위장 귀순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북한의 집요한 대남 적화 야욕에 치를 떨게 만들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70년대 유신(維新)의 음모는 무르익어갈 수 있었다.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60년대말에서 70년대초에 이르기까지의 풍속과 의식의 단면들을 재현해본 것은 아마도 새로이 『남과 북』을 읽을 독자들의 대부분이 6·25는 물론이고 60년대나 70년대초의 분위기를 체험해보지 못한 세대들일 것으로 짐작되어 그들의 이해를 도와줄 필요가 있으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지만, 그러나 이들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어쩌면 변함없는 전후의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6·25가 그렇게 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약간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일부러 ‘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조금 막연하게 서술한 것에 대해서조차도 ‘그렇지 않았다’고 반박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었고, 매년 되풀이 나붙곤 하던 6·25 포스터를 통해 ‘상기하자 6·25’라는 구호가 사람들을 세뇌시킬 지경이었던 실정에 비추어볼 때, 6·25가 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진술은 실상과 거리가 먼, 잘못된 이해라는 지적을 받아 마땅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6·25는 그렇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의미나 내용은 북한에 대한,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거부감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입된 감정 앞에서의 자동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그 굳어버린, 비자발적인 집단 감정에 휩쓸려 있는 상태에서 과연 어떤 생생한 실감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인가.
문학에 있어서도 사정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작가가 이번의 개작에 즈음하여 붙인 「보완과 개작에 대한 해명」이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 “당시 허용되던 북한에 대한 표현의 상한선은 ‘감상적인 민족주의 언저리거나 당국에 의해 철저히 도식화된 반공 가이드라인 내’로 제한되어 있었다.” 서슬 시퍼렇던 반공 이데올로기는 문학까지도 자동 인형이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민족 최대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로망화(化)의 작업에 당연히 요구되는 총체적 인식의 지평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6·25는 잊혀진 전쟁이었다. 일상의 수준에는 그 흔적과 상처들이 여전히 남아 있되, 인식의 수준에서는 접근이 가로막혀 있었던 사건, 바로 이것이 6·25였다. 6·25에 대한 서사의 작업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이것이었으리라.
『남과 북』은 바로 이렇게 얼어붙은 동토를 뚫고 나온 새싹이었다. 그것은 굳을 대로 굳어버린 상황과 의식에 미세하지만 깊은 균열을 일으키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 삼엄한 상황에 대한, 거의 만용에 가까운 도전의 모험이기도 했다. 그 모험에 따르는 위험 부담의 정도를 오늘의 촉각으로 감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작가의 회고를 인용하면 “‘루카치’를 귓속말로 소곤소곤 말해야 하고 『자본론』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반공법에 저촉되던 당시의 냉엄한 상황에서 공평한 시각과 우리의 눈 높이로 북한을 그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위험 부담은 정치적 차원의 것만이 아니라 문학적 차원의 것이기도 했다. 북한과 공산주의를 다루면서도 그것은 반공법의 물샐틈없는 그물망을 벗어날 수 있어야 했고, 문학 작품으로서 그것은 한낱 반공 선전물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 감상주의나 관념주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일 터이다.
이 모든 요구는 그러나 바깥으로부터 강제되는 것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6·25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데올로기적 장벽이나 제도적 장벽, 혹은 작가 스스로의 문학적 검열이 아니더라도 6·25는 그 자체가 이미 이러한 인식론적 장벽을 내포하고 있는 사건이었다. 뻔한 사실을 거듭 되풀이하여 말하면 6·25는 우리 민족이 역사상 겪었던 가장 참혹한 비극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 민족을 둘로 쪼개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남과 북』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설경민이 가장 먼저 품게 되는 의구심은 이 동족 상잔의 전쟁이 “이 나라의 오랜 일체감에 과연 어떻게 작용할까” 하는 것이었다. 이 짧지만 불길한 예감을 통해 『남과 북』은 6·25의 민족사적 의미의 핵심을 짚어낸다. 과연 설경민의 우려대로 6·25는 결국 한반도에서 민족이라는 주체가 성립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동족간의 전쟁이기에 그것은 더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죽느냐, 죽이느냐의 원색적인 선택의 갈래밖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판단 방식도 주어지지 않는 전쟁 상황 속에서 같은 민족이라고 하는 점이 조금도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 작가는 “같은 언어와 동질의 감정이란 전쟁 마당에는 별로 이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잡하게 야합하고 배반하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이해보다는 좀더 무서운 오해와 증오심을 키울 뿐이다”라고 갈파한다. 작가의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는 6·25가 같은 민족간의 전쟁이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오히려 분열과 반목의 골이 더욱 깊어졌을 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역설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의 당연한 귀결로 6·25 이후로는 한반도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형태의 삶이나 사유도 민족을 주체로 내세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 굳이 민족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반쪽짜리 민족, 불구의 민족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가 흔히 우익 이데올로기의 온상이 되어왔던 것은 이러한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게 6·25는 우리에게서 민족이라는 단일한 주체를 앗아가버린 사건이었다. 