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딸기밭』은 작가로서의 원숙함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어우러진 뛰어난 작품들을 모은 책으로, 신경숙 소설 세계의 첫번째 전기(轉機)를 알리는 획기적인 작품집이다. 삶의 섬세한 세목들과 인간 내면의 드라마틱한 박동을 세밀한 문체로 그려왔던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거기에다 존재의 고뇌와 육체적 감각의 활달함을 더 보탠다. 시간의 유한함과 닳아가는 공간에 대한 흐릿한 기억이 삶의 깊은 슬픔을 관통하며, 명도가 선명한 사건들의 대비가 사랑과 죽음과 청춘의 심연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말]
지난 96년에 『오래 전 집을 떠날 때』가 출간되었으니 근 오 년 만에 새 소설집을 묶는다. 중·단편집으로는 네번째다. 통상 단편 여럿에 중편 한두 편인데 이번엔 거꾸로 중편 네 편에 단편 한 편이 섞인 모양새가 되었다. 읽기에 즐거울까 싶어 짧은 글도 한 편 넣어봤다. 교정을 보는 동안 내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두 겹의 삶」 사운드 트랙을 반복해서 들었다. 하도 듣다 보니 이 소설집 제목을 ‘두 겹의 삶’으로 할까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체질 탓이겠지만 내겐 작품을 쓰고 나면 그 작품과 헤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앞작품과 제대로 헤어지지 못하면 뒷작품에 잔상이 따라붙어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새삼 뒤돌아보니 공식적으로 소설 쓰기를 시작한 지가 어느덧 십오 년이 되었고, 소설을 쓰고 헤어지고 또 쓰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덧없이 청춘이 가버렸다. 내 앞에 다른 삶이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니 이와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되어 어느 날은 ‘덧없이 내 생이 다 가버렸다’고 쓸 날도 올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상황에서나 작가로서 내가 글쓰기를 통해 얻어내고 싶은 것은 자유였을 것이다. 다가갈 수 없는 것이, 혹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언어의 세계를 탐식하고, 그것에 마음을 붙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 소설이 혹 아름답다면 그건 내가 아름답지 않아서이고, 내 소설이 혹 불온하다면 그건 내가 불온하지 못해서이며, 내 소설이 혹 그로테스크하다면 그건 내가 그로테스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움이나 관능, 폭력 또한 그러하며 혹 내 소설이 사랑스럽다면 그것 또한 내가 사랑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실이나 결핍 부재들은 소설 속에서는 외려 다정한 손이 되는 법이다. 가능한 한 수많은 긴 손가락들이 내게서 뻗어나가 인간의 영역을 확장시키거나 존재의 텅 빈 심연 한켠을 채워준다면 작가로서 보람이겠다.
뜻하지 않게 내 소설이 읽는 사람의 더께 진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한다. 故 안승준씨 가족에게, H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제는 내 생일이었다. 서로 만날 핑곗거릴 찾다가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이런저런 담소중에 늦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드라마나 뉴스 같은 데서 아이들에 대한 험한 얘기가 나오면 마음이 너무 아파.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어도 아이 울음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 방문을 열어보면 잘 자고 있는데도 말이야.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오며 그 친구가 이번 내 소설집은 읽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장 최근에 쓴 소설 속의 어린애는 면역 결핍 체질이라는 병과 날개를 동시에 지니고 태어나 일곱 달 만에 죽은 아이로 등장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서로 타인이 되어버린 부모를 만나러 눈보라를 뚫고 온다. 살아 있는 자의 모래펄에 보이지 않는 체온을 불어넣어주자는 의도였으나 내 말 좀 하자고 어린애를 죽였구나…… 싶은 게 마음이 저릿했다. 언젠가는 그러지 않고도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감식안이 내게 깃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책이 나올 때쯤은 봄이 와 있겠다. 첫 책을 기다리고 있던 때처럼 수줍어지고 설렌다. 그때 십일월에 첫 책이 나왔다는 전화를 받고 출판사로 뛰어가서 보니 맨발이었다. 두 권을 받아와 머리에 베고 자는데 새 책 냄새가 밤새 코끝에 머물렀다. 자다가 깨서 다시 펼쳐보고 또 깨서 다시 펼쳐보고 했었지. 그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하긴 달라진 것도 없다. 여전히 사랑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나 뜻대로 되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려고 마음먹으나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을 뿐. 그 뜻대로 되지 않음이 이 소설들을 낳았을 것이다.
