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소개]
시집 『지평선에 서서』에서 ‘밭’은 일종의 시원이고 완결점이며, 삶의 현장이고 유토피아다. 시인에게 밭은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기쁨과 슬픔이 소용돌이치는 생명의 활동 장소다. 시인이 밭을 그렇게 보는 것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삶의 터전에서 공동체적 삶의 이상을 겨냥하는 특이한 정서를 갖고 있는 시인은, 그래서,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에서 새로운 지평선을 꿈꾼다.
[시인의 말]
한국 시단에 얼굴을 내민 지 어언 30년을 넘어선다.
1969년 11월이었으리라. 죽형 조태일 시인이 주관하던 월간 『시인』에 「머슴」 외 4편을 들고 김지하 시인과 나란히 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오늘까지의 시절이 정말로 3백 년 동안의 시공처럼 느껴진다. 3백 년 동안의 일이라? 그 동안 나는 베트남 전쟁의 참전과 유신 시대(혹은 긴급 조치 시대)와 광주에서 파도 치기 시작하였던 그 찬란한 두레 공동체의 총발현인 5 18 민중 항쟁을 내 시와 함께 걸어온 셈이다.
뒤돌아보면 꽃잎처럼 져버린 그날들은 그러나 그리운 시절이기도 하다. 정녕코 뿌리칠 수 없는 슬픔과 분노의 불꽃 속에서도 사람들은 온통 진정성에서만 솟구쳐나오는 ‘우리 모두’를 위한 담론과 싸움을 붙들고 실로 끝간데 없이 몸부림을 보여주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낙엽이 지고, 하늘 멀리에서는 한 세기를 마감하는 흰 눈이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좋다, 그러한들 좋다!” 나는 스스로에게 확실히 다짐하고 서는 저 相生의 본바탕인 논과 밭의 지평선으로 달려나간다. 인간의 무진장한 밥과 생명력과 사랑과 희망과 미래가 드넓게 출렁이는 지평선! 모성과 다산성의 원형질과 DNA로 그득한 저 푸른 지평선에 내 시와 오장육부와 노동의 쟁기 보습을 박아넣는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1999년 11월, 김준태
[시인의 산문]
안녕, 잘 있거라
Adieu, 20th Century!
방황과 죽음―장미꽃과 백합이
나팔 소리와 함께 짓이겨진 세월이여
사랑과 그리움이 그래도 지렁이처럼
꿈틀대던 시절이여
히노마루 바람 속에서
할아버지를 오사카 탄광에 빼앗기고
그해 6월 아버지는 산마루 너머로 사라지고
어머니도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하늘의 별과 달을 벗삼아 자랐다
마을을 콩 볶아대는 총소리 속에서도
아궁이를 지필 갈퀴나무를 긁으며 자랐다
조상들의 무덤 위에 수북하게 쌓인
안녕, 잘 있거라
Adieu, 20th Century!
히노마루와 성조기가
유난히 펄럭펄럭 나부끼던 세월이여
차라리 옛사람들이 온통 그리움으로 뒹굴던 시절이여
소월의 사랑시를 읽던 날 밤도 무서웠다
창밖에 부딪히는 칼끝 같은 나무 그림자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어야 했다
[……]
그렇지? 우리는 그 氣와 에테르가 내뿜어내는
무늬 사이로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길, The Third Way가
조금씩 조금씩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눈치챈다.
[해설]
밭, 시와 역사의 지평
김진희
살 속에서 구겨진 혼,
나의 시들은 밭으로 간다오.
푸른 잎새들이 춤추는 흙의 나라,
가장 깨끗한 노래를 만들기 위하여
1
김준태 시인에 대한 평가와 수식어는 다양하겠지만, 그가 주로 고향과 농촌을 창작의 근간으로 삼아왔음에 주목한다면 ‘밭의 시인’이라는 명명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번 시집에서도 역시 중요한 테마는 ‘밭’의 상상력인데, 제1부로 묶인 밭의 연작 시편 58편뿐만 아니라 비교적 현실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2부와 3부 시편들 역시 밭의 상상력 안에서 변주되고 있다.
