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황동규의 시는 정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황동규 시인이 열반 속을 걸어 열반 밖으로 나가듯이, 사람 속을 걸어 사람 밖으로 나가듯이, 우리는 진짜 우리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홀로움’과 만나기 위하여 ‘시 속을 걸어 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시인의 말]
인간의 웃음과 사람의 웃음이 구별되는 이 황당함. 인간의 눈물과 사람의 눈물이 구별 안되는 이 당혹감. 이들은 나의 걸림돌이다. 그러나 이 걸림돌들이 이 세상의 내 족적(足跡)이 아닌가.
2000년 1월, 황동규
[시인의 산문]
이 시집의 출발은 1997년 1월 이비인후과 수술로 4시간 30분 걸린, 30여 년 간 키워온 진주종 수술과 그 수술 후유증이다. 건강이 회복되자 IMF 강타가 있었다. 실업자가 넘쳤고, 전방위 자본 전쟁이 다가왔고, 인간의 온갖 잡스러운 것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시건 소설이건 인간의 내부를 버리고 표면을 그리는 게 지금의 우리다. 겉을 그리는 일은 스피디하고 스마트하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는 원래 사람의 성(聖) 과 속(俗)이 힘겹게 만나는 장소이고 표면은 성과 속이 따로 노는 장소가 아니겠는가. 따로 노는 게 편하다면, 편하지 않게 살고 싶다.
문학의 장래는 정보화·물신화 세계의 거침없는 흐름에 얼마나 아니라고 버티는 데 달려 있지 않을까. 흐름이 방해받을 때마다 정신없이 떠내려가던 사람들은 내가 왜 이러지, 인간이 뭐지, 라고 생각들을 할 것이다. 동강 어라연 근처에서 래프팅을 껄끄럽게 하는 얕은 여울이 되고 싶다. 댐이 생긴다면, 그저 인간이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 기어 들어가 붙박이 여울이 되어 귀설은 물 소리를 낼 것이다.
[해설]
마른 우물, 에로스, 설렘 이문재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
―원효
황동규의 시에서는 건초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저 바싹 말라 있는 언어들은 정지해 있지 않다. 저 마른 이미지들은 일상적 공간에 놓여 있는 자잘한 소품들의 손을 잡고, 생/‘나’의 안팎에서 무겁도록 가볍고, 또 아득할 정도로 깊어서, 생의 갈구와 그 못미침을 눈부신 속도로 그려낸다. ‘마른 우물’에서 길어올려진 저 건조함들은 그러나, 촉촉한 습기와 환하고 은은한 빛을 바라 마지않는 것이어서 죽음의 국면을 넘어서고 있다.
바싹 말라 있음은 나이듦과 ‘홀로움’으로부터 촉발되고 있다. 리비도가 삶을 추진하는 본능적 에너지라면, 그 리비도는 흥건하게 젖어 있어야 마땅하다. 황동규의 이번 시집은 리비도의 건조한 바깥에서 다시 촉촉한 리비도의 안쪽으로 회귀하는 원환 안에 있다. 마른 우물에서, 그러니까 고장난 몸에서 시작한 그의 여정은, 뻔뻔스런 문명을 가로질러, 습지의 고향과 해후한 다음, 바닷가에서 태초의 신화와 마주한다. 그 소생과 부활의 여정의 주인공이 에로스이다.
이번 시집에는 몇 개의 키 워드가 내장되어 있다. 에로스·자동차·홀로움·극서정시(시공간의 병치)와 같은 키 워드들이 강력한 자장으로 언어들을 끌어안고 있다. 에로스적 이미지라는 자석을 들이대면, ‘마른 우물’은 역설임이 곧 드러난다. 자동차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그의 시들은 기계 문명을 놀라운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의 새로운 형식이자 내용인(형식은 내용을 부르고, 내용은 형식을 부른다) 극서정시를 염두에 두면, 그의 시쓰기 전략을 어렴풋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다.