2000년 2월, 신경숙 씀
[해설]
존재의 괴리, 그 슬픈 아름다움: 신경숙의 최근 소설들(김병익 문학평론가)
존재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죽음을 다른 존재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어쩌면 단 한 사람에게만. (p. 230)
「그는 언제 오는가」의 앞부분에서 나는 이 잠언과 같은, 독립된 한 문단과 부닥친다. 앞뒤와의 맥락 없이, 그리고 하나의 문장과 불완전한 두 개의 절로 이루어진 문장 외에는 어떤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끼여드는 이 문단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아무런 구체적인 정보를 갖지 못한 나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에 닥친 한 존재는 자신의 종말을 다른 존재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어떤 누구의 단 한 사람에게라도, 아니, 그 단 한 사람에게만! 되풀이 읽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여전히 비의 속에 갇혀 있지만, 그렇다 해도, 아니 그럼으로써, 그 구절은 내게 당혹을 넘어, 전율로 다가온다. 존재하는 것의 운명과 그 운명의 고독한 아우성의 느닷없는 출현이듯이, 이 짤막한 경구는 일상의 타성에 무딜 대로 무뎌진 내게 문득, 비수를 들이대며 서늘한 섬광을 뿌리는 것이다. 그 에는 듯한 섬광에 기가 질린 나는 어디서부터 그 비수가 뽑혀져 있었는지 좀더 그 앞으로 재우쳐 돌아가본다. 그리고 아직 그 구체적인 형체를 드러내지 않은, 그러나 무언가 살벌한 예징을 보여주는 듯한, 이런 아름답고도 슬픈 구절에 내 눈이 멈춘다.
세계는 여기저기 틈이 벌어져 있고 그 벌어진 틈으로 버스가 추락하기도 하고 잉태된 아이가 태어나기도 사산되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아름다운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p. 230)
세상은 평온하고 전과 다름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먹질로 위협하듯, 신경숙은 세상의 감추어진 틈새와 그 틈새 속에 아가리를 벌리고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을 삼켜대는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운명을 떠올려주면서, 태평한 세상을 즐겁게 살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안도감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처형과 제부가 느닷없이 남대천으로 차를 몰고 가는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그러나 그녀의 점지가 결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진다. 그녀와 그녀의 동생 두 자매는, 부모가 곱게 치장하고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버스의 충돌 사고로 일거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소녀 시절에 이미 고아들이 되었고, 동생의 남편인 제부의 부모도 시골 누이 집에서 연탄 가스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버렸다. 만년 조역인 연극 배우, 동생 미란은 세 번이나 유산을 했고, 그리고 그녀는 여느 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웃고 말하던 천연스러운 하룻밤 사이에, 자살하고 말았다. 그녀가 왜 자살을 했는지, 3년 후에 발견된 그녀의 노트에서 그녀가 폐암의 진단을 받았다는 기록이 발견되긴 하지만, 자살의 동기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장례를 치르면서도, 그녀가 그의 사랑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며 구혼하여 결혼한 제부도, 그녀의 유일한 혈육으로 그녀와 함께 살며 그녀의 곳곳을 알고 있을 언니도, 그 의문을 풀 수 없었다. 그것은 전혀 예고되지 않은, 돌연한 것이었다. 그래, 세계는 여기저기 틈을 벌려놓고 예고 없이, 천진한 생명들을 문득 삼켜버리는 “너무나 무질서”(p. 245)한 것이었다. 동생의 돌연한 죽음으로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세계는 무질서하다는 언니의 생각은 정신과 의사로부터 지금 마음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으면서, 이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불신과 위기감으로 발전한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지금 내 눈앞에 선생님이 있다는 것도. 여기저기 블랙 홀이 있는데 지금 다만 나는 그 블랙 홀을 밟고 있지 않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날인가는 밟게 되겠죠. 그러면 나는 어디로 빠져들까, 하는 생각. (p. 246)
그렇다면, 그녀가 느끼는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아름다운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은? 그래, 세상이 여기저기 블랙 홀로 틈을 벌리고 있고, 거기서 운명의 잔인한 함몰이 계속되고 있지만,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아름답다는 그녀의 사유는 의외의 것이면서도 동어 반복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당연한 구절은 비극적인 세계상과 대조되어, 더욱 처절하고 엄숙하게 다가온다. 일상의 안녕을 덮고, 이 세계의 틈새도 덮고, 무념히, 영원에서 영원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시간의 그 무구한 존재성은 불안과 위기의 세상과 그 존재들 위로 얼마나 삼엄하게 펼쳐지고 있는가. 그래서,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는 사실은 더 아프게, 존재의 허망함을 일깨운다. 그래서 그것들은 아름다운가? 그래, 아름다운 것은 시간의 흐름처럼, 변함없이 아름답다. 존재가 아름답고 그것의 시간과의 균열이 아름답고 여기저기 그 균열들을 품고 있는 세계가 아름답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구릉을 따라 차갑게 출렁거리고 그 빛 속으로 새들이 곡선을 그리며 사라지는 풍경 속에 “여기저기 틈이 벌어져” 존재의 운명을 함몰시키는 세계의 잔인성이 숨어 있기에 세상은 “서늘한 아름다움”(p. 230)으로 빛난다.