1980년대말 ‘밭’시 연작이 고향과 농촌을 환기시키는 대지와 그 생명성의 강조를 통해 비생명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다면, 이번 시집에서 ‘밭’은 고향과 농촌을 아우르면서 미래의 역사와 시가 획득해야 할 시·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길을 찾지 못해 밭으로 갔다
저물 녘,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서
“흙 알갱이를 조금만 만져도 좋으냐?”고
물었다 남의 밭이었지만 밭은 통째로 풀꽃들을
흔들어주며 내게 깊고 축축한 흙고랑을 멀리까지
내주었다 그럼 좋지, 나는 아무런 씨앗이나 뿌려두었다
며칠 후 새벽, 이슬을 털고 다시 찾아가보았더니 밭은
갖가지 식물들의 얼굴을 내밀어주기에 바빴다 잎새들 푸른
정맥에 붙어 실낱 같은 푸른 길들을 일으켜세워주고 있었다.
―「멀리 가는 길 찾기―2000년 밭詩 1」 전문
시인은 1부에 묶인 작품들에 “2000년 밭詩”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다. 이는 그가 2000년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시·공간으로 ‘밭’을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과 2000년대 시의 전망을 밭의 상상력을 통해 추구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의 시가 세기말의 사회적 불안감과 시의 위기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포스트자본주의”의 폭위와 구제 금융의 현실, 그리고 대중 상품화되어 가는 시 문학의 행방을 지켜보는 우리에게 그는 21세기의 역사와 시의 나아갈 길을 단호하게 진술하고 있다.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라고. ‘밭詩’ 연작 중 제1편에 속한 위의 시는 연작의 서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두워가는 저녁 무렵 시인은 길을 찾지 못해 밭으로 들어간다. 밭은 씨앗을 뿌린 시인에게 잎새를 내어주며 생명을 키워내는 작업이 그가 선택해야 할 “푸른 길”임을 보여준다.
밭은 생명을 키워내는 공간이지만 인간의 노동이 투하되지 않는다면 쉽사리 생명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곳은 인간의 의지와 인내가 흙과 대결해야 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선택한 ‘밭’의 상상력은 단순히 생명력이나 창조력의 활기를 넘어서서, 이를 얻기 위한 인간의 의지와 신념까지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 설 때 김준태 시인의 시는, 미래로 가는 “멀리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역사와 시의 ‘밭’에 새로운 가치와 사상과 문화의 씨앗을 심으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농부들이 쟁기에 보습을 다시 갈아넣고, 아침 햇살에 불타오르는
자신의 그림자를 나무 십자가처럼 세우며 저 야만과 광기의 세월 속을
빠져나올 때, 밭은 아직도 확실한 희망과 그리움의 다산성이다
동해의 배꼽을 찢고 솟아오른 저 붉고
둥근 칼날 속에서 그러나 다시 태어나려는 자여
이제 그대는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 [……]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 부분
시인은 현대사가 걸어온 야만과 광기의 30여 년, 희생과 굴종을 강요받으며 십자가를 지고 견딘 우리의 역사가 “다시 태어날” 곳은 ‘밭’이라고 강조한다. ‘밭’이야말로 역사의 “묵은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썩혀서/그걸로 거름을 삼은 뒤, 새싹을 틔”(「밀레니엄―2000년 밭詩 4」)워낼 수 있는 확실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부가 씨앗을 뿌리듯 새 역사의 터전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 한다. 시인이 심는 노래의 씨앗은 대지에 메아리 친다. 가장 풋풋한 출발의 언어로 “가갸거겨고교구규…… 아야어여오요우유 ……”
이번 시집은 새로운 역사의 전망으로 밭을 제시하고 그 상상력 안에서 진정한 시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 시의 밭에 서린 현실과 역사, 노동과 숨결,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흙과 열매를 만나기 위해 그 밭으로 들어가야 하리라.
2
시인은 새로 올 역사의 장으로서 밭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밭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특히 생명력과 창조력을 지닌 풍요로운 육체로 표현하여 밭의 생성력을 강조하고 있다.
밭에는 소년이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쟁기질 솜씨를 잘 배운
소년이 먼 옛날부터 살고 있습니다
― 세월이 가도 늙을 줄 모르는 소년 덕분에
밭은 一望無際의 땅을 갈아엎어놓고
저만큼 강물도 불러서 가슴 설레는 것이었습니다.