거개의 시집이 그렇듯이 시집에 실린 첫번째 시는 서시일 때가 많다. 음악에 견주자면, 제1테마가 등장한다. 「퇴원 날 저녁」으로 들어가 보자. 거기에는 에로스와 자동차가 있으며, 시적 자아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제1테마가 아니라 제3테마까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흑반(黑斑) 잔뜩 끼어 죽어가는 난 잎 어루만지며” 밖을 내려다본다. 난은 생명이지만, 야생/자생하지 못하고 인간의 보살핌에 의해 생명을 부지하는 인공의 생명이다. 첫 행이 환기하는 생명의 위기는 제목 ‘퇴원 날 저녁’의 심리적 상태를 구체화하는 한편, 난이 곧 시적 자아임을 일러준다. 날은 이내 추워지고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자동차는 미등이 켜진 채 멈춰 있다.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두 등 색이 다르다.” 시집 뒷표지 글에도 밝혀져 있거니와, 이 시는 시인이 1997년에 오른쪽 귀에 메스를 댄(진주종 수술) 직후의 마음의 지도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그러니까 자동차의 오른쪽 미등은 시인의 오른쪽 눈이었다. 미등의 등 껍질은 시인의 상한 망막이었으니, 다시 켜진 ‘빨갛고 허연’ 미등은 시인의 두 눈이었다. 한쪽 눈은 빨갛지만, 한쪽 눈은 허옇다. 정상과 비정상, 생명과 죽음을 은유하는 등불이다. 허연 미등이라는 흰색의 이미지는 시집 후반부에 가서 “허연 시간의 마지막 칸”으로 변주되면서 죽음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감지 말라고
이 지점에서 난과 자동차는 동일한 ‘신분’을 획득한다. 유구한 시적 언어인 난과, 일상화한 지 채 20년이 되지 않은 자동차는 우리 현대시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저 두 단어는 전근대와 (탈)근대의 상징이 아닌가. 그러나 황동규에 의해 자동차는 당당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현대시의 언어로 등재된다. 그것도 생명의 영토 안에서. 배터리에 연결되어 있는 자동차 후미등과, 인간의 보살핌에 생사 여부가 달려 있는 난초. 이 시에서 깨진 후미등과 흑반 낀 난초는 기계와 자연으로 서열화하지 않는다. 난/생명이 기계/문명 앞에서 우월하지 않다. 시인 앞에서 후미등은 “치운 세상에 간신히 켜든 불씨”이다.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불씨. 퇴원한 날 저녁,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소중함을 재확인한 시인은 인간과 생명, 인간과 기계로 이루어진 세계를 향해 속삭인다. 이때의 속삭임은 에로스의 목소리이다. 그리하여,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저녁 비가 눈으로 바뀌는 차가운 세상. 눈 내리는 어둠. 안경을 벗었다 다시 끼우면서 시적 자아는 존재의 질적 변화를 예비한다. 안경으로 변주되었던 자동차 후미등은, 생명의 불씨가 사라지고 있는 캄캄한 세계를 향하여 사랑을 애원하는 에로스를 발음한다.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배터리는 아직 닳지 않은 것이다. 시적 자아는 흔쾌히 질병으로부터 소생하여, 회복실 문을 열고 나가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모두 50편의 시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자동차가 등장하는 시가 15편.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빈도 수다. 황동규의 시에서 자동차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여행을 떠나는 도구이면서, 여행의 과정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시인의 분신/의인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자동차를 타고 떠나고 자동차를 타고 돌아온다. 그와 시 사이에는 자동차가 있다. 그가 올라서 있는 길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길이 아니다. 삶의 우여곡절을 은유하는 낡은 길이 아니다. 가드레일과 차선이 분명한 고속도로/국도이다. 그의 시는 길이 아니라 도로 위에서 속력을 낸다. 「퇴원 날 저녁」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에게 자동차는 낯선 기계 문명이 아니다. 외부/타자가 아니다. 자동차는 그의 신체이다. 그에게 있어 자동차는 김유신을 술집으로 인도한 그 말이다(「어느 초가을 날」).
마른 우물에서 출발한, 아니 말라서 상처난 망막을 지닌 채 길을 떠난 에로스는 도처에서 바싹 말라 있는 것들과 마주친다. 「캘커타 가는 길」. 북인도의 새벽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홀로 거대한 대지의 일출을 목격한다. 혼자 있고 또 말라 있는 ‘나’는 우선 진로 팩 소주와 차(茶)로 몸과 마음을 적신다. 에로스가 되기 위한 예비 동작. 일출이라는 장엄한 탄생, 생명의 스펙터클은 말라 있음으로는 맞이할 수 없는 법. 일출은 ‘나’가 젖어 있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이윽고
하늘이 해를 힘껏 끌어올린다.