신경숙의 근래의 소설들은 바로 이,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고 거기에 함몰되어야 하는 존재의 비운을 보여주며, 그것들을 슬픈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게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그녀가 30대 전반에 쓴 『오래 전 집을 떠날 때』의 신경숙과는 얼마쯤은 다른 세계이다. 아니, 다르다기보다는, 보다 깊어지고 넓어진, 그래서 보편적이고, 어쩌면 신경숙의 것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상과 인간을 향해 열려진 시선을 보여준다. 몇 해 전만 해도, 그녀는 비어 있는 방 혹은 집 또는 마당이나 황폐한 들판을 찾아다녔고, 거기에 살았던 사람·물건·가구·건물·나무와 물·풀과 돌 들의 사연들을 모았다. 그래서 그의 그 소설들은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상이고 추념이며, 자잘하고 정겨운 것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고, 그 문체는 내성적이고 에세이풍이서, 서사적이기보다 정감적인 것이었고 재현적이기보다는 자전적이었다. 대화도 인용 부호를 없앰으로써 타자와 외부를 자신의 안으로 내면화하는 것이었고, 그 시점은 그든 누구든 타인의 인칭을 쓰고 있음에도 1인칭 화자의 것이었다. 이 모두는 그녀에게 “부재를 견디기 위한 글쓰기”(『오래 전 집을 떠날 때』, p. 208)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부재는 비어 있는 방에서의 사념을 불러오는 것이고, 떠나버린 것에 대한 정서적 환기였으며,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예감하는 것이고, 그래서 환상과 실재가 뒤섞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부재의 공간 속에서, 그 부재를 ‘견디’며, 글쓰기로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서너 해 후의 그녀는 어느 사이에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대화의 부호를 새삼 활발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인물들의 시점이 다양하게 나뉘기도 하며, 그래서 그들은 제 성격에 맞는 말과 행동으로 제 몫을 이루어내며, 화자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타자’로 인식하며 서사적 줄거리를 만들어간다. 따옴표를 쓰고 있는 「그가 모르는 장소」는 어머니와 아들간의 아기자기하면서도 조용한 대화들로 서로의 생애를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고, 「작별 인사」는 Y, T, A, J와 기선생의 수선스런 대화들과 성격들로 그녀의 이전 소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장면을 연출한다. 그 장면은 별일 아닌 일로 한바탕 난장판의 싸움을 벌이는 데로까지 발전하는데, 설령 살벌한 사고까지도 내면의 회상으로 조용하게 술회해오던 그녀에게 인물들의 이러한 싸움질에 대한 현장적인 묘사는 아주 새삼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화자의 자유스러운 회상과 연상을 통해서 돌이켜지던 전날의 사연들과 일들이 이제는 「그가 모르는 장소」에서처럼 대화로, 그리고 「그는 언제 오는가」와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에서처럼 노트로, 밝혀지고 기록된다. 그녀는 “저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저 자신을 표현해보려고 애쓰”(p. 12)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타자를 타자로, 외부를 외부로 놓아두고 자신과의 거리를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묘사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녀가 이제, 추억·내면화·1인칭화로만 세계와 인간들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래 비워둔 빈 방·빈 집·빈 마당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화사한 봄날 친구와 딸기밭에 가고, 아늑한 가을날 어머니와 낚시하러 호수에 오는 것이며, 칠레에서 돌아온 친구와의 회식을 위해 모이고, 혹은 제부와 함께 동생의 유해를 뿌린 남대천으로 달리고 있는 중이며, 서로 다른 방에서 죽은 딸의 기척을 듣고 서먹했던 부부가 새삼 몸을 섞는다. 그곳들에는 허공과 침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은 붉은 딸기와 하얀 햇빛과 그 빛에 하얀 허벅지가 빛나는 친구가 있고, 향어는 잡히지 않지만 어머니와 함께 초승달을 바라보며 잔잔한 호수의 바람을 쐬고 있으며, 갖가지 음식들을 앞에 놓고 풍성한 마음으로 게 속을 파며 친구를 기다리는 친구들의 부산스러운 잡담들이 질펀해 있고, 또는 북태평양에서부터 8천 킬로미터를 거슬러 붉은 연어떼들이 회귀하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향해서 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펼져지고 있는 중이며, 주인공들은 상념에 젖어 회상하고 독백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어울리고 지껄이며, 이야기를 전날의 것으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경숙의 근래 소설들이 그전의 것들과 다른 모습으로, 정황도 다르고 문체도 다르고 그 문체 속을 흐르는 화자의 내면도 다르게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름의 가장 뚜렷한 모습이 두 육체의 접촉이다. 「그가 모르는 장소」의 호숫가에서 아들은 오래오래 울고 있다가 잠이 든 어머니를 업고 서성이고, 「그는 언제 오는가」에서 여관에 든 그녀는 피곤해하며 자기 어깨에 기댄 제부가 편히 잠잘 수 있도록 자세를 움직이지 않으며,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의 부부는 냉장고 앞에서 죽은 딸을 회상하며 서로 위무한다. 