―「소년―2000년 밭詩 2」 전문
김준태의 시에서 소년과 밭은 자주 병치되는데 위의 시에서 “할아버지”가 과거를 상징한다면 “소년”은 미래를 상징하며 영원한 젊음과 생명, 그리고 창조력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소년이 가진 덕목이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할아버지는 과거의 시간을 함축하는 존재로 과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힘과 혜안을 상징한다. 김준태의 시에서는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존재가 늘 긍정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정서가 그의 시에 역사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과 소년의 건강한 감수성을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년”은 문학 상징 속에서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 시에서도 역시 늙지 않는 소년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밭을 갈아엎어놓는다. 이는 소년 혹은 그 소년이 상징하는 밭이 가진 무한한 생성력과 힘을 의미한다. 이때 “강물”은 대지를 적셔 생명을 키워낼 생명수의 역할을 한다.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밭은 거칠 것 없는 광활한 대지이자 생성의 땅이다. 그런데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바로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나는 순환성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밭은 여성으로 전환된다.
씨앗들을 입에 물고 날개를 퍼덕이는 밭을 보라
지평선 가득히 하얗게 날개를 퍼덕이는, 오오 땀이
흥건한 여자의 사타구니 속처럼 생명체의 본바탕이
온통 꿈틀거리기만 하는 밭, 일망무제로 펼쳐졌나니
첫아이를 밴 여자의 젖무덤인 양 탱탱 젖이 불어오를 때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 부분
흔히 밭고랑에 씨앗을 뿌리는 행위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 행위로, 또 여성이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행위는 대지가 씨앗을 품었다가 열매를 내어놓는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 위의 시에서 밭은 “생명체의 본바탕”으로 꿈틀거리며 퍼덕이는 여성, 생명을 잉태한 풍요로운 육체로 드러난다.
언급했듯 밭이 영원한 젊음을 갖는 것은 대자연이 순환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은 대자연의 원리를 품고 있는 존재다. 시인 역시 이런 의미에서 대지의 모성을 노래하기도 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나!//어머니는 염색 기술자였습니다//누이의 옷엔 치자꽃 붉은 열매로 물들여주고/사내인 내게는 감물 든 녹청색 옷을 입혀주었습니다”(「어머니―2000년 밭詩 22」)라고. 그는 자연을 주관하는 힘으로써 여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도 달을 기준으로 그녀의 몸 안에서 삶과 죽음을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밭의 상상력 안에서 대지와 여성 그리고 달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아무도 없었다
바람이 솨르르 불어오고
달은 높이 떠오를 뿐이었다
종달새들만이 날아들어간 보리밭―
몇 방울 뜨거운 피가 흘러나와
낮 동안 피어난 민들레꽃들을
한없이 적셔대고 있었다
하늘의 달은 만삭이었다.
―「보리밭―2000년 밭詩 55」 전문
보리‘밭’이나 달은 모두 여성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이다. 또한 대지가 피를 흘린다는 표현 역시 여성의 생명 잉태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여성성을 축으로 하는 대지와 달의 유사성은 시 안에서 대지에 내린 생명의 씨앗이 하늘의 달에게 잉태된다는 비유적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이런 비유를 통해 생명 탄생에 인간과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그런데 한편 이처럼 피 흘림의 상처와 만삭으로 표현된 자연의 탄생은 인간과 자연의 친연성을 느끼게 한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식의 삶으로 순환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김준태의 시에서 많은 죽음들은 밭으로 스며들어 또 다른 생명들을 키워내고 있다. 그의 밭은 사람처럼 살아 숨쉬고 기침도 하는, 의인화된 공간이다. 따라서 “산은 자신이 만든 밭에다 사람의 뿌리를 심는다”(「산, 산, 산―2000년 밭詩 46」)라는 진술은 자연물과 사람 사이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 밭의 즐거움은 인간의 즐거움이고 밭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이다. 이런 의미에서 밭은 인간의 현실과 역사를 함축한다.
3
시인이 시를 쓴 지도 이제 30여 년이 된다. 시인의 시작은 파란 많았던 현대사 30년을 관통하고 있다. 60년대의 베트남전과 70년대의 유신 독재, 80년대의 5 18 민중 항쟁, 90년대초 백두산 기행을 통한 통일의 시까지 그의 시는 역사와 시대의 흐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가 부딪치는 90년대의 현실은 “모두 변했다/모두 다른 표정이다/모두 다른 곳을 본다/모두 다른 밥을 먹는다/모두 다른 의자에 앉아 있다/모두 다른 길을 가고 있”(「모두 변했다」)는 상황이다. ‘다르다’라는 것, 그리고 ‘혼자’라는 것이 시인에게는 문제가 된다. 동일한 이념이 부재하며,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길 바라는 90년대의 삶은 “불의에 대한 치 떨리는 증오도/학살자들에 대한 눈 부릅뜸도/사랑과 정의에 대한 열정도/꽃과 예술에 대한 그리움”도 사장시켜버린다.