“나체의 해가 완전히 떴다.” 충분히 젖어 있지 않은 에로스는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달리는 기차(달린다는 점에서는 자동차와 다름없다) 안에서 “마른 강 두 줄기”를 본다. 두 강 줄기는 새벽 대지를 달리는 철로를 따라 나란히 흘러가기도 하고, 불현듯 헤어지기도 하고, 문득 멈춰 서기도 한다. 마른 강 두 줄기는, 말라 있는 에로스의 내부에 있는 ‘나’일 터. 마른 우물 안에서 늙음과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는 ‘나’와, 그것을 거부하는 ‘나.’ 마른 두 강 줄기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
기다렸다는 듯 서로 바싹 마른 몸을 껴안는다.
몸의 접촉, 사물과의 접촉에서 생명을 되살려내는 에로스적 이미지는 끊이지 않고 반복과 확장을 거듭한다. 끌어안음과 같은 부드러움은 간혹 사지 절단(「부활」)이나 긁힘(「산당화의 추억」)과 같은 보다 자극적인 접촉으로 진화하면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도드라지게 한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시편 가운데 하나인 「산당화의 추억」은 손을 주어로 삼아 화석화하고 있는 생의 감각을 복원하고 있다. 삶은 마음의 지휘만을 받지 않는다. 온전한 생은 몸과 마음의 협연이다. 아니, 우리들 생의 대부분은 몸의 시간이다. 마음이 몸을 장악하는 시간은 많지 않다. 호흡과 순환, 소화를 관장하고 있는 부교감 신경이 타인/외부로 여겨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하여 우리 삶은 부교감 신경/몸과 교감 신경/마음의 경계 위에서 애매한 것이 아닌가, 감정이 마음의 아들이라면, 감각은 마음과 몸의 사이, 언어와 비언어에 존재하는 혼혈아가 아닐 것인가. 그렇다면 몸의 복원을 통하여 존재의 충만으로 이르는 길은 우선 저 감각의 복원이 아닐까. 에로스적인 것의 부활, 직접적이고 총체적인 것을 소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자주 중얼거린다).
“생의 나중 반절을 부안반도 남쪽 입구에 숨어 산” 반계 유형원이 글쓰던 집을 찾아가는 길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는 「산당화의 추억」은, 첫 행에서 시의 화자의 나이를 암시한다. 생의 절반을 살아버린 연배. 세속 도시를 떠나 은둔하고 싶어하는 화자의 바람도 읽혀진다. 반계가 살던 시절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달리 말하면 세속으로부터, 생물학적 나이로부터 나오는 출구이기도 하다. “나를 떼어놓고 살아보자고, 느슨히 살아보자고” 다짐하던 ‘나’(「지상(地上)의 양식」)가 지금, 반계의 고택 입구를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발걸음은 가볍다. 홀로움(뒤에 언급하겠지만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를 의미하는 황동규 시인의 조어다)의 조건을 만족시킨 몸은 맑아져 있을 터.
알맞은 키의 조그맣고 바알간 불씨들 너무 예뻐
손등을 가시에 긁히며
하나씩 가운데 노란 꽃술까지 하나씩
만져본다.
꽃은 식물의 성기라고 말해지거니와, 여기서 산당화는 여성이고, 노란 꽃술을 만지는 화자의 손은 남성이다. 산당화가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손이 나아가는데, 산당화에는 가시가 있다. 손등에 상처가 난다. 한 방울 빨간 피가 솟았을까. “바알간 불씨들”이 시간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기억은 이 불씨들, 노란 꽃술을 만지는 젊은 에로스를 휘감고 돈다. “추억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 인간이 세속 도시에서 온갖 명함으로 존재하는 사회 속의 존재라면, 사람은 인간을 벗어버린 ‘알몸’이다. 자연인이다. 인간을 사람으로 만드는 추억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꽃술을 더듬는 맑은 손, 에로스의 손이 빚어낸 추억이 아니었을까. 시는 2연에서 ‘사람’으로 거듭난다.
진초록빛 끈 하나가 움직일 때
마음속에 켜 있던 저 불씨들.
초록 독뱀에 놀라고 놀람이 곧 초록빛 호기심이 되는,
질겁하는 손과 만져보고 싶은 손이
한 손에서 일순 만나 손을 완성하는,
손이 점차 투명해지는
‘사람’의 설렘.