그 장면들은, 그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고, 그러면서도 마치 자상한 연인처럼 모자 관계가 다정하게 유지되어왔기에, 또는 그녀에게 그는 죽어 없는 동생의 남편이어서 이제 “동생의 남편도 나의 제부도 아니”기에, 혹은 마음으로나 실제로나 서로에게 무관심해진 부부이기에, 업고 혹은 기대며 어루만지는 그 정황은 특이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이상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세 정황에서 공통되는 것은 눈물이다. 어머니도 울고 있었고 제부도 울고 있었으며 무심한 사람으로 생각되어오던 남편도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아들은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런 아내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이혼할 단계에 이르렀으며, 제부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위해 노력해보지만 죽은 아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부부는 딸의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머니와 제부와 남편의 울음은 그런 삶의 설움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그 연민과 공감이 서로의 육체를 자연스럽게 접촉시키고 서로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접촉들은 욕망도 관능도 아닌, 슬픔이 교감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연민의 쓰다듬음이다. 그러나 그 정황은 신경숙답지만 그 행위는 그녀의 이전 작품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그녀의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딸기밭」에서의 그것들은 관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신경숙의 것으로는 놀랍게도 에로틱하고 육체적인 욕망에 차 있으며 그 묘사는 노골적이며 직접적이다. 화자인 여자는 못생기고 범죄형인 그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욕망에 젖어 그가 숙직하는 창고로 찾아가 스스로 몸을 열어 관계를 맺고 그 욕망과 관계에 탐닉하며 “아픔을 뚫고 올라오던 쾌락”(p. 70)에 젖는다. ‘나’로, 또 ‘처녀’로 두 개의 인칭을 받는 화자의 욕망과 관능이 즐겁게 피어나는 것은 그 남자보다는 오히려 ‘너’ 혹은 ‘유’로 불리는 여자 친구에게서이다. 화사한 그녀와 종아리를 차고 엉덩이를 쥐어박는 “억압이 없는 장난기”에서 그녀는 “내부의 욕망”을 발산하면서 “우리들 머리 위의 연둣빛들.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던 너무나 환한 빛”(p. 54)의 환한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봄날의 딸기밭. “햇빛에 반짝이는, 땋아내린 유의 갈색 머리,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고운 목덜미, 붉은 딸기와 녹색 잎새 속의 유의 흰 허벅지, 홍조를 띤 유의 뺨”으로 빛나는 유는 “자신의 관능성에 대해서 완전히 방심해 있”고 그 “관능적인 움직임” 때문에 처녀는 “고통스럽다”(p. 80). 처녀는 유에게 살의를 느끼고 목덜미를 조이고 “유의 약간 벌어진 입 속에 혀를 밀어넣”(p. 82)는다. 이제껏 저항하지 않고 처녀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던 유는 이때 “돌연 거칠어”지면서 처녀의 웃옷을 젖히고 그녀의 가슴에 딸기를 쏟아붓는다. 유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손길, 뺨에서 배에서 허벅지에서 딸기가 으깨어지는 감촉, 이 광적인 동성애적 관능은 처녀에게 거부할 수도, 남겨두는 것도 아무것도 없게 한다. “엎치락뒤치락거리는 욕망 속으로 모든 것이 빠져들어간다. 엷은 땀냄새도 딸기를 키운 흙냄새도 그 남자와의 행위 뒤에 남겨지던 고독까지도”(p. 82). 그러나 이 관능은, 그 뿌리를 육욕을 위한, 관능을 위한 관능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자폐적 성격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스스로에게 가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불안으로부터의 안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딸기밭」의 화자가 빈약하고 일그러지고 불균형스러운 “접근 금지의 팻말을 내포”(p. 46)한 그 남자에게 이끌린 것은 “결핍을 안은 채 덧없음, 이라고밖에 달리 표현될 수 없는”(p. 43) 아버지가 신고 있는 흰 고무신을 그가 어울리지 않게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내 생의 출입구에 부재의 이미지를 각인시켜놓고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p. 44) 대신 얻을 수 있는 안도감의 상대였다. “그 남자의 외모는 스물세 살의 처녀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처녀가 사랑했던 건 그 남자가 아니라 바로 그 안도감이진 않았을는지”(p. 57). 그랬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서 “근친애”(p. 63)를 느꼈고 그가 그녀를 업어주면 “모든 존재론적인 불안 의식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듯한 느낌”(p. 63)을 갖는다. 이렇게, “발육 부진”(p. 80)의 처녀는 그러나 유에게서는 그녀가 “지닌 것을 훼손시켜 더럽혀놓고 싶은 깊은 살의”(p. 81)를 느낀다. 결핍의 그 남자와는 달리, “유에게 비애란 없다. 고통이란 없다. 결핍도 없다. 불가능도 없다. 〔……〕 유의 살빛은 투명하다. 발육은 조화롭다. 비틀리지 않았다. 억압받지 않는다”(pp. 81~82). 그 남자는 그녀의 결핍감에의 공감을 대현해주는 존재였고, 유는 풍족을 향한 그녀의 욕망의 상대였다. 그것이 그를 향한 안도와 유를 향한 살의의 실체였다. 그리고 유는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외딴 개울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녀와 딸기밭에 가던 날 처녀에게로부터 버림받은 그 남자는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 그녀는?
