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보 까보슈』는 『산문 파는 소녀』 『말로센 씨』 등으로 프랑스 비평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문학성과 대중성에서 두루 인정받고 있는 다니엘 페나크의 첫 어린이 책입니다.
개를 쉽고 친근하게 부르는 프랑스어인 ‘까보 까보슈’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개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니 철저히 개의 시선으로만 그려지는 개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파트라슈나 래시 같은 멋진 이름 대신 썰렁한 ‘개’란 이름의 주인공 개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버려져 거리를 떠돌다가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만난 꼬마 여주인과 그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우리나라 개 못지않게 수난당하는 프랑스 개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다니엘 페나크는 시종일관 유머와 익살을 잃지 않으며 어떻게 개와 사람이 참다운 우정을 나누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너무 못생겨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개.’‘개’는 자신이 처한 불행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들고 일어나 이기적인 사람들에 맞섭니다. 결국 자존심을 되찾고 진정한 친구의 자리도 찾게 되는 ‘개’의 이야기는 어떻게 개와 사람이 참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는지 넉넉한 유머와 익살로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게 보여 줍니다.‘까보 까보슈’는 개를 친근하고 쉽게 부르는 프랑스 말입니다.
■ 쓰고 나서
길들이지도 말고 길들여지지도 말자: 다니엘 페나크
나는 개 전문가는 아니다. 단지 친구일 뿐. 나한테 개와 닮은 구석이 조금 있을 게다. 맨 처음 기르던 개는 나랑 똑 같은 날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자랐다. 하지만 개는 나보다 먼저 늙어 갔다. 내가 열한 살이 되자 그 개는 수없이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신경통에 자주 시달리는 노쇠한 개가 되었다. 난 여전히 철부지 강아지였는데 말이다. 개는 죽었고 난 울었다. 아주 많이.
그 개의 이름은 페크였다. 황금빛 사냥개의 일종이었는데(당시만 해도 사냥개를 거실에 키우는 일이 드물었다), 건장하고 어슬렁거리기 좋아하고 의뭉스러운 싸움꾼에다 도둑질도 조금씩 하던, 투덜거리긴 하지만 자립심 강한 개였다. 페크는 무시당하고 사는 그런 종류의 개가 아니었다. 거리에서는 빨간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릴 줄도 알았다. 그렇게 편안한 베개를 난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로도 더없이 좋았다. 내 얼굴에 나타난 기분을 읽어 내기도 했고, 이리저리 입술을 씰룩거리며 자기 기분을 존중해 줄 것을 내게 가르치기도 했다. 수프 먹을 때면 자기를 방해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내가 탱탱 만화책을 볼 때면 주둥이를 들이대며 귀찮게 굴지도 않았다. 난 페크를 이해했고 페크도 날 이해했다. 우리는 마음이 잘 맞았다. 내가 학교 생활을 썩 잘 해내지 못한다는 걸 페크는 알았고, 가족 생활의 몇 가지 규칙들이 페크를 부담스럽게 한다는 걸 나 역시 잘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서로를 위로해 주곤 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 난 루크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다. 루크는 또 달랐다. 태어난 지 넉 달이 되자, 이 보스 출신의 양치기 개는 더 이상 성숙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여섯 살이 넘은 지금, 40킬로의 몸무게, 씨름꾼 같은 어깨, 시커먼 주둥이 안의 정육점 갈고리 같은 송곳니에도 불구하고 루크의 정신 연령은 여전히 4개월에 머물러 있다.
“이 개는 완전히 바보야.”라고 엄마는 말한다.
하지만 엄마가 미소 짓는 걸 보면, 엄마도 그 말을 믿지 않나 보다. 사실 루크는 온 가족을 놀리고 있다. 루크의 바보 짓이 술수라는 건 그 눈빛만 봐도 누구든 읽어 낼 수 있다. 넓적한 엉덩이로 털버덕 주저앉아 머리를 떨구고 혀를 빼물며, 우리의 꾸지람을 장난처럼 받아들이는 루크는 ‘나한테 뭘 강요하지 말아요. 아시다시피 난 너무 바보라서……’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인간들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루크가 자신의 온갖 지력을 쏟아 부은 것은 바로 ‘절대로 똑똑해 보이지 말 것’이었다. 참으로 고단수의 지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험이 없진 않지만 귀찮은 일은 피해 가는,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꾸려 가고 있는 것이다. 푹신한 안락 의자와 식구들의 소란스런 대화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리고 가끔씩 어른들과 숲을 산책하거나 조카 애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엄마의 앞치마에 머리를 묻고 한 시간 가량 애무를 받는 일…… 루크는 우리에게 역할을 분담해 주었고 우리 모두는 그걸 해냈다. 그 대신 루크는 사람과 개가 함께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두세 가지의 원칙들을 지켜 나갔다. 그 원칙들이란 요컨대 자기와 상관 없는 일에는 주둥이를 처박지 않는 것이다.