이 대목에서 ‘사람’을 에로스의 현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에로스는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진초록 독사를 발견한다. 바알간색에서 노란색으로 이동한 시의 색감은 여기서 진초록을 얻는 것인데, 그리하여 ‘사람’은 이제 아담과 이브의 시절까지 복원한 최초의, 때묻기 직전의, 온전한 생명으로 돌아가고 있다. 초록 독뱀(사탄?)을 보고 질겁하며, 숨가쁘게. 화들짝 놀라는 손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만져보고 싶어하는 손이 있다. 여기에서 손은 자아이다. 두 개의 자아가 길항한다. 자아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할 까닭도 없다. 두 개(혹은 그 이상)의 자아가 정상이다. 단 하나의 자아로 이루어지는 정체성은 비정상이다. 그것은 갈등이 없는 일차원적 존재이다. 두 개의 손이 “한 손에서 일순 만나 손을 완성하는” 순간이 곧 생의 작열하는 환희의 순간이다. 홀로움의 절정에서 손, 즉 자아가 투명해진다.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나를 벗어난 새로운 존재이다. 인간에서 떨어져나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인간 사이에서, 인간으로서 인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또 다른,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연인 것이다. 에로스는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주위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어야 한다. 온몸, 전(全)감각으로서의 손은 나무의 존재 전체와 교감을 이룩한다.
손에 나무의 무늬가 묻어난다.
무늬가 살아 있었구나
한때 숨쉬며 설레고 꿈꾸던
나무들의 환희 고통 추억이.
“반계의 집에서 반계를 잊고” 내려올 만큼 ‘나’는 ‘사람’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은 현실로 복귀하는 길. ‘사람’은 인간으로 돌아가기 싫지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다. 몸을 열어주었던 좀 전의 산당화는 “손대지 말아요!”라며 거부한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게 인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어서 설렘이 살아 있다. 설렘. 설렘처럼 살아 있다는 것을 극채색으로 증명하는 마음의 상태도 드물다. 설렘이 없는 생, 죽은 삶이다. 설렘만 있는 삶, 비현실이다. 설렘은 설레는 자로 하여금 설렘 이후를 허망하게 하기도 하지만, 설렘은 리비도의 활발한 작용이다. 설렘이 없다면 삶은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사람이 설레는 순간을 그 누가 간단히 잡을 수 있으랴?
몸 속을 눈감고 달리는 저 무량(無量)의 피
먹구름 속에서 울리지 않고 거푸 치는 징
“눈감고 달리는 피”와 “거푸 치는 징”이 몸 속에서 쿵쾅거린다.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몸 속에서. 그 순간은 우주만큼 크고 거룩한 것이어서 “1기가바이트”에 달하는 저장 용량을 가진 컴퓨터도 담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과학 기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생명의 신비로운 작용인 것. 시인은 우주와 대면했던, 그리하여 우주가 되었던 ‘사람’의 한순간을 저장/기록하는 대신 자신의 “두 손을 차례로 들여다 본다./손이 점차 투명해지고/반디들이 여기저기 뜨고/저 환한 시간의 멈춤!” 인간은 유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저마다 유일하다. 인간에게 시간은 외부이고, 타율이고, 강제이지만, 사람에게 시간은 내부이고 자율이고 능동이다. 사람이 되는 순간, 다시 말해 우주가 되는 순간, 시간은 환하게 정지한다. 시간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고요한 순간이다. 이때의 멈춤은 죽음이 아니라 완성에 가깝다.
‘버클리 시편’ 연작과 「죽음의 골을 찾아서」가 뼈대를 이루는 제2부는 홀로움의 생태학을 보여준다. 무작정 자동차를 몰고 가 닿는 모국의 어떤 풍경이 아니라, 아예 태평양을 건너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머무는 시인의 안팎은 홀로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홀로움은, 미국에 가기 이전, 그러니까 첫번째로 실린 시 「퇴원 날 저녁」에서부터 잠복해, 거의 모든 시편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 홀로움은 ‘사람’으로 돌아가는 에로스의 감각을 되살려내는 전제이자 그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번 시집은 홀로움의 노래이다. 첫 시 「퇴원 날 저녁」에서부터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한번 다르게 살아보자고/나를 떼어놓고 살아보자고, 느슨히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지상(地上)의 양식」, 딸애를 독일에 보내고 돌아와 아파트에서 공허감을 어쩌지 못하다가 선문답으로 허전함을 달래는 「딸애를 보내고」, 북인도의 새벽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일출을 맞이하는 「캘커타 가는 길」, 반계 유형원의 집을 찾아가는 길에서 “마음속에 켜 있던 불씨들”과 해후하는 「산당화의 추억」, 샌프란시스코에서 씌어진 ‘버클리 시편’ 연작을 비롯해 미국 체류 기간에 씌어진 시를 대표하는 「죽음의 골을 찾아서」들, 그리고 다시 귀국해서 씌어진 3부의 시들에도 거의 모두 ‘홀로움’이 번져 있다.
