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김연경 소설집

김연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2월 21일 | ISBN 9788932011493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16쪽 | 가격 7,500원

책소개

[개요]
이번 소설집 『미성년』에서 작가는 텍스트의 안과 바깥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과 신선한 문체를 통해 낯설고도 흥미로운 소설 문법을 펼쳐보인다. 이는 소설이 현실의 그림자이면서 텍스트의 그림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선한 미학적 전략이다.

[작가의 말]
삶이 삶 자체로 다가왔고
사람이 그저 사람으로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이 현상을 어떤 부정도,
거부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인간과 관념, 몸과 언어를 소설 속에서
화해시키고 조화시키는 것이다.

2000년 2월, 김연경

[해설]
소설가의 삶과 그림자
-김연경의 소설집 『미성년』

손종업

1
그림자의 춤을 아는가. 그 몸짓은 어둡고도 간절한데, 때로는 기이하게 변형되어 일렁인다. 그림자는 내 견고한 존재의 틀을 뛰어넘은 곳에서 마치 검은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림자는 쉬이 자취를 감추기도 하지만 정작 나보다도 더 먼 세계까지 나아가고,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림자는 한 순간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어떤 단일한 명령 체계에 의해서 움직이지도 않으며, 언제나 내 삶에 비해서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에이브럼스는 『거울과 램프』라는 책에서 사물들의 다소 불완전한 모사simulacra로서, 거울 그리고 물과 함께 바로 그림자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그림자는 상상의 형식이면서 또한 에고이즘의 한 변종이다.

김연경의 새로운 소설집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림자이다. 소설집 속의 모든 소설들은 작가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나는 그게 정확히 작가 자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한낱 소설적인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착오로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상상의 즐거움에 쉽게 매혹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클라인의 병을 떠올리게 한다.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는 하나의 자기 성찰적인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교란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식은 상상의 자유로움을 제약할 것이다. 모든 그림자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언제나 존재 자체와 연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그의 소설 언어들은 어눌하면서도 장황하고, 이야기들은 제 형상을 찾지 못해서 종이 위에서, 상상 속에 갇힌 채 술렁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힘들여 구축했던 소설 형식을 끊임없이 해체해버리는 탓에, 독자로 하여금 허구라는 틀 속에 편안히 머물 수 없게 한다.

만일, 소설이 레저의 일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여기서 그만 ‘안녕Adieu’이라고 인사를 해도 좋다. 아마도 비극을 통한 자기 쇄신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나아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의 소설들은 장대한 비극이 걸어다니기에는 너무 좁고 또 누추하다. 그곳에서의 삶은 결코 숭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낯선 세계에 대한 모험도, 지평선 너머에서의 좌절도 없다.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계 자체가 이미 하나의 폐쇄 회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그의 소설에 대해 역겨움을 품을 수도 있다. 도대체 뭐 이런 소설이 다 있어? 그런데 그 다음에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진다. 그의 소설을 조금이라도 엿보고 난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자신 안에 하나의 거대한 결락(缺落)이 마치 어두운 동공(瞳孔)처럼 열려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 내리는 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 보도 쪽으로” 걸으면서 “파파이스, 스테파네트 신발점, 제이빔, 체이스컬트, 이엔시, 시시클럽, 맥도널드, 톰보이…… 상가들이 쭉” 늘어선 거리를 망연히 두리번거릴 때, 혹은 대낮에 오지 않는 ‘셔틀’을 기다리고 섰거나 그것도 아니면 좁은 방안의 어둠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 졸지에 그의 소설은 우리의 가슴을, 존재를, 우주를 조용히 흔들어대면서 다시금 눈앞에 나타난다. 어쩌면 그의 소설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전혀 꾸미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유치한 모습으로 ‘그것’은 나타나고, 그러면 우리는 허우적거리면서 가위눌린 꿈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막상 악몽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아쉬움과 매혹으로 이미 ‘그것’이 사라진 어두운 꿈속을 들여다보곤 하지 않던가. 대체로 꿈들이 현실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악몽은 우리들 존재의 내부에서, 그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악몽이야말로 바로 나 자신이라고.”