이것은 문학에 있어 6·25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가로막아왔던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6·25나 전후의 현실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흔히 감상주의나 관념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사정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가령 이러한 계열의 50년대적 수작(秀作)으로 꼽을 수 있는 안수길의 「제3인간형」이나 이범선의 「오발탄」, 손창섭의 「잉여 인간」 같은 작품들이 그 절박한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바탕에 일말의 감상주의를 깔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사로잡고 있는 피해자 의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결코 자신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만 전쟁의 피해자이기만 할 뿐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들이 전쟁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이 간단한 이유만으로 그들은 오직 피해자 의식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또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이나 최인훈의 『광장』이 드러내 보이는 관념주의의 근원도 같은 요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25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념 대립의 대리 전쟁이었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의 뿌리를 찾는 고된 원형(圓形)의 탐색을 거친다고 해서 그 주체가 찾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념 자체가 주체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념의 가치는 그것을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육화해낼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할 때, 이를 전제로 삼아 찾아질 수 있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념의 허울을 벗어던졌을 때 이제 남한에서든 북한에서든 그 어디에서도 자신이 삶의 주체, 사유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절망, 아마도 『광장』의 이명준으로 하여금 중립국을 선택하게 했다가 종국에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폭력적 힘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그러므로 6·25에 대한 문학적 서사의 작업은 우선 6·25의 주체를 ‘우리’로 설정하는 과제의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6·25가 ‘대리 전쟁’이나 ‘주어진 전쟁’이 아니고, 어쨌든 ‘우리’ 땅에서 ‘우리’가 일으켜 ‘우리’가 치른 전쟁이라는 것을 널리 인정받을 수 있는 사실로 수립해내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우리’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남한과 북한이 다 포함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과 북』이 처음 씌어진 7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요구가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남한과 북한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관한 작가의 고백에 귀기울여보도록 하자.
공평한 표현이 허용되지 않을 바에야 다음날을 기약하고 북한 쪽 이야기를 유보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에서 전쟁의 절반을 담당한 북한 쪽 이야기를 빼버린다는 것은, 표현상의 불평등 못지않게 공평하지 못한 일이다.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며 3년 동안이나 계속된 전쟁을,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얼어붙은 냉전 체제 속에서는 ‘한국 전쟁’을 제대로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남과 북』 역시 그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보완과 개작에 대한 해명」)
『남과 북』의 보완과 개작(改作)의 필요는 이러한 사정에서 연유한다. 오늘의 시점에 『남과 북』이 개작의 과정을 거쳐 다시 발표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처음 씌어질 때의 사정은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 표현의 족쇄였던 냉전 체제도 허물어지고, 또 비록 남과 북의 대립은 상존한다 하더라도 그 대립의 양상과 내용에 있어서는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인 오늘의 시점에서 『남과 북』은 당연히 다시 씌어지고 새롭게 발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편의 대하소설로서의 『남과 북』에 요구되는 이러한 사항은 또한 작가로서의 책무이기도 했던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제 『남과 북』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극적 체험을 사실적으로 재생시킨다는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넓은 지평으로 독자들을 이끌어가고자 한다. 이에 따라 우리가 『남과 북』을 읽는다는 행위에 수반되는 모험도 체험과 인식이라는 이중적인 지평 위에서 펼쳐지기를 요구받게 된다. 아마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거대 서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꼽히는 총체성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이러한 요구에 따라 개작의 주된 초점은 원작이 불가피한 한계로 지닐 수밖에 없었던 남·북한간의 기울기의 불균형을 조정하는 것에 모아지게 된다. 물론 표현이나 용어의 수정, 부분적인 첨삭의 작업도 포함되어 있고, 이것에 투입되었을 작가의 공력(功力)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는 일이지만, 작가 스스로가 『남과 북』의 ‘미완의 한계’로 여기고 있었던 부분에 대한 보완이라는 의미에서의 비중은 단연 이러한 사항에 놓이게 된다.
실제에 있어 이 조정의 작업은 문정길이라는 인물을 새로 만들어 그의 행적을 통해 전쟁을 일으킨 북한 쪽에 가담했던 인물의 정신의 지형도를 그려 보여주는 것과, 애당초 원작에서는 집안과 동생에 대한 복수심에만 불타는 포악한 인물로만 그려졌던 신학렬에 대해 인민군 중좌로서의 계급에 걸맞은 면모를 부여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져 있다.