딸기밭에서 돌아온 후 나는 금지된 것들 근처에는 가지 않는다. 생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 내가 분석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누군가의 인생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그것이 인간을 변화시키리란 것도. 내 인생에 그 남자와 유를 통과시킴으로써 나의 욕망은 끝에 다다랐다. (p. 85)
이제는 금지된 것들을 회피하고 또 다른 세계의 인생살이의 불가사의를 인정하게 되는 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들은 「딸기밭」을 하나의 성장소설로 읽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화자의 인식은 ‘망각의 일’만을 생각하게 되는 씁쓸함이고, 금지된 것들을 향한 전날의 욕망들조차 희미하게 느끼게 되는 그 뒷맛은 허망한 것이다. 그처럼 화사하고 그처럼 관능적이었던 딸기밭의 정경은 삶에 대한 회한 없는 허망함과 존재의 괴리에 대한 수락을 그녀에게 심어준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계기는 세계의 비어 있음이라기보다 세계가 틈새를 벌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부재를 견디기 위한 글쓰기로부터, 「그는 언제 오는가」의 미란이가 노트에 자신의 죽음으로의 나날을 글로 남긴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다른 존재에게 알리고 싶은” 글쓰기로 그녀를 옮겨놓는다. 신경숙은 몇 해 사이에, 어떻게 해서 부쩍, 세상과 타인과의 교섭을 통해 ‘욕망의 끝’에 다다르고 세계의 틈새를 발견하며 그 블랙 홀에 빨려들어갈 삶의 진상을 깨닫게 되었을까. 그녀는 30대 전반에서 중반으로 나이를 옮겨갔고 그 사이에, 「작별 인사」에서 발견하는 것 같은 이른바 IMF의 충격이 있었고, 그리고 그녀는 결혼을 했다. 그러나 어떻든, 그녀의 인식은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되었으며, 세상에 대한 바라봄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넓어지면서 그것들의 근원적 상황에 대한 비관적 시선의 색깔은 더 어두워지고, 불가사의한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불안은 더욱 커진다. 그러면서, 그녀의 작품들은 종래의 자신의 개인사적 이야기를 통해 일구어내던 자전적 혹은 사소설적 분위기를 벗겨내면서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타자적 존재의 위태로운 삶의 이면들을 그려내주고 있다.