1990년대의 사회·문화적 흐름은 동구권의 몰락과 문민 정부의 출현 그리고 이로 인한 집단적 이념의 와해와 이데올로기의 공백이 대중적 소비 문화와 개인성의 추구로 대체되었다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이런 90년대의 분위기는 80년대 그 “어제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 시인에게는 낯설고 문제적인 것이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거대한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찬란한” 거짓의 욕망들이 존재한다. 시인은 이런 현상이 물리적인 억압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비밀스러운 형태로 삶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구제 금융의 현실은 자본주의의 폭력을 훨씬 더 강도 높게 가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의식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노예화시킨다.
5 18 민중 항쟁 때
계엄군들이 오랑캐처럼 휘두르는
총은 엄청난 폭발음을 쏟아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사람들을 죽였다
17년 후, IMF에 편승하여
자본가들이 쏘아대는 황금의 총은
노예 시장의 뒷골목처럼 총소리가 나지 않는다
오오, 저 찬란한 자본주의의 소리 없는 총알!
광주 시민들을 때려잡은 총탄보다도 더 조직적이고
더 빈틈없이 피와 눈물을 빼앗아가는 저 고요한 총알 세례!
―「또 다른 총」 전문
위의 시는 구제 금융의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의 위력이 얼마나 교묘하고도 찬란하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굶주림과 배고픔에 지친 노동자들이 음모·배신·설탕·고자질·모함·적막함 속에서 쥐새끼도 모르게 각개 격파되는 폭력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눈물 한 방울이 하나의 민들레꽃처럼」). 이처럼 인간을 비인간화시키고 노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위력은 인간을 굴욕적으로 존재케 하는데, 가령 돈이 없으면 당장 죽어도 묻힐 수 없는 현실로(「자본주의―2000년 밭詩 26」), 또는 주먹 쥔 손이 아니라 돈을 구걸하는 빈 손바닥으로(「IMF 이후―2000년 밭詩 37」) 이 시대의 삶이 묘사될 때 그 처절함은 더해진다.
밥 한 그릇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자
지금까지 함께 걸어가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주먹을 휘두르며
싸운다……
아들은 아버지를 Right로 몰고
아버지는 아들을 Left로 몰고 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모래 沙漠 위에
부러진 뼉다귀
꽃도 될 수 없는
피만을 남긴다 ―「어떤 광야」 부분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이 시는 현실적으로 소유에의 욕망이 친밀한 인간 관계까지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함께 걸어가던 부자였지만 현실적인 이익에 따라 Right, Left로 편가르기를 하는 상황은 오늘의 현실과 닮아 있다. 시인은 이런 자본주의적 욕망에 휩쓸려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불모의 광야로 파악한다. 이는 이육사의 「광야」와 대조를 이룬다. 그의 광야가 새로운 역사의 씨앗을 머금은 생성의 땅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소멸의 땅이다.
‘밭’의 궁극적인 의미가 올바른 역사의 터전 혹은 새로 올 역사와 현실이 내디뎌야 할 길을 의미한다면 이때 현재가 뿌리내린 그 불모지의 역사에 대한 성찰 역시 필요할 것이다. 특히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주체로서 이러한 자의식은 미래의 전망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고 있다.
지난 역사에 대한 회오는 「Adieu, 20th Century!」에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은 “히노마루와 성조기가/유난히 펄럭펄럭 나부끼던 세월”과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던 베트남 전쟁, 그리고 5 18 민중 항쟁에서의 “군홧발” 소리 등 한국 현대사의 피투성이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도무지 서정시를 쓸 수 없던 시대”가 가져다준 “빨치산”이나 “토벌군” 그리고 “독재자”라는 어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며 베트남의 정글용 헬리콥터가 그의 안방으로 날아오는 환각(「헬리콥터에 대한 팬터지―2000년 밭詩 51」)에도 시달리고 있다. 때문에 그는 “아이들이 흙을 만지”며 노는 평화로운 시간에도 문득 “저 고운 손톱들도 가을이 오면/빨간 봉숭아꽃 물이 들겠지?!/그런데 말이야, 세월이 하 수상해도/피는 안 묻어야 될 터인데……?!”(「어린이 놀이터에서―2000년 밭詩 47」)라며 고통스런 역사의 재연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는 지나간 역사가 여전히 시인의 현재와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의미에서 지난 역사에 대한 성찰은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이 시인은 지난했던 한 세기를 보내고 한반도에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고 상상한다.