문정길은 어떤 인물인가? 작가는 이 인물에 대해 “일본에서 공과대학을 나온 인텔리”로서 신학렬이 주도했던 ‘북두성’이라는 비밀 학습 조직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경제와 철학, 사회주의 이론에도 전문가 못지않게 공부가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소개보다 그의 인물됨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한 전투 장면에서의 그의 모습이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도록 하자.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문정길은 왈칵 앞으로 고꾸라진다. 능선의 안부(鞍部)로 날아온 적의 직격 포탄이다. 아마 지금의 포격은 적 전차대의 직사포일 것이다. 〔……〕 전차대는 포격과 함께 기총까지 퍼붓고 있다. 몸을 굽히고 후사면을 내달리며, 문정길 전사는 자신도 모르게 핑 하게 눈물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다. 적에게 등을 보인 채 살길을 찾아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다. 이것이 당(黨)에 맹세한 혁명 전사의 올바른 행동인가? 지금의 이 비열한 행동을 너는 장차 당 앞에서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너에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가 있다. 소좌에서 전사(戰士)로 8등이나 강등된 죄인이다. 그러나 너는 그것도 모자라 또다시 당과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네가 추구해온 혁명 정신의 고결한 이상이며 가치인가? 이 추악한 너의 뒷모습이 지금껏 감추어진 네 본래의 참모습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아니다! 너는 어느새 부끄러움을 잃고 있다. 너는 지금 무엇을 구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처럼 삶을 찾아 달리는가?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이 수치스런 오욕의 삶이, 바로 네가 지금껏 추구해온 사회주의 혁명 전사의 삶인가?
갑자기 달리기를 멈추고 문정길은 망연히 고지 쪽을 올려다본다. 포연 자욱한 고지에는 여전히 단 한 명의 병사도 보이지 않는다. 머뭇거리던 문전사가 이윽고 다시 비탈을 오르기 시작한다. 죽자. 이곳이 바로 내가 찾던 죽음의 장소다. 이 작은 고지 위에 혁명을 위한 한줌의 흙으로 산화하자. 장렬하고 위대한 죽음만이 혁명을 위한 죽음은 아니다. 이 쓸쓸하고 외진 죽음도 혁명에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이 무명의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혁명 전사가 기꺼이 선택하는 죽음이다. 오욕과 후회의 비열한 삶보다 이 작은 무명의 죽음은 얼마나 단출하고 가벼운가? (제3권, pp. 393∼94)
혁명의 이상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죽음을 “오욕과 후회의 비열한 삶”과 맞바꾸고자 하는 문정길의 이러한 결연한 자세를 통해 우리는 6·25라는 전쟁에 대한 북한측의 명분, 즉 “자본주의 압제로부터 인민을 해방하여 사회주의 조국 통일을 완수”하고자 한다는 명분을 진실로 확신하고 그 사명감에 따라 전쟁에 임한 북한 쪽 지식인의 진정성의 일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정길과 함께 새로 등장한 인물인 조명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느 남한 쪽 여자 인물들과 다르지 않게 젊고 아름다우며 사랑의 정열을 간직한 인간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산당 활동으로 인해 온 가족이 처형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엄격하고 꿋꿋하게 오직 당의 명령에만 따라 충실히 일하는 그녀의 자세를 통해서도 우리는 사회주의의 이상에 존재 전부를 걸었던 한 인물의 진정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신학렬이라는 인물의 변모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앞서도 간략히 언급했듯 작가는 신학렬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원작에서 부여했던 것과는 크게 다른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개작을 통해 작가는 신학렬을 포악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나름대로 철저한 사상적 무장을 갖추고 자신의 확신에 따라 혁명 과업을 충실하고 용감하게 수행하는 인물로 새롭게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문정길은 물론이려니와 신학렬 또한 매우 밀도 높은 지적 성격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신학렬의 이러한 지적 성격, 사상의 투철함과 용감함은 그가 단독으로 반공 포로들의 막사인 이른바 ‘백색 막사’를 찾아가 벌이는 사상 토론이나 수용소 내의 병원에서 군의관을 상대로 벌이는 사상 토론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러한 보완과 개작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는 이러한 보완과 개작의 내용을 통해 6·25라는 전쟁이 5, 60년대 반공 포스터에 흔히 그려지곤 했던 것과 같은, 온몸에 검은 털이 돋고 눈알과 혓바닥이 시뻘건 괴물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수정과 보완을 통해 6·25가, 비록 선택된 사상은 우리의 것과 다르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선택한 사상과 그것이 요구하는 행동에 대해 확신을 갖고 또한 나름대로 충실하게 그것을 수행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일으켜진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한다.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면, 이로써 6·25는 ‘대리 전쟁’이나 ‘주어진 전쟁’이라는 수치스러운 의미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로써, 왜 싸워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조차 모르면서도 영웅적으로 싸우다 죽어간 숱한 사람들, 가령 손정남, 변칠두, 오영탁, 모희규와 같은 인물들, 그리고 이들처럼 싸우다 죽은 사람은 아니지만 설규헌, 우동준, 신동렬, 우효중, 한상혁, 최선화 같은 인물들의 죽음도, 여전히 ‘동의할 수 없는 죽음들’이라는 안타까움을 떨쳐버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무의미한 죽음이라는 어두운 굴레에서는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개작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작가가 암시적으로 열어놓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정길의 손에 죽기를 원하는 ‘은퇴한 목사 출신’의 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전달된다.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죽는 사람의 마지막 부탁이외다.”