위기는 신경숙의 경우 불시에, 아무런 예비 없는 평온한 삶 속에 불쑥 찾아온다. 미란이의 자살처럼, 혹은 유학중인 유가 산책하러 나갔다가 닥치게 되는 죽음처럼. 「작별 인사」의 M, 소설 속에서는 나라는 1인칭으로 친구들의 회식을 묘사하고 있는 화자 역시 지리산에서 급류에 밀려 목숨을 잃는다(작가는 「딸기밭」의 ‘유’에서도 반복되는 바로 이런 사건으로 역시 지리산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은 시인 고정희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모순을 넘은 사랑”(p. 150)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칠레로 가서, 거기서 로베르토와 동거를 하고 귀국해서 다시 칠레로 갈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회식의 자리에서 친구들은 결코 그녀가 목숨을 잃고 구천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친구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지리산의 폭우와 급류 소식을 보긴 하지만 설마 그녀들의 친구가 죽음을 만났으리라는 예상을 못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그녀들은 의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녀들의 맞은편 아파트 12층 베란다에 줄곧 멍하니 서 있던 남자가 아래로 투신한 것이다. 그녀들은 뭔가 이상하다고만 여기며 “내내 남자를 지켜보았으면서도 남자가 투신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p. 194). 불행은 그렇게 불쑥, 일상의 삶 속으로 뛰어들며 그들의 운명을 순식간에 바꾸어놓는다. 그러니, 우리가 평화롭다고, 아늑하다고 믿고 생각하는 삶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신경숙은 여기저기 뚫려 있는 그 블랙 홀들의 세계에 대해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 「그가 모르는 장소」에도 이 블랙 홀은 입을 벌리고 있다. 모자가 그들이 자주 오던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 광경은 조용하고 따뜻하며 평화롭다. 그들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서정적인 장면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초생달을 보고 지은 어머니의 시를 읽는다.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도 신경숙의 소설 중 어떤 것보다 다정하고 차분하다. 그들이 서로 양보하고 격려하며 이루어지는 대화와 내면의 교류는 끝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아들간의 대화들에서, 그들의 삶 속에 고개를 내민 존재의 괴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의 아내는 어느 사이엔가 동네의 수의사와 불륜 관계를 맺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하겠다”(p. 132)며 그와의 이혼을 요구한다. 그것을 만류하며 설득하려는 그에게 아내는 그와의 결혼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서로 지옥 속으로 들어가는 거”(p. 134)라고 단정한다. 그는 “편안하고 행복”했으며 “순탄 대로”라고 믿어온 그의 가정이 끝내 파탄으로 들어갈 것임을 인정하며 아내의 이혼 요구를 수락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펼쳐주는 그처럼 자상하고 따뜻한 애정 속에도 어두운 그늘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언니는 난쟁이를 낳고 시집에서 쫓겨나서는 바다에 투신 자살했고, 그녀 자신은 그 유전성이 두려워 아이를 갖지 않았다. 그녀의 양자인 그는 그리고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오히려 ‘결핍’을 느끼며 자라왔다. 어머니가 너무도 잘해주면서 “야단도 안 치고 손바닥으로 등짝을 때리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데서 아들은 오히려,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사랑 속의 ‘결핍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 존중에 어떤 거짓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외려 더 깊은 신뢰와 의지(依支)가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랑과 신뢰, 거기서 일구어지는 삶의 평화로운 일상 속에 얼마나 큰 불행들이 숨어 있고 엄청난 비극이 문득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인가의 환기이며, 그러기 때문에 존재의 비극적 실상을 인식하면서 그 상처들을 보듬고 싸안고 기대는 데서 그 슬픔을 함께하는 연민의 정서야말로 슬픈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아들이 잠든 어머니를 업고 호숫가를 서성거리는 「그가 모르는 장소」와, 눈물을 흘리다 잠든 제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그치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그는 언제 오는가」의 아름답고 슬프고 따뜻한 결말은 모두 「딸기밭」의 “욕망의 끝간데”까지 가본 사람의 ‘깊은 슬픔’에서야 일구어질 수 있는 정서이다. 강릉 가는 길을 멈춰 들판의 낟가리에 몸을 가리고 주저앉아 있는 그녀에게 죽은 동생이 말해준 이 아름다운 구절은 신경숙이 어두운 틈새를 감추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내는 방법으로 권하는 또 하나의 잠언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pp. 251~52)
그녀는 이런 삶의 모습의 일단을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와 「어떤 여자」에서 따뜻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 ‘신경숙다움’을 여전히 뛰어나게 보여주는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는 “아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은” 존재의 비의를 묻는 물음이다. “천지간에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p. 13)고 믿는 한 작가에게 쓰는 편지는 선천성 면역 결핍증으로 딸아이를 잃은 부부가 바로 그런 존재를 경험한 이야기를 술회하고 있다. 딸을 잃고 아내는 남편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산으로만 쏘다니며 “어떤 인생이든간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가 없는 모래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모래펄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다”(p. 12)고 믿으며 “슬픔·고통·공황”의 자폐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래를 설계”(p. 16)하며 태연히, 시간을 압축하여 바르게 살고 있다. 부부는 각방을 쓰지만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내면과 정서는 상반되게 흐르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미당의 시구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를 떠올리게 하는, 푸지게 눈이 내리는 날의 새벽, 남편은 때아니게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아내는 “물이 찰박찰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눈 내리는 소리였을까. 그러나 부부에게 다시 들리는 소리는 냉장고 안에서 나는 듯한 딸아이의 ‘옹알이 소리’다. 남편은 그날이 딸아이가 숨을 거둔 날임을 상기시켰고 아내는 쇠라의 그림 「흰옷을 입은 소녀」를 보여준다. 남편의 “제 품에 와락 얼굴을 묻고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아내는 비로소 “이 눈물을 다 감추느라고 제가 산에 다니는 동안 이 남자는 그리 반듯하게 살았”(p. 32)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부는 이 년 만에 ‘사랑’을 했고 그녀는 “그의 따뜻한 입김이 제 마음속의 모래펄까지 퍼져오는 듯”(p. 32)함을 깨닫는다.