이처럼 그는 우리들 존재가 머무르는 환멸스럽고 권태로운 저층을 그다지 멀리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 탓에 그의 소설은 운명적으로 풍문에 휩싸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소설에서 헤르메스의 날갯짓은 나타나지도, 요구되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에는 머언 세계를 향해 너울거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에게 편안하게 내려앉을 수 있는 어떠한 달콤한 수사학도 없다. 오히려 모든 악몽이 그러하듯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우리들의 신발은 턱없이 헐렁거리거나, 아니면 진흙에 달라붙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생 자체와의 외롭고도 전면적인 싸움으로 화한다. 작가 김연경의 새로운 소설집은 바로 이 세계에 투기된 ‘나’와 소설 형식이 만나는 접점 위에 놓여 있다.

2
때로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작가 김연경이, 마치 호러 무비horror movie 속의 여주인공이 그러하듯이, 오히려 첫 소설집에서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지하 층계를 밟아 자기 속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체 ‘나’는 미성숙하고도 불안하며, 언어는 더욱 거칠고 모호한 형태로 변한다. 소설 속의 시간은 끊임없이 지연되거나 무의미하게 반복되고, 사건은 애매하고 초라하며, 공포의 실체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그다지 극적인 구성을 취하지도 않으며, 그는 언제나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지금 이곳을 서성일 뿐이다.

소설집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피아노, 그린비의 상상」이 그러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다른 많은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모로 그는 작가 자신을 닮았다. 작가는 굳이 그것을 숨기려고도, 그렇다고 미화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는 바로 모든 탐색의 중심에,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위치짓는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상상의 거점으로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되, 동시에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고, 또한 사랑에 빠진 인간이다. 삶의 배설 방식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에게서 소설가는 더 이상 별종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어떠한 지식인적인 고뇌도, 예술가로서의 질병도,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시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하게 평범하고도 지루한 일상 속에 갇혀 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그 세계 속에서 백일몽에 젖는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가 더 많은 결핍을 통해 소설의 형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일 뿐이다. 그런데 소설 속의 상상 기계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제법 긴 축에 들어가는 문장을 관계사가 부재하는 한국어 특유의 연결 어미와 몇 개의 쉼표로 이어놓은 뒤, 나는 몇 년 전에 산 보랏빛 파카로 중무장을 하고 파카에 달린 보랏빛 모자까지 쓴 채,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춘다”는 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소설은 언제나 이중적인 욕망에 의해 찢겨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머물 수도, 그렇다고 상상 속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이렇게 상처난 틈새에서 문장들은 마치 불구인 것처럼, 혹은 걸신 들린 것처럼 쏟아져나온다. 이러한 탓에 일찍이 박혜경은 그의 소설 언어를 “분열하는 자아의 미로를 탐색하는 도발적인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듯한 언어들”이라고 칭한 바 있다.

소설 속의 ‘나’는 “이 어둠의 꿈보다 더 잔혹한 현실” 속을 헤매면서 “뭔가 다른, 밝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상상”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완성되지 않은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해내는데, 이것은 동시에 상상하는 자로서의 ‘나’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허구 자체의 영역 속으로 자유롭게 나아가지 않고, 상상이 촉발되는 지점으로서의 현실과 나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고유명사들을 사용함으로써 이 지점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런데 ‘사실’들이 더욱 세밀하게 묘사되면 될수록, 놀랍게도 그것은 더욱 기형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심지어 이들의 처지는 역전되기조차 한다. 마치 천연색의 영화 속에 갑자기 끼여든 흑백의 장면들이 더욱 사실적인 것처럼 느껴지듯이. 이제 우리는 상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쉽게 분간할 수 없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삶 자체의 모습이 아닐까.