버클리에서도 시인은 말라 있다. “목마름이 사람을 목마른 사람으로 만든다”(“추억이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는 구문과 비교되거니와, 황동규의 시는 원효의 일체유심조 사상을 근저에 깔고 있다. 사람은 마음의 어떤 상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마음의 존재라는 인식!)로 시작되는 「버클리 시편 2」는, 예술이 “혹은 목마른 사람의 마음속 어디에/마른 씨앗처럼 붙어/언젠가 단비 올 때 다시 싹트곤 할까?”라고 묻고 있다. 이 말라 있음은 「바우아 데비의 그림」에서 「산당화의 추억」에 나타났던 초록 독뱀을 ‘추억’하게 하면서 ‘습지’를 지향한다. “습지가 많은 가난한 고향 마을”에 눌러 살고 있는 인도 화가 바우아 데비는 ‘죽음의 골’을 떠나기 전에 성취한, 에로스와 홀로움의 한 절정이다.
삶의 온갖 고통 다 살아버리고 다 살라버리고
이제 삶의 환희만 남은 그대,
그대가 물감 칠한 모든 종이는 노래하고 있다.
창녀보다도 낮은 인도 최하층 계급으로 태어났지만, 바우아 데비는 ‘손’(「산당화의 추억」의 그 손!)으로 세계를 바꾸어놓는다. 그녀의 손이 가 닿으면, 그녀의 “선과 색이 만나 타오르면” 모든 것이 “살맛 하나로 바”뀐다. 그 손의 구체적 현현이 그녀가 그린 ‘뱀 소녀.’ 신화다. 자신을 해친 뱀들도 ‘환한 뱀’으로 소생하여 노래하고, 시바 신의 남근도 산봉우리처럼 부풀어오르는 세계. 뱀 소녀는 “지상은 물론/뱀의 고향 지하까지 노래”한다. 생명의 원초적인 세계, 홀로움을 통하여, 에로스의 환희를 통하여 마침내 ‘사람’이 되어 도달하고 싶어하는 세계를, 습지가 고향인 바우아 데비는 눈앞에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바우아 데비의 그림 속에서 「산당화의 추억」을 추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서 시인은, 해면보다 낮은, 소금의 골짜기인 ‘죽음의 골’을 탐사한다. “갈 때는 결국 모두 두고 떠나는 거지?”라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장시의 앞부분은 「풍장」의 한 대목을 불러오거니와, 죽음을 만나러 가기 직전, 시의 화자는 인간적인 것, 그로 하여금 사회 속의 한 일원임을 알려주는 모든 증서를 잃어버린다. 운전 면허증, 비자카드, 수첩, 도서관 열람증, 증명 사진까지. 그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리고 즐겁지 않은 홀로움의 끝에서 죽음은 장소인가, 아니면 시간인 것인가, 라고 자문한다. 태평양으로 해가 떨어지는 순간, 들고 있던 잔이 떨어진다. 거대한 바다가 하나의 잔으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소금과 모래로 이루어진 해발 마이너스 95미터인 죽음의 골은 저 ‘마른 우물’의 변주가 아닐 것인가. 황동규의 시는 수면으로, 혹은 수면 아래로 하강하고 있다. 가장 낮은 지면, 물이 솟지 않는 마른 우물/소금 사막에서, 시간과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두 발이 허공에서 허둥대는 꿈에 시달리는 ‘나’는 신새벽에 LA를 떠나 죽음의 골을 향한다. 도로가 해발 0미터 아래로 낮아지자 “바람도 들어와선 길을 잃는다.” 해수면 보다 낮은 땅이라는 비현실적인 현실. 소금이 변하지 않는 것의 은유라면, 소금밭인 이 죽음의 골은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는, 죽음의 공간이다. 그러나 시인은 가만히 들여다보며 ‘흐름’을 본다. 그 흐름을 발견하고 나서야 “죽음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빛나는 소금 골”! “눈이 찡하도록 걸어도/죽음의 골은 계속 내 발을 받아주었다.” 두 발이 허공에서 허둥대는 꿈은, 죽음의 골, 눈이 부신 소금 골에서도 꿈이었다. 꿈이 꿈으로 확인되는 순간, 현실은 현실로 다가왔다.