곰소에 가면
갑오년에 서해로 쫓겨나온
정읍 무장 고창 백산의 소나무들이
더 이상 바다에 뛰어들지 않고
검게 타버린 소금 바위에 뿌리내려
우우우우우 100년 200년을 울부짖는다
―「곰소의 바다」 부분
이미 우리들을 떠나 노래가 돼버린, 이미 지구 밖으로 날아가버린,
그날 저 완벽한 예술의 절정―무등산을 오르지
못하리라 오늘도 혹은 내일도 고름이 질질 흐르는
이 비틀거리는 더러운 부패한 몸뚱이로는!
아아 못을 박을 수 없는 거울!
―「무등산」 일부
시인은 곰소의 바닷가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며 갑오 농민 전쟁 때 “서해로 쫓겨나”오다 바다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의인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보여준 역사를 향한 애정과 한은 시퍼런 그리움으로 살아 아직도 울부짖고 있으며 검은 바위를 뚫고 뿌리내린 그 의지는 영원히 푸른 나무로 후대에게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생명의 힘은 서해의 파도와 뻘밭에 자신의 삶을 억척스럽게 바치면서 조선의 아들딸들이 줄줄이 살아가도록 하는데, 이는 고통스런 역사의 힘이 오늘의 우리가 살 터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등산”은 지상의 혁명을 위해 삶과 죽음을 하나로 완성한 사람들의 역사가 새겨진 신성한 공간이자, 이상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현재의 비틀거리고 부패한 삶으로는 결코 완벽한 절정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 한다. 몸뚱이에 못을 박는다는 것은 더러움과 부패에 대한 단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거울”은 무엇일까. 그 몸뚱이는 무엇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인가. 시인을 포함한 이 시대의 우리 모두, 그리고 지난 역사까지인가. 그 더러운 몸뚱이가 결국 오늘과 어제의 우리라는 점에서 스스로 못을 박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못을 박을 수 없다는 시인의 진술은 자신의 더러움과 부패함을 성찰하는 고통스런 절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그 고통을 넘어서는 한 모습을 아래의 시는 보여주고 있다.
두 아들은 48년 만에 그의 아버지를 보았다
당신의 옛집인 무덤을 파묘하여
고향 땅 선영 새집으로 이장해드리면서
두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뼈마디에 덕지덕지 붙은
질긴 쑥 뿌리와 친친 감긴 아카시아나무 뿌리를 털어냈다
가장 푸른 솔가지를 꺾어 그 솔잎 다발로
당신의 두개골 속에 가득 담긴 흙 알갱이를 털어냈다
〔……〕
두 아들은 햇살을 뿌려넣은 새집에 아버지를 안장해드렸다
그제서야 고향으로 가는 논길과 밭둑길이 눈에 들어왔고
내일 떠날 광주와 서울로 가는 길도 환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두 아들은 이내 흙 묻은 손으로 자신들의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와 아들」 부분
아들은 거짓 “뿌리”들에 휩싸인 아버지의 시신을 옛집에서 파묘하여 고향 땅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푸른 솔가지,” 고향의 흙이 키운 생명의 가지로 아버지의 시신에 묻은, 묵은 흙을 털어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처음으로 “육친의 체온과 숨결을 가슴속으로 깊숙이 받아들”이게 되고 48년의 세월 동안에도 식지 않은 아버지의 눈물이 두 아들의 몸으로 흘러들어간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과거와 미래가 이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이렇듯 지난 과거와 눈물겨운 화해를 통해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이유는 현재 우리에게는 그래야만, 또 “그제서야”만 비로소 앞으로 떠나갈 길, 그 머나먼 길이 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새로운 역사의 지평선에서 만나게 된다.