그곳에서 소설을 향한 욕망이란, 슬지라는 말더듬이 처녀가 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저어, 피이, 아, 노르, 을, 치고, 시프은, 데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거대한 침묵의 순간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쉼 없이 피아노를 쳐대야” 하는 존재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말더듬이를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언제나 화해 불가능한 균열이,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슬지는 소설을 쓰는 나의 거울로서 기능하기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들은 서로 깊이 근친적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녀에게서 다음과 같이 그늘을 형성해놓는다. “그녀에겐 진지한 무게가, 존재의 무거움이 없는 듯 보인다. 이건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분법에서 전자에 부정적인 의미를, 후자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때 무거움의 특수한 현존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많은 무거움의 경험 뒤에 얻게 된 삶의 두께의 부재로서의 가벼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작은 몸을 타고난 사람, 더불어 작은 환경 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의 외양이 풍기는 ‘작음’에의 지적일 뿐이다”라고. 그에게 일련의 작고 가벼움은 운명과도 같다. 그리하여 모든 상상은 거대한 승리에도, 해탈에도, 파국에도 이르지 않고 다시금 일상 속으로 잦아들 뿐이다. 그런데 일상은 “태초부터 본질적으로” 불임이다. 그곳에 속한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작가는 “어떠한 불멸도 꿈꿀 수 없어.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 변화와 운동을 시도하지 않으니까. 생성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도 낳을 수 없어. 아이도 낳지 않고, 글을 쓰지도 않고, 자신의 음반을 만들지도 않아.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길고 가는 나무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자리에 있는 거야”라는 말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 소설은 얼마나 멀리까지 우리를 이끌어갔던 것이며, 얼마나 깊은 곳까지 우리를 뒤흔들었던 것일까.

「심판」이라는 소설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의 자기 삶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 소설은 주인공이 어느 낯선 방에서-일상적인 삶이 곧 죽음이라는 존재의 심연을 알아차린 자에게는 모든 방이 여관일 수밖에 없다-오손 웰스의 「심판」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서 꾼 꿈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그의 처지는 소지품 목록에서 확인된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챙겨넣은 물건들이, 생리대 주머니에서부터 단어가 사전식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은 낡은 국어 사전, 못생긴 고양이가 표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332쪽짜리 소설책, ‘일인이 아님’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씌어진 고지서까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 김연경의 현존 자체라면, ‘일인이 아님’이란 세계 또는 타자를 자기 속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제기되는 물음에 다름아니리라. 어느 날 그녀는 일인이 아니라는 죄목으로 소환된다. 이때 심판이 진행되는 공간은 김연경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자아의 공간이다. 이 소설에서도 상상은 그다지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나 자신 속으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아니, 오히려 이 소설의 참된 가치는 스스로를 고스란히 드러내놓는 것, “나, 드디어 그것을 했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그 구체적인 몸의 행위를 경험한 것이다”로 시작되는 1996년 9월 25일자 일기의 내용과 겨루는 데서 오는 게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의 삶이 바로 소설이 되는 것, 그렇다면 언젠가 작가는 또한 소설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형벌은 죽음의 순간까지 지루하게 이어질 ‘악몽’이다. 길은 검푸른 어둠 속으로 뻗어 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 「기다림」이라는 소설은 그 악몽을 좀더 구체화시켜 보여주는데, “내게는 영원히 변화와 성장이란 없고, 모든 변화와 성장은 내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부재하는 것에 대한 베케트적인 열망-과연 그의 농담처럼 모든 기다림의 끝에 오는 것은 신god이기도 하고, 개dog이기도 하다-을 담고 있다. 「배반」이라는 소설은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는데, 이 소설에 이르면 현실과 상상이 더 이상 분간이 불가능한 곤죽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볼 때 이야기는 오로지 상상을 따라 자유롭게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은 한없이 확장되어 “바다를 건너야 하고 하늘을 날아야 하는 곳으로, 나중엔, 몇 개의 세계를, 몇 개의 은하를, 몇 개의 겁을 지나야 하는 사차원적인 곳으로, 초차원적인 곳”까지 나아가는데, 그 순간 짝패에 대한 강렬한 욕망만이 남을 뿐 이야기 자체는 몹시 공허해져버린다.

「세레모니」라는 소설에서도 ‘나’의 시선은 ‘지금 여기’에서 카메라의 갈급(渴急)한 형태로 저기에 있는 타자를 욕망한다. 소설은 카메라의 셔터처럼 재빠르게 대상을 찍어대고, 의식은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거리는 ‘강박증과 불안증’을 통해 대상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설 속의 인물은 모든 “물질성을 넘어서서 이미지”가 끓어오르려 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이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이 기묘한 잠 속으로, 영롱한 정신의 세계로 침잠한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우리는 그의 자유로움이 주체와 대상이 자리를 바꾸면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그림자로서의 상상은 주체 ‘나’를 뛰어넘어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상상은 때로 현존하는 것들보다 더욱 생생하게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난 없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화자는 부재하는 한 아이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 소설들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동시에 이 소설들의 가벼움은 그의 다른 소설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반증한다.