어디를 보아도 버려진 시간은 없다.
그리고 돌연, 달이 떠오른다. 달이 무엇인가. 유일한 불변인 태양에 대응하는, 변화하는 것의 대표적 상징 아닌가. 소금은 태양의 사생아이다. 태양이 가차없이 버리고 간 것이 소금이다. 태양은 소금을 혐오해서, 바닷물에서 소금기만을 남긴다. 염전은 소금의 탄생지이지만, 바다의 묘지이기도 하다.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기이한 공간이 염전이다. 태양이 지배하는 낮에 소금 골은 죽음이지만, 바다를 움직이는 달이 달빛을 비추는 밤이면 소금 골은 부활의 공간이 된다. 소금 골이 달빛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장면은 이번 시집의 또 다른 주제인 부활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언덕 너머 소금 빛이 피어오르고
달빛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달이 좀더 높이 오른다.
여러 색깔 둔덕들이 제각기 살아나 숨을 쉰다.
죽음의 골 전체가 숨을 쉬고
별들이 쟁그랑거리며 소근댄다.
마른 우물에서 소금 골까지, 초록 뱀에서 ‘뱀 소녀’에 이르기까지, 황동규의 시는 너울거리며 나아간다. 삼각 파도처럼 낙차가 큰(작품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들은, 그러나 보통의 시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복선’에 의해 서로 밀고 당기며 그 울림을 극대화한다. 시적 자아의 화학적 변화를 위한 시쓰기 전략인 극서정시(그의 시는 여행을 떠난다는 특징 이외에도, 시공간의 몽타주를 통해 시의 시공간을 확대시키면서 시의 긴장 강도를 높인다는 ‘차별화 전략’을 찾아볼 수 있다. 문답형 문체도 이 효과에 가담한다. 그의 극서정시들은 언어의 표면 장력을 떠올리게 한다)가 한 편의 시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 시편들이 모인 시집은, 그야말로 커다란 한 편의 시이다. 마른 우물이 나오는 「재입원 이틀째」와 소금 골이 있는 「죽음의 골을 찾아서」, 혹은 「산당화의 추억」과 「바우아 데비의 그림」에 나오는 뱀에서만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 이 시는 수시로 저 시 속으로 침투한다. 저 시는 또 이 시 속으로 잠입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번 시집은 한마디로, 끝없이 ‘홀로움’이 변주되는 한 편의 시이다.
「범종 소리, 들어갈 수 없는」은 「죽음의 골을 찾아서」의 음각이다. 황동규의 시는 이처럼 양각과 음각의 세계를 넘나들며 너울거린다. 죽음의 골에서 죽음을 극복한 ‘나’는 ‘범종 소리’에 얻어맞으며 분열된 자아의 엑스레이를 보여준다. “내 팔이 나를 안고 간다”랄지 “한번 나를 넌지시 건너보다가” 또는 “내가 나에게 길을 비킨다”에서처럼 ‘나’는 ‘나’와 분리되어 있다(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러나 이 분리/분열이 현실이다. 심리학의 최근은, 우리들의 일상적 삶이 극도로 분열된 삶이 아닌가, 라고 되묻는다. 우리는 여러 개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단 하루도 현실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 하나의 자아로 살아가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자아를 구비하고 이 무섭도록 빠른 속도의 시대를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홀로움이 홀로움답지 못할 때 찾아간 곳이 서산 가로림만. 그곳에서 시인은 「소유언시(小遺言詩)」를 쓴다. 죽음은 맑은 것(「1997년 12월 24일의 홀로움」)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던 시인은, 맑음 속에서 “생물의 팔”을 잡아보지만(「어려운 것들 2」) ‘바로 내가 지옥이었다’며 안개 속을 질주한다(「안개의 유혹」). 죽음과 삶, 지옥과 생물의 생생함 사이에서 너울거리며 ‘사람’이 되어 시인이 도착한 곳은 간만의 차이 심한 달(月)의 고장, 곰섬[熊島]이다. 죽음의 골을 찾을 때나 안개 속을 달려 남해 금산에 오를 때와는 달리, 이 시에서 ‘나’는 여유롭다.