옛사람들 신발이
삭아서 흙으로 스며든
천리만리 지평선에
흰 눈이 내린다
11월 단풍나무처럼
허리를 수그린 육신들 위에
돌미륵마저
풀 구덩이에 파묻힌
천리만리 지평선에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못내 잠들 수 없는
그리운 님 하나 남겨둔다
아직은 꺼버려서는 안 될 불씨인 듯,
―「지평선에 서서」 전문
시인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광활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이 지평선은 옛사람들의 신발이 삭아서 흙으로 스며든 곳, 즉 이 대지 위에 살다 간 사람들의 노동과 그 자취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 끝없는 지평선 위에 눈이 내린다. 가히 장관이랄 수 있는 풍경! 하얀 눈은 허리를 수그려 노동하는 피곤한 육신들과 그들의 대지 위로 포근히 내린다. 그런데 그 대지에는 돌미륵이 파묻혔다. ‘미륵’이 등장하는 「익산에서―2000년 밭詩 58」을 참고해 이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인은 밭으로 무너져 흙과 함께 파묻혀 있는 미륵사지석탑을 상상한다. 그러므로 누워 있는 탑이자, 돌미륵인 밭은 미륵의 환생과 승천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 된다. 돌미륵의 환생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인간의 기원과 욕망을 함축한다면 그 그리움의 대상은 대지 안에 하나의 “불씨”로 잠자고 있다. 불씨는 불의 ‘씨앗’이다. 이때 밭은 그 불씨를 키워내는 곳, 즉 새로운 역사를 잉태한 창조적 공간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뿌리내린 이 대지가 불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은 문제적인 현실과 역사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넘어서려는 시인 의지의 발로로 보인다. 그는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다시/시작할 수 있어”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을 수 있어” “우리가/다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을 거야” “그리고 함께 갈 수 있는 길들이/달의 행로처럼 열려 있을 거야”라고 말이다(「낙월도」).
이처럼 이번 시집에서도 역시 시인은 현실은 ‘어둠’이고 ‘절벽’이지만 결국 나아갈 ‘모든 길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이는 김준태 시인의 30여 년 시작을 지탱시켜준 철학으로 그의 시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물질적인 폭위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진정한 생명력을 발현시키는,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현대사의 기억들로부터 미래의 자양분을 얻어내려는 시인의 의지는 이번 시집에서 밭의 상상력을 통해 개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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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자신의 시 쓰기를 밭에 씨앗을 심고 열매를 얻는 과정으로 상정한다. 특히 시인이 밭의 상상력을 중시하는 이유는 이 시대의 시들이 “탱탱한 불알”이 상징하는 생명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밭삼아 시의 씨앗을 심는데, “내게 남은 시(詩) 몇 뿌리가/둥근 양파 뿌리에 붙어 쑥―쑤욱 자라오른다(「양파 뿌리에―2000년 밭詩 16」). 밭이 식물을 키워내듯 시도 시인의 마음속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시인은 흰구름 산 아래로 내려간 밭”(「시인―2000년 밭詩 9」)이며, 그 ‘밭-시인’은 “먼 하늘 햇빛 달빛을/그 넓은 가슴으로 받아/밭은 언어 대신에/잎새는 하늘로 펴주고/열매는 거꾸로 매달아놓는다”(「밭은 철학을 한다―2000년 밭詩 54」).
기쁜 노래
슬픈 노래
가리지 않고
밭고랑
흙 알갱이 속마다
에헤라, 그것들!
죄다 씨 뿌려두었더니
가을엔 틀림없이 열매 맺는다
겨울을 이길 양식인 듯!