3
김연경 소설은 허구 자체의 틀 속에, 그것은 언제나 부재하는 것인데, 안온하게 머물지 않는다. 형식은 언제나 메타적인 것을 향해 열리면서, 하나의 작품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은유희」라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인 유희는 여전히 작가 자신과 깊이 관련된다. “무수한 지식을 자기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것에 대한 감동과 애정이 없”었다는 것, “찌그러진 키스의 기억을 옆으로 밀쳐두고, 정성껏 자신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는 것, 이 강렬한 에고이즘이 기형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환’을 만나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에고이즘에 의해 온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고 파국에 이르게 된다는 것으로 이 소설은 읽힐 수 있다. 동시에 이 소설은 명백히 그의 글쓰기 방식을 문제삼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소설 속의 두 인물은 어렴풋하게나마 은유와 환유라는 야콥슨적인 개념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유희’로서의 글쓰기는 부정된다. 이처럼 김연경의 소설은 자기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육박해가는 자의 기록(여기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라든가, 카프카 등에 자주 의지한다)이면서 글쓰기 자체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즉 그의 소설은 소설이면서 삶이며, 동시에 그것에 대한 메타적인 비평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의 소설은 언제든지 중층적으로 짜여 있다.

이런 점에서 「미성년」이라는 소설은 차라리 하나의 소설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드러내놓고 한 대가와 스스럼없이 겨루면서, 이 작품이 실패작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 깊은 뜻을 알고 나면, 혹은 그 깊은 뜻의 살을 단 한 점이라도 맛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만족감을 어떤 푸짐한 살덩어리하고도,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도대체 그의 이러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미성년의 어설프고 치기 어린 연애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지 않을까. 요컨대 그는 바로 다음 부분에서 “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능이, 통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곳에는 기왕의 소설에 대한 반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소설은 교활한 자들이 지어낸 고도의 거짓말밖에 안 되는걸. 중요한 것은 삶이고 구체적인 현실이지, 추상이나 메타로서의 소설이 아니야”라는 말로 요약된다. 언젠가 그 가공의 것들이 가공으로 인식되는 순간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남는다. 그 하나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그 관념 대신에 삶이 들어오는 것이라면, 둘째는 그냥 황폐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들 삶의 진정한 주인은 황폐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곳에서 산다는 것도, 소설을 쓰는 것도 그 환멸을, 악몽을 견디는 일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이 읽기 힘겨운 것도, 그가 내심 자신의 소설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말미암는다. 그것은 그가 살아낸 시간 자체였던 것이다.

미셸 뷔토르에 의하면 소설은 ‘깨어 있는 꿈’이다. 소설은 나와 세계를 향한 끝없는 물음이고 또한 그것들은 소설 속에서 소진한다. 만일 거기에 광기에 가까운 뜨거운 사랑도, 불타오르는 열정도 없다면 소설은 존재할 수 없다. 김연경의 소설은 신기하지도, 재빠르지도, 눈부시지도 않다. 거기에서는 도대체 신세대 특유의 발랄한 상상력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나’라는 작고 초라한 존재 위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다. 놀랍게도 그는 살아낸 만큼 쓴다는, 희귀하면서도 소중한 믿음을 견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를 향한 새로운 길 떠남을 위한 전제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이즘에의 위험성은 여전히 도처에 널려 있다. 성급한 환멸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김연경’이라는 상상 기계에 대한 메마른 보고서에 이를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에게서 세계가 여전히 ‘실루엣’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세계는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매혹적이며 풍요롭다. 소설에 있어서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 그 ‘일인이 아님’의 관계는 단순히 너구리 인형 따위의 모호한 상징으로 이룩될 수 없다. 그곳에서 ‘심판’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체가 사라지는 순간 그림자로서의 소설은 사라지겠지만, 소설은 언제나 나를 뛰어넘어 타자와 세계에 이르러 생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

김연경 지음

197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은」, 그 시를 찾아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1997), 「미성년」(2000), 경장편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2003)를 펴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2000)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서울대에 출강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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