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이 책은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오생근의 세번째 문학 평론집으로서, 그의 문학적 세계관이 넓은 영역으로 펼쳐져 있는, 오랜만에 출간된 저서이다. 그의 따뜻한, 문학의 참다운 의미를 역설하는, 그런 저자의 신념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
흐린 하늘에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보스턴에서 어느 날 아침 이 글을 쓴다. 지난해 7월 하순경, 1년 예정으로 이곳에 왔는데 어느새 반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10월 9일 오하이오의 데이튼 한인회에서는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톨레도의 마종기 시인을 초청하여 문학의 밤 행사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마종기의 시와 한국 문학’이란 제목으로 외국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의 의미와 성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외국에서 모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모국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모국어는 물론 어머니의 언어를 뜻한다. 모국어가 어머니의 언어라면 이국의 땅에서 지배적으로 쓰여지는 외국어는 아버지의 언어일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적 논리를 따르자면, 아버지의 언어는 권위와 규율의 언어이고 법과 질서의 언어이다. 그것은 또한 현실과 필요, 이성과 당위의 모든 논리를 앞세우는 억압적 사회의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될 수 있는 세계의 질서에 따라 우리의 욕망을 수정하고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자유롭고 행복했던 모성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의 내면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억압이 없고, 갈등이 없는 어떤 통일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꿈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모성적 세계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런 점에서 시인의 마음이고, 어머니의 언어는 바로 시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아버지의 세계에서 어머니의 언어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억압적이고 비인간적 규율의 세계에서 자유롭고 진정한 것, 인간적인 것을 꿈꾸고 그리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그리움으로 짓는 언어의 집이다. 그리움의 언어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영혼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는 넓은 시각을 갖고, 비인간적 질서를 부정하는 자유로운 정신의 힘을 보여주는 언어이다. 새로운 세기의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역할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인식될지 모르지만, 이런 때일수록 문학의 참된 가치와 의미가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문학은 인간적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게 해주며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근원적 힘에 떠밀려 문학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리움은 결국 황량한 현실에서 꿈꾸는 자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또한 이따금 소리없이 이 땅에 내려와 세상의 혼돈과 삭막함을 덮어주고 감싸안는 저 흰 눈과 같다.
2000년 1월, 보스턴에서 오생근
[차례]
책머리에
제1부 현대성과 문학적 인식
집과 시적 상상력
육체의 시대와 육체의 시학
현대성의 경험과 시적 인식: 보들레르, 김수영, 김광규의 경우
한국 문학의 네 얼굴: 60년대 시로부터 80년대 소설까지
제2부 그리움과 시적 상상력
노시인의 젊고 명증한 정신: 김춘수의 시세계
숨결과 웃음의 시학: 정현종의 시세계
한 자유주의자의 떠남과 돌아옴: 마종기의 시세계
그리움의 시와 마음의 시학: 이태수의 시세계
황지우의 시적 변모와 ‘삶’을 껴안는 방법: 황지우의 시세계
슬픔의 토양에서 피어난 꽃잎: 박라연의 시세계
현대 문명의 위기와 생명의 시: 유진택의 시세계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 이경임의 시세계
제3부 한국 소설과 현실 인식
『화두』와 기억의 소설적 형식: 최인훈론
분단 문학의 확장과 현실 인식의 심화: 김원일론
새로운 삶의 발견과 새로운 글쓰기:한수산론
폭력의 시대와 생명의 존엄성: 정찬론
‘꿈꾸는 삶’과 비극적 인식: 김병언론
제4부 문학 비평과 문학 이론
문학의 자유와 문학 이론의 원칙
바람과 그리움의 집짓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비평
문학 제도의 시각과 사회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