―「겨울 양식―2000년 밭詩 34」 전문
위의 시에서 열매의 씨는 곧 노래의 씨로 비유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이 겨울을 지낼 양식을 위해 봄에 씨앗을 심는다면 시인에게 겨울을 이길 노래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시인의 작품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겨울이 상징하는 시대의 불모성과 고통을 이기게 해주는 노래로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시(詩)의 페이지마다 단 꿀만을 은근슬쩍 발라”놓은 최근의 시들을 비판한다(「서점에서―2000년 밭詩 27」). 그런 시들은 가파른 세상의 슬픔을 노래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노래―2000년 밭詩 28」). 뿐만 아니라 언어란 아픔과 슬픔 속에서 더 눈부시게 빛난다(「말을 위하여」)는 믿음은 시란 인간의 아픔과 슬픔을 드러낼 때만이 진정한 빛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이란 겨울의 아픔과 슬픔을 이길 시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식물이 자라기 위해 물이 필요하듯이 시인의 시가 자라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슬픔’ ‘눈물’ ‘운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는 어쩌면 시인의 의지와 신념의 밑바탕에 놓인 소용돌이치는 아픔이 드러난 것으로 읽힌다. 시인으로서 ‘운다’라는 행위는 세계 안에 놓인 시인이 겪는 아픔을 생생하게 각인시킨다. 특히 시가 세계와 자아의 동일화를 꿈꾸는 장르라고 할 때 시인과 세계 사이의 간극과 그것을 메우려는 열정과 절망은 시인을 울게 만든다. 이 울음이 대지를 적시는, 즉 시의 밭, 시심을 일구는 생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둥근 달밤이었습니다
밭에 가서
마음껏 울었더니
슬픔은
그 울음으로
푸른 콩밭이 되었습니다
그 울음으로
붉은 수수밭이 되었습니다
그 울음으로
고추밭과 마늘밭이 되었습니다
―「밭에 가서 울었더니―2000년 밭詩 5」 일부
이번 시집에서는 ‘푸른색’이 주로 생명의 빛깔로 드러나는데, 특히 위의 시에서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선명한 대비가 울음이 가진 생명력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시적 상황은 둥근 달밤, 밭에 가서 목놓아 우는 시인의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둥근 달인 만월은 여성의 잉태를 환기시키면서 이 시의 생성적 이미지를 돕고 있다. 이때 ‘울다’라는 행위는 시인의 슬픔을 콩·수수·고추·마늘로 열매 맺게 하고 있다. 시인의 슬픔과 우는 행위가 밭을 일궈나갈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에게 슬픔과 울음이 없다면 제대로 된 시의 열매를 거둘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약 그런 과정으로 얻은 시가 아니라면, 시는 이 시대의 슬픔이나 아픔은 물론이요, 집 없는 어린 아이의 흥건한 콧물조차도 닦아줄 수 없을 것이다.
슬픔이나 고통 등은 인간을 자연스레 눈물 흘리게 만든다. 인간이 세상에 대해 슬퍼한다는 것은 그가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슬픈 노래밖에 부를 줄 모르는/때로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움막집 안에/하늘과 바다와 별들의 꿈을 넣어주는/시인”(「SOS 왕국의 사육제」)이 운다는 것 역시 인간을 가장 순정한 상태로 고양시키는 행위를 의미하며 이때 시는 슬픔의 뿌리 속에서 눈물을 먹고 자란다.
사람을
가장 순정하게
꽃피워올리는
오오, 슬픔―
너 찬란한 보석의 뿌리여,
―「슬픔―2000년 밭詩 31」 전문
위의 시에서 슬픔은 보석의 뿌리로 비유되고 있다. 그 보석은 인간을 가장 순정하게 꽃피운 상태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란 바로 슬픔과 눈물을 통해 만들어진 꽃이요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시에서 꽃이라는 식물은 보석이라는 광물과 함께 놓여 있다. 꽃은 보석을 통해 영원한 빛과 아름다움을 부여받는다. 눈물의 결정화인 보석의 시는 시인의 견고한 의지를 나타내며, 한편으로는 그 눈물빛의 광채가 사람을 감동시킨다. 눈물이 없다면 시는 피어날 수 없다. 속악한 세상에 대한 뜨거운 눈물이 시의 세계를 창조한다.
눈 내리는 밤
무너져내리는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서쪽으로 기울어진 도시를 바라보니
아아,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인 슬픔이여
그러나 나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 하나의 민들레, 민들레꽃처럼
멀리멀리 날아가 노란 씨앗을 터뜨리고 있었다
봄이 오면 이 강산 어디에서나
피고 지는, 다시 피어나는……
―「눈물 한 방울이 하나의 민들레꽃처럼」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은 눈 내리는 밤, 구제 금융의 현실이 가져온 실업자들의 절뚝거리는 삶과 자본의 힘에 떠밀려 흘러가는 이 시대를 생각한다. “기울어진”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고통과 슬픔은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런데 그가 흘리는 눈물은 꽃이 되어 노오란 씨앗을 터뜨린다. 함께 아파하며 함께 슬퍼하는 그의 마음은 시로 피어나 이 강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노랗게, 환하게 비추어준다. 식물이 씨앗을 내려 대지 위에서 피었다 지고 또 피어나듯, 시인의 슬픔의 밭에서 태어난 언어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려 읽히고 또 읽히는 영원한 시로 살게 된다. 그 ‘시’의 모습을 시인은 상상한다.