“무슨 부탁이십니까? 말씀하십시오.”
“당신 손에 죽고 싶소. 당신이 나를 처형해주시오.”
“규정에 어긋납니다. 나는 형 집행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이렇게 특별히 부탁하는 거요. 나는 학살당하고 싶지 않소. 당신 같은 이상주의자의 손에 역사의 희생자로 죽고 싶소.”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노인의 눈빛은 침착하고 강렬했다. 여러 의미가 함축된 그 눈빛에서 문정길은 문득 도전의 뜻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인은 그를 시험하려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 당신의 이상이라면 그 이상을 위해 당신 손으로 사람을 한번 죽여보라는 뜻이었다. (제2권, pp. 222∼23)
삶이 고귀한 것이라면 죽음 또한 고귀한 것이어야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만큼 허망한 죽음은 없다. 작가가 두 눈과 두 다리를 잃은 손정남 대위의 입을 빌려 말하듯 “사람이 무언가에 목숨을 던질 때는 목숨을 내던져도 좋은 논리적인 이유나 목표가 있는 법”이다. 『남과 북』에서 거의 모든 인물들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이 하나같이 ‘동의할 수 없는 죽음’인 것은, 죽어가는 본인들이나 그 죽음을 지켜보는 우리들이 똑같이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비해 문정길의 손에 죽기를 원하는 이 노인은 문정길이 품고 있는 사회주의적 이상에서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고자 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죽음에 최소한의 품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 노인은 문정길의 이상에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만한 가치를 역사의 내기로 걸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노인은 죽지만, 그러나 바라던 대로 문정길의 손에 의해 처형됨으로써 학살의 오명으로부터는 벗어난다. 물론 이것은 『남과 북』에서 간단없이 속출하는 숱한 죽음들 가운데 하나의 경우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 노인이 맞는 죽음의 모습을, 예컨대 북한으로 끌려가다가 이름 모를 어느 개울가에서 누가 쏘는 것인지도 모르는 총질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 설규헌 박사의 죽음과 대조해볼 때 그 의미의 차이는 매우 또렷하게 부각되어온다.
그렇다. 같은 죽음이라도 그것이 최소한의 인격적인 위엄을 갖출 수 있는 것일 때 그것은 무의미의 암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때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인정과 신뢰를 그 배면(背面)의 원리로 간직한 상태에서 담담히 맞을 수 있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노인과 문정길 사이의 일화는 각기 나름대로 선택한 이념이나 원리에 대한 성실함과 고집을 지니고 있는 두 ‘인간’이 바로 그 이념과 원리의 궁극적 진실에 대한 믿음을 놓고 벌이는 한판 대결의 의미로 요약될 수 있다. 이때 대립되는 것은 이념만도 아니고 문정길과 한 ‘고집스러운’ 노인이라는 두 개인도 아니다. 이 대립의 짝을 이루는 것은 인간과 이념이 충실성을 연결고리로 삼아 결합된 ‘인간―이념’이라는 주체인 것이다.
문정길이라는 한 사회주의 지식인의 모습을 새롭게 창출하고, 또 그로 하여금 6·25라는 전쟁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들을 직접 만들어내도록 함으로써 작가는 어렵사리 ‘인간―이념’이라는 6·25의 주체를 찾아내기에 성공한다. 그러므로 문정길에 의해 구제되는 것은 한 개인만의 죽음의 의미가 아니다. 문정길이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와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자로서의 성격, 그리고 그의 인간적 위엄의 면모는 그러한 죽음들을 몰고 온 전쟁 자체의 최소한의 명분과 이유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힘겨운 설득을 위한 장치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일 터이다. 문정길과 노인 사이에 삶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 그리고 전쟁의 의미를 놓고 벌어졌던 그 대결이 집단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것, 바로 이것을 홍성원은 6·25의 구도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인간―이념’이라는 주체의 발견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것의 의미는 단순히 6·25를 이념의 대리 전쟁이었다는 치욕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념의 대립이라는 것 자체의 의미가 희미해진 오늘의 시점에서 6·25까지가 무의미해지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6·25로 인해 우리가 겪었던 모든 비극적 체험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 그것은 이념의 대립성을 인간의 차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진정한 민족적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
제3장
제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