이 열림과 화해를 이끌어온 것이 무엇일까. 작가가 그 제목에서 묻는 것은 그것이다. 밖에 소란스럽게 내리는 눈보라 소리일까, 혹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불가사의한 존재일까. 그 어떤 것이든, 억눌렸다 터져나온 남편의 울음과 산과 산에 뿌린 아내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부부의 가슴을 열게 하고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교감과 화해는 신경숙의 이전의 소설적 도구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부부의 환청은 빈 방의 어린 남매의 출현(「오래 전 집을 떠날 때」)과, 빈 마당에서 닭을 안고 있는 소녀와의 만남(「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처럼 환영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처럼 유년기의 기억으로의 추상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 회복의 계기로 기능하며, 환청되는 아기의 옹알이는 자기의 죽음에 대한 딸의 원한(「벌판 위의 빈 집」)이 아니라 화해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한 전조였다. 신경숙은 여기서 검은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무들이 “터질 듯이 부풀어”(p. 32) 움을 틔우고 있는 생명의 실재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강인하면서도 가난하고 분방하면서도 검소하며 솔직하면서도 근원적인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농촌 여성 작가와의 긴 전화 통화를 마치면서 ‘행복’에 젖어 “얼굴이 환하고 눈꼬리에 아직도 웃음”(p. 221)을 묻어놓고 있는 것이다. 콩트 같은 「어떤 여자」는 그러니까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불러와 유연하게 본질에 닿게 하고 자연의 냄새에 잠기게 하고 싶은 꿈”(pp. 33~34)의 실제인 것이다. 이때쯤에 이르면, 그녀의 글쓰기는 “부재를 견디는” 일로부터 이렇게,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살려내고 싶은 것으로 그 뜻이 달라진다.
내가 살아보려고 했으나 마음 붙이지 못한 헤어짐들, 슬픔들, 아름다움들, 사라져버린 것들, 과학적인 접근으로는 닿지 못할 논리 밖의 세계들, 말해질 수 없는 것들, 그런 것들. 이미 삶이 찌그러져버렸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익명의 존재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은 욕망, 도처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나, 시간 앞에 무력하기만 한 사랑, 불가능한 것에 대한 매달림, 여기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내 글쓰기로 재현해내고 싶은 꿈.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p. 46)
아, 이제야 알겠다, 이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한, 존재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죽음을 다른 존재에게 알리고 싶다는 그녀의 말의 사연을. 그리고 벌어진 틈, 그 어두운 블랙 홀 위로 시간은 흐르고 아름다운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잠언의 뜻이 이제 새삼 따뜻하게 다가온다. 신경숙의 소설은 이 세계의 슬픈 아름다움을 실현하고 있다. 짧은 서사에 긴 정감으로 싸안고 있는 그의 작품들이 품은 이 슬픈 아름다움은 그래서 이중의 꿈을 담고 있다. 이 세상의 질펀한 존재의 괴리들과 삶의 끊임없는 위태로움을 안고 있는 이 세계에 그래도 남아 있을 아름다운 것들을 위한 꿈,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슬퍼서, 그것들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꿈이다. 그것이 그의 작품을 시로, 에세이로 읽히게도 하고 고향의 정서로 흙과 낟가리 향기에 취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본질에 닿게’ 만든다. 이런 상상력의 세계는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귀중하다. 그것은 가볍고 도시적이며 이른바 현대적인 것들의 풍경들을 헤집고, 삶의 본원과 본연의 깊이로 감동시키기 때문이고, 속도와 우연의 세계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사랑과 연민의 근본을 깨닫게 하며 슬픔이야말로 세계를 아름답게 살아가는 방식임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신경숙은,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슬프고, 또 그래서, 아름답다.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
딸기밭
그가 모르는 장소
작별 인사
어떤 여자
그는 언제 오는가
해설· 존재의 괴리, 그 슬픈 아름다움·김병익
작가의 말
저는 신경숙선생님에 글을 사랑하는 사람인데요
이렇게 글을 띄우는 이윤즉은 선생님에 메일 주소를 알고
싶어서 입니다. 상기 메일 주소로 알려주시면 진심을 감사할께요.