그 뒤에 편안히 누워 있는 거대한 자연석(自然石) 남근을 만나
생전 알고 싶던 얘기나 하나 묻고
대답은 못 듣고.
그러나 문명은 뻔뻔스러운 것이어서 10년 전 추억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이 늘며 삶이 점점 직선으로 바”뀌고 “지난 일들이 빤히 건너다 보”인다. 이윽고 염전에서 시간의 칸, 허연 “마지막 칸”과 만난다. 염전에서 한 칸 씩 옮겨가며 소금이 되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 ‘스스로든 억지로든 칸 옮겨다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 인간은 살 만큼 살다 말려 않는가?”라는 질문이 놓이는 자리는 생선의 비릿함이 흥건한 평상이고, 그 냄새에서 “우리가 처음 삶에,/삶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 자리!”를 불러오면서 “육십 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모두 잊어버린다.”‘사람’으로 거듭나는 그 자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겹쳐져 있는 신화의 자리이다.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곰의 신화가 깃들여 있을 곰섬에서 새로운 떠남과 설렘을 확인하는 자리. 그 자리는 바로 달의 인력(引力)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바닷가인 것이다. 어둠 속에서 신새벽의 떠남을 기다리지만, ‘나’의 내부에는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한 노엽고, 슬거운 사람”이 있다. 저 이중적 자아를 끌어안고 하나의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만, 저 하나의, 완성된 ‘나’는 곰처럼 가슴을 친다고, 밤새처럼 밤새 운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만일 저 두 개의 ‘나’가 하나의 ‘나’로 합일한다면, 그리하여 환해진다면, 그의 삶은 완성될지 몰라도, 그의 시는 더 이상 설레는 홀로움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라는 원효의 법문은 이쯤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황동규 시인이 열반 속을 걸어 열반 밖으로 나가듯이, “사람 속을 걸어/사람 밖으로 나”가듯이(「1998년 5월의 문답」),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홀로움과 해후하기 위해 시 속을 걸어 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시인의 말]
제1부(1997. 1∼1997. 7)
퇴원 날 저녁
재입원 이틀째
지상(地上)의 양식
딸애를 보내고
캘커타 가는 길
봄날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며
부활
산당화의 추억
제2부(1997. 8∼1998. 1)
버클리 시편 1
토요일 저녁
버클리 시편 2
버클리 시편 3
버클리 시편 4
버클리 시편 5
바우아 데비의 그림
산책길에서
외따로 핀 꽃들
첫 비 내리는 저녁
세일에서 건진 고흐의 별빛
베르미어의 고요
정선의 금강산도
죽음의 골을 찾아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1997년 12월 24일의 홀로움
마지막 산책길
안개 속의 전화
제3부(1998. 2∼1999. 12)
범종 소리, 들어갈 수 없는
1998년 5월의 문답
원두 커피 든 가방
어려운 것들 1
어려운 것들 2
땅 춤
옛 지도
안개의 유혹
황국(黃菊) 몇 송이
겨울 간월도에서
인간의 꿈
봄비
속됨이여, 나의 삶이여
어느 초가을 날
외옹치
몸 비운 배
어떤 은유
혼(魂)을 쫓다
봄 바다
희한하다 아파트 속에서
무명(無明) 속에서
수련(睡蓮)
기억이 지워지면
소유언시(小遺言詩)
[해설] 마른 우물, 에로스, 설렘·이문재
詩人
그대의 시
깊은 바다에 잠긴
범종
쉬 울리지 않으나
때로 울려
바다와 하늘은 제 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공명케하니
누가 울렸던가 그 무거운 종소리
바다에 내리는 눈들과
바람에 날려온 홀씨
밤바다에 일렁이는 달빛
발끝에 밟힌 풀꽃의 짧은 외침
귀 기울여 듣는
그대 산사람의
숨소리
곱고 따뜻해
겨울이 가네
마음에 봄이 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