우리 고향
어디쯤, 내가 울다가
그냥 버리고 왔을
그곳에, 아하 참쑥 냄새
진하게 한 줌
뭉쳐 있을 것이려니 ―「詩―2000년 밭詩 52」 전문
시는 뭉쳐 있는 한 줌의 참쑥 냄새로 그려진다. 그 시가 태어난 곳은 고향의 ‘밭’이요, 시인의 순정한 마음의 ‘밭’일 것이다. 시인은 굳이 시를 자신이 “그냥 버리고” 온 것이며, 화려한 꽃도 아닌 “참쑥”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선 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아픔과 슬픔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의 세계가 고향의 들판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참쑥처럼 소박하고 생명력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덧붙인다. 이때도 역시 시인의 눈물은 대지를 적시는 물로 참쑥을 키워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시인은 왜 시가 참쑥이 아닌 참쑥의 냄새라고 했을까. 향기는 한 존재의 현존을 더 멀리까지 퍼뜨린다. 그만큼 시가 널리 퍼져나가길 기대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민들레 꽃씨가 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김준태 시인은 바로 이전 시집인 『꽃이, 이제 지상(地上)과 하늘을』의 「후기」에서 자신이 앞으로 쓰고 싶은 시는 “남쪽 사람이 읽어도 구수하고 북쪽 사람이 읽어도 구수한 그런 시”라고 했다. 이번 시집에서 그가 지향하는 밭에서 자라는 참쑥 같은 시가 그런 시들이 아닐까. ‘밭’은 한민족 누구에게나 친근한, 근원적인 공간이다. 그런 터에서 자라는 참쑥 같은 시는 누구에게나 정겹고, 구수하기에 ‘참’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건대, 김준태 시인은 김제 평야에 가까이 살고 있기에 그 광활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과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된 한반도의 역사와 시의 길을 호방하게 꿈꾸는 것 같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인간의 역사, 시의 역사가 숨쉬는 ‘지평선에 서서’ 밭의 이야기, 흙의 책들을 펼쳐놓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불씨’를 찾으며, 시의 길을 인도하는 ‘씨앗’의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시인의 다채로운 생명의 노래가 현실의 문제를 끌어안고 21세기 역사의 밭을 살아내는, 그 다음의 시들을 기대해본다.
[시인의 말]
제1부
멀리 가는 길 찾기
소년
밤 12시
밀레니엄
밭에 가서 울었더니
사람도 밭이 되는 건가
할머니의 손
寓話
시인
희망
느티나무
단풍
걸레와 밭
컴퓨터
예언
양파 뿌리에
개구리 울음 소리
베트남
가족
무신론자
풍경
어머니
식칼
고백
금붕어를 강물에 띄워 보내다
자본주의
서점에서
노래
귀향
배고픔도 별이 되어 빛나는구나
슬픔
나의 원시 신앙
밥그릇
겨울 양식
감나무
저녁에
IMF 이후
빵 한 덩어리
고향
찔레꽃
마음이 아프면
아이들
신화
기계 속에다 밭 만들기
제3의 길
산, 산, 산
어린이 놀이터에서
평화주의자
서울
갈매기섬
헬리콥터에 대한 팬터지
詩
황혼의 마을
밭은 철학을 한다
보리밭
전설 그리고 옛사랑
전화
익산에서
제2부
지평선에 서서
낙월도
새벽
어떤 광야
제비
사람의 몸을 노래함
곰소의 바다
고요하다[寂]!
정주영 할아버지
봄, 봄, 봄
강변 이야기
눈물 한 방울이 하나의 민들레꽃처럼
모두 변했다
Adieu, 20th Century!
아버지와 아들
모든 길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제3부
지평선
SOS 왕국의 사육제
그 길
또 다른 총
세상의 등불은 모두 여자들이 켠다
좋은 세상
말[言語]을 위하여
무등산
엑스터시
흰 저고리
달
가을에 여자들을 노래함
겨울 여행
갈매기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
[해설] 밭, 시와 역사의 지평·김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