꼬옥 부탁드립니다 꾸뻑~
신경숙을 읽는 동안에, 내 슬픈 과거가 되살아오는 것만 같고
내 안에 오래오래 감추어두었던 욕망들을 들킨 것만 같아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어제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마지막 중편까지
다 읽어 버렸다. 일부러 뒤에 나와 있는 평론은 읽지 않았다.
나오는 소설집마다 꼬박꼬박 평론가의 글을 덧붙여서 출판하는
나라가 우리 나라말고 또 있을까 싶다. 싸구려 스노비즘에
편승하려는 출판사들… 헥, 역겹지만 현실이다.
이번 소설집은 그녀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중편을 중심
으로 짜여져 있다. 단편은 다소 가벼운 듯한 한 개밖에 없다.
삶의 그 어쩔 수 없음, 이라는 주제는 여전하다. 잃어버린 것,
헤어져 버린 것, 이제는 더이상 가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포기하지 못하고 연연해 하면서, 일상 속의 아주 작은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경숙의 인물들 역시 여전하다. 신경숙의
인물들은 언제나 닿을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으므로, 허나
그것 없이는 존재 자체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겠기에 너무 슬
프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 ‘죽음’을 통해 서로 닿을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을 다룬 중편이 세 개나 된다는 점에서 신경숙
은 그러한 주제들을 좀더 한계치까지 밀고 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 혹은 죽어서
영혼이 되어 친구들의 점심모임에 작별인사를 하러 나타난 M.
나의 눈에 탁, 들어오는 작품은 [딸기밭]과 [작별 인사]였다.
그전에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지만, 신경숙이라는 소설가가
이토록 숨은 욕망을, 그리하여 슬플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이토록 섬뜩하면서도 아련하게 잡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
했다. 엷은 빛깔의 스커트에 으깨어지는 빨간 딸기물, 색색깔
맛나게 요리되는 음식들에 관한 그녀의 묘사들이란….! 우리
마음 속에서 극도로 모순되면서도 한 순간에 교차되어버리는
욕망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날카롭게 잡아낼 수 있다니.
그건 사랑과 살의, 라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겠다. 사랑하면서
매혹당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해 살의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아니 어쩌면 사랑하기 때문에 매혹당했기 때문에 동시에
살의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런 모순된 욕망 때문에, 한순간
타오르는 욕망 때문에 슬퍼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라니!!!!!
신경숙을 읽을 땐 언제나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천천히 힘들
지 않게 읽으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참 힘들게
힘들게 읽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집에 돌아와서는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아낼 듯했다. 서둘러 샤워를 할 수밖에…… .
가능하다면, 내게 글을 다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면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에 대해서 길게 서
술해 보고 싶다. 잘 잡히지는 않는데, 그녀의 소설에 자주 등
장하는 물, 이라는 소재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그녀
소설에 등장하던 물, 이라는 이미지…… 그건 무언가 그리운
것, 한없이 서글픈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어떤 대상 같은 것
이지만, 끝내 잠겨 볼 수는 없는, 그리하여 끝끝내 완전히 알
아낼 수는 없는 마음의 장소,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 때문에 신경숙의 소설 속 인물들은 계속 슬퍼하고
좌절하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초경’이라는 작품
에서의 가뭄이나, 혹 사막을 배경으로 했던 어떤 단편들에서
느꼈던 그 존재의 불안감이란…..!
그런데 내가 그런 걸 그렇게 날카롭게 잡아내어 글을 쓸 수
있을런지……! 삶에 대해 또다른 희망을 갖게 된다면…?
[기차는 일곱 시에 떠나네]에서부터 보여주기 시작한, 신경
숙이 소설 속 인물들을 위해 열어놓고 있는, 어떤 희망의
출구를 내 스스로의 간절함으로 나의 현실 속에서 찾아낼
수만 있다면…..!
아침에 무심코 흥얼거린 노래가 하루 종일 입에 붙어 있듯,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이 납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을 장난처럼 여기고>라고 쓰셨죠.신경숙님의 글을 원래 좋아합니다만 딸기밭은 정말 아름답고 가슴 아픈 책이더군요.저의 딸아이가 크면 같이 읽고 싶습니다.신경숙님 건강하세요.
오래전에 신경숙님의 소설을 한 번 읽었었습니다. 제목도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의 작품이었습니다.
그 후로 신경숙님의 소설을 읽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딸기밭’….너무 좋다는 표현밖에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더군요…뭐랄까.. 가슴이 아련히 아파오고 잔잔하게 슬픔이 밀려오는 그런 애잔함…그러면서도 한편엔 따뜻함이 베어나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참 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죠…눈을 감고 조용히 현재의 감정들을 받아들이게 해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맘에 드는 작품을 만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읽어보지 않은 신경숙님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잊은 게 있네요. ‘딸기밭’은 조용히…천천히…읽어야할 작품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