페크와 루크 사이에 칸이 있었다. 불쌍하고 침울했던 칸,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몸에 배어 괴로움에 시달리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개. 칸은 세 마리의 개 중 가장 ‘똑똑’하고 제일 잘생겼으며, 누구라도 좋아했을 그런 개였다. 하지만 제 아무리 도베르만 혈통을 가졌다 해도 칸은 분명 누구보다 불행한 개였다.
도베르만……
19세기 독일의 세금 징수자였던 도베르만 선생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자기 이름을 자랑스레 개한테 붙여 준 그 양반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개의 혈통을 순수하게 이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개들을 분류하고 있는 그런 작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집 지키는 개, 아이 보는 개, 동반자용 개, 아파트용 개 등등…… 스포츠 카처럼 이러저러한 명칭을 붙여 주고, 사람들 앞에서 개를 전시하고, 예쁜 개 선발 대회에서 받아 낸 아름다운 메달을 집 안의 은식기처럼 진열해 놓으면서 개한테 낙인을 찍는 작자들 말이다. 미적으로 보면 대단한 성공작이긴 하다! 도베르만은 굉장히 아름다운 개니까.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냥개이다! 하지만 그 개들의 두뇌는 어떤가? 대부분의 도베르만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미쳐 버린다. 그 개가 받아 낼 고통을 알기나 하는가?
칸도 그렇게 미쳐 버린 개였다. 더욱이 불행했던 건 항상 미쳐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개가 우는 모습을 본 건 칸이 처음이었다. 고통과 후회로 제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진짜로 울었다. 완전히 미쳐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던 순간에는 나까지 물어 댔다. 자기의 송곳니가 누구 손을 물고 있는가를 깨우치자마자 칸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격렬하게 흔들면서 엄청난 눈물을 쏟아 내는 울음이었다. 찢어질 듯 긴 울음 소리는 딸꾹질 때문에 끊어지곤 했다. 난 옆에 기대 앉아 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개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 도베르만 씨와 순종 개의 핏줄을 지키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말해 주었다. 개는 울고 있었고 난 중얼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계속했다. 그러면 개는 신음 소리를 잔뜩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안 된다. 이 책은 개 꼬리를 자르고 개 귀를 잘라 버리면서 순종의 개만을 고집하는 미친 사람들에게는 절대 바치지 않을 것이다.
칸과 루크를 제외하면, 내가 기른 나머지 개들은 모두 튼튼한 잡종이었다. 팡투는 쓰레기 하치장에서 주워 왔는데, 털은 다 빠지고 온몸에 조그만 탄환들이 박혀 있었다. 화가였던 내 친구가 살려 낸 팡투는 우리 집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동생의 개인 프티는 맨 처음 동생 집에 숨어 들었을 때 테니스 공처럼 작았다. 수의사는 더 이상 자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요즘은 네 발로 서서 자기 머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 외에도, 오가며 마주친 수많은 다른 개들이 있다. 내 개의 친구들과 내 친구들의 개들을 비롯한 모든 개들…… 하지만 그들 모두, 지금 여기 내 주위에 둘러서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날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개들에 대해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말들을 너무 많이 해댔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경계심에는 이유가 있다.
게다가 내가 개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거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인간들에 대한 얘기다. 일테면 이런 거다. 여러분이 개를 갖고 있다면, 혹은 앞으로 개를 가질 계획이 있다면, 제발 부탁하건대 개를 길들이려고 하지 말고 개에게 길들여지지도 말라는 거다. 말하자면, 자기 개를 비굴한 아첨꾼이나 야수로, 혹은 자동 인형처럼 변화시켰다고 뽐내는 ‘주인들’이 되지 말라는 거다. 그런 자들은 언제나 “내 개가 얼마나 똑똑한지 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기 개의 영리함을 자랑하는 그 만족한 조련사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한없는 어리석음뿐이다.
하지만 개한테 길들여지는 사람이 되서도 안 된다. 개의 의지에 완전히 굴복하여 개 생각만 하는, 그리하여 개 얘기만 늘어놓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사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난 개만 한 마리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최소한의 훈련은 필요하다. 하지만 훈련이란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좋은 훈련이란 서로의 자존심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면 “개의 자존심이란 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건 개답게 살아가는 일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훈련사는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행동하고자 한다면 자기 곁에 사는 개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정의 규칙이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다. 만일 여러분의 친구 중에 개를 무서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개를 안아 보라고 억지로 강요하지 말아라. 설령 세상에서 제일 착한 개일지라도 말이다. 개를 무서워하는 건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종종 창피한 생각까지 들 텐데, 누구에게든 그 같은 수치심을 안겨 줘선 안 된다.
개에 대한 사랑을 비웃으며, 개를 사랑하는 건 인간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내버려 둬라. 바보 같은 소리니까.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두고 얼마나 많은 얘기들을 지어내며 떠들어 대는지 놀랄 지경이다! 일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를 한꺼번에 사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개와 고양이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둘 다 좋아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뒤퐁, 사라, 가브리엘, 티마르셀, 빙고 등등…… 내가 기르던 수많은 고양이들은 그 얘길 들으면 배꼽을 잡고 웃을 거다. 개나 고양이가 웃는다면 뻔한 얘기 아닌가……
왜 이 얘길 하냐면, 이 글을 쓰는 동안, 요 며칠 데리고 있는 친구의 개 장고가 책상 밑에 누워 있다가 머리를 치켜들고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맹세컨대 분명히 웃고 있다! (장고는 나처럼 고양이들을 아주 좋아한다.)
자, 이게 다다. 이것이 내가 하려던 얘기의 거의 전부다. 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해야겠다. 개와 함께 살기로 작정했다면 그건 평생을 말하는 거다. 개를 버려서는 안 된다. 절대로! 개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 점만은 잊지 말고 마음에 꼭 새겨 두기 바란다.
■ 옮기고 나서
우리 집 개는 행복할까?: 윤정임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들은 동물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우리 스스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동물과 우리가 서로 닮은 점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동물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게 인간이라서 그럴 것이다. 제아무리 동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한다 해도 인간의 테두리를 벗어나긴 어렵다. 그래서인지 어설프게 동물인 척하는 이야기들은 동물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려 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여간해선 공감을 얻지 못한다. 차라리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동물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인간의 생각과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인간을 이겨 내는 동물의 이야기 말이다. 『까보 까보슈』는 바로 그러한 기발한 상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개의 이야기이다.
우선, 이야기는 철저하게 개의 눈을 통해서만 전개된다. 개가 주인공이 되어 얘기를 풀어 간 책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이처럼 구석구석 개의 눈을 들이댄 예는 드물다. 예컨대, 사람이나 동물의 이름도 주인공인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들 사이에서 불려지거나 ‘개’가 지어 준 이름으로만 등장한다. 사람이 붙여 준 건 하나도 없다. 모두 다 개의 눈에 비친 얘기라는 걸 강조하려는 세심한 배려이다.
그리고 인간 못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 너머까지 상상하고 반응하는 개를 그려 내고 있다. 꿈을 꾸고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까지 계획하는가 하면, 수치와 분노를 느끼고 자존심과 자립심을 키우고 의리와 우정도 간직한다. ‘사람보다 나은 개와 개만도 못한 인간’이란 생각에 저절로 동감하게 되어 통쾌한 기분까지 든다.
이야기도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이어가지 않는다. 시간의 순서를 자유롭게 바꿔 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순하고 밋밋한 흐름을 막아 줄 뿐만 아니라, 개들도 우리처럼 시간의 경험을 입체적으로 할 수 있구나, 하는 즐거운 상상까지 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혈통 따윈 아예 모르며 너무 못생겨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는, 흔히 똥개나 잡종으로 여겨지는 개다. 그처럼 보잘것없는 개가 ‘개 같은 삶’이 아닌 ‘개다운 삶’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 나라 개들이 ‘보신탕 문화’로 수모를 겪는다면, 프랑스의 개들은 ‘바캉스 문화’ 때문에 적잖은 수모를 겪고 있다. 여름이면 한 달씩 휴가를 떠나는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개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거나 수용소로 끌려 간다고 한다. 개의 불행은 단지 휴가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책의 ‘개’처럼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하고,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며 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설사 좋은 주인을 만나더라도 인간의 변덕에 휘둘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개의 운명이다. 억울한 개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불행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들고 일어나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한판 신나는 복수전을 펼쳐 자존심을 되찾고 친구의 자리를 찾아 낸다.
자칫 어둡고 무거울 수 있는 얘기들이 흥미진진하고 유쾌하게 읽혀지는 건 무엇보다 넉넉한 익살과 유머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가의 솜씨 덕분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편견을 ‘개가 봐도 웃기는’ 꼬락서니로 속시원하게 꼬집고 있지 않은가!
한바탕 신나게 개들의 모험담을 읽고 나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개들이 정말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개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까지…… 사람이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개 역시 개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개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면 개 나름의 세계를 인정해 주고, 무조건 복종하도록 길들이기보다는 또 하나의 친구로 받아들일 것을 권하고 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우정이 자리잡기 시작하니까. 이젠 가끔 생각해 보자. ‘나랑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집 개는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까?’
1. 더러운 개!
2. 이상한 분위기
3. 출생
4. 시컴댕이
5. 여주인?
6. 도시
7. 조심해, 쥐야!
8. 산뜻한 기상!
9. 개 수용소
10. 진짜 두려움
11. 코맹맹이
12. 가재, 무 그리고 태양
13. 나만의 개
14. 잘 길들여진 여주인
15. 갈매기 만세!
16. 이름 짓기
17. 토하는 개
18. 내 개? 어떤 개?
19. 자존심
20. 도망
21. 하이에누
22. 하이에나 닮은 개와 멧돼지 닮은 남자
23. 유일한 해결책은 유혹
24. 뒤죽박죽인 아이들
25. 너무 행복해서……
26. 개들의 묘지
27. 이탈리아, 예술가 그리고 이집트 고양이
28. 사과!
29. 사과와 개
30. 개집
31. 창문으로 던져진 개
32. 길에서
33. 하이에누의 그늘 아래
34. 몇 명의 친구들
35. 무단 침입
36. 진주만 공격
37. 그리고 이제 그들을 기다린다
38. 아! 가엾은 사과!
39. 신나는 미래!
쓰고 나서
옮기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