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의 환상 문학은 주변부에 머물던 그들의 문학을 세계 문학의 중심부에 자리잡게 만든 주인공이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던 제국주의 언술을 대체하고 해체하려는 주변 문화의 의식적인 창작 행위였다. 이런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특징은 무한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기획의 말]
요즘 ‘환상 문학’ ‘판타지 문학’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환상 문학’이 세계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통신 문단에서 ‘판타지 문학’이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면서 이 두 용어는 우리 문학에 친숙한 말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것들의 차이는 제대로 구별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환상 문학과 판타지 문학이란 용어는 유사한 듯이 보인다. 환상 문학은 21세기를 이끌 문학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판타지 문학은 아직 ‘문학성’이란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환상 문학이 전통적인 문학 구조에 대한 반발이며 혁명이었지만, 판타지 문학은 문학 형식의 의식 없이 단순히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들만을 사용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환상 문학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절정도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국내의 독자들이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을 음미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흐름을 보여주고, 위기에 처한 한국 소설이 어떻게 탈출구를 찾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지금까지 국내에는 두 권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선집이 출간되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라틴아메리카 단편소설의 대표작을 선정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반면에 이 책은 환상 문학적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다양한 양상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20세기가 마감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미래를 예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현대 문학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20세기 소설의 스승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환상은 세계 문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영화나 철학, 사상, 예술 분야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라틴아메리카의 환상 문학은 주변부에 머물던 그들의 문학을 세계 문학의 중심부에 자리잡게 만든 주인공이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던 제국주의 언술을 대체하고 해체하려는 주변 문화의 의식적인 창작 행위였다. 이런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특징은 무한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독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천히 깊게 읽는다는 것, 즉 독자들이 한 번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라 여러 번 읽으면서 자신들의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진정한 환상 문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위기에 처한 우리 문학이 추구해 나아가야 할 길이다.
1999년 9월, 기획위원
[역자 후기]
환상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종종 “도대체 환상 문학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20세기 후반 들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전 세계에서 위용을 떨치면서, ‘환상 문학’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꼬리표처럼 붙어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항상 대답하기가 망설여진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문학 작품이 환상 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지만, 그것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지금까지도 진공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상성이 특정 범주 내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모든 문학 장르에 도전하여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으로 문학이 ‘고갈된’ 시대에 라틴아메리카 환상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이자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었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거창한 용어로 설명되기도 했고,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 환상 소설을 연구하기도 했다. 동일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런 모순적인 이론들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대의 진리를 설명해주는 것 같은 이런 이론들은 시대가 지나가면 한낱 역사의 한 장으로만 남지만, 라틴아메리카 문학 작품들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특정한 이론의 틀 속에 빠지지 않고,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선집은 라틴아메리카의 환상 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흔히 라틴아메리카 환상 소설하면 우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 선집에는 그들의 이름이 빠져 있다. 도대체 그들의 작품이 빠지고서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 선집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 이런 의문은 이 책을 접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지닐지도 던질지도 모르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선집에 걸맞은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로 유명한 작가들이다. 물론 그들도 단편을 쓰긴 했지만, 그들에게 단편은 장편을 쓰기 위한 습작일 뿐이며, 오히려 그들의 환상성은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에 보다 심도 있게 녹아들어 있다. 한편 보르헤스 작품의 경우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있는 관계로 제외했다.
우선 이 선집에는 미겔 카네의 「세이렌의 노래」, 루벤 다리오의 「아멜리아의 경우」, 오라시오 키로가의 「깃털 베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세 작품은 에드가 앨런 포의 영향을 보여주는 라틴아메리카의 초기 환상 소설에 속하며, 그 후에 본격적으로 선을 보이게 될 환상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특히 「세이렌의 노래」와 「아멜리아의 경우」는 “시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무섭고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아마도 형이상학의 가장 생동적인 문제일 것이다”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또한 「깃털 베개」는 20세기초 최고의 중남미 단편으로 손꼽히며, 중남미 환상 문학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한편 마리아 루이사 봄발의 「나무」는 1939년에 발표되었지만, 그 동안 묻혀 있다가 1970년대 들어 조명받기 시작한 작품이다. 보르헤스의 작품과 더불어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뿐만 아니라 초기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콘서트는 처음부터 구조적 틀로 작용하면서, 현실에 대한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접근을 가능케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브리히다는 콘서트를 듣는 동안,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음악의 기술적인 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 음악이 야기한 감각을 느끼는 데 전념한다. 기억과 음악이 서로 연결되면서, 달콤한 선율의 모차르트는 그녀에게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만들며, 열정적인 베토벤의 음악은 결혼 후의 생활과 그녀가 사랑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쇼팽의 멜로디에서 그녀는 자기 남편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염원하는 자유 행위라고 생각한다.
『모렐의 발명』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파울리나를 기리며」에서 사랑의 문제와 환상을 접목시키고 있다. 비오이 카사레스는 차가운 상상력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의 작품과 일맥상통한다. 보르헤스가 환상적 차원에서 스토리텔링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 것과는 달리, 비오이 카사레스는 치밀한 작품 구조를 통해 독자들이 환상을 현실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보르헤스는 그를 ‘환상 문학의 스승’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한편 비오이 카사레스의 아내인 실비나 오캄포의 「울리세스」는 신화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서 사랑의 미약을 먹고 변신하고, 또 다시 변신하는 끝없는 순환의 고리를 보여준다.
환 룰포는 소설 『페드로 파라모』와 작품집 『불타는 평원』만 출판한 작가지만, 최소의 작품으로 최대의 명예를 거머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대표자다. 「우리에게 땅을 주었습니다」는 멕시코 혁명의 허상을 밝혀주는 작품으로 농지 개혁을 통해 농민에게 땅을 나누어주지만, 실상은 쓸모 없는 땅을 분배하고 있음을 밝혀준다. 이런 것을 우회적 환상적으로 표현하면서, 작가는 혁명의 가면 속에 숨겨져 있는 속셈을 파헤친다.
또한 단편 전문 작가인 환 호세 아레올라는 「역무원」에서 ‘철도’로 상징되는 리얼리즘 상황을 점차로 와해시키면서 독자들을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그리고 이런 기법을 통해 작가는 멕시코 사회와 지도 계층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속임수’가 주요 주제로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철도 회사에 의해 기만당한 승객들, 철도 지도층에 의해 조종되는 시민들, 방향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등장하면서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연속된 공원」은 장편(掌篇)에 속하는 짧은 작품이지만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걸작이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과 흡사하게 엇물려 전개되는 이 작품은 소위 ‘액자소설’의 기법뿐만 아니라 20세기를 마감하는 현대 글쓰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인 로사리오 카스테야노스의 「요리 강습」은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부엌을 반복적인 일만 하는 비생산적인 곳으로 여기면서 여자들이 가장 먼저 벗어나야 할 곳이라고 말한 것과는 달리, 카스테야노스는 이 작품에서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익명의 여성 화자를 통해 요리법과 성생활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부엌도 창조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그녀는 스테이크를 기름에 튀기는 비교적 쉬운 요리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붉은 고깃덩이를 통해 자기가 첫 성경험을 했을 때 드러냈던 붉은 살을 연상한다. 또한 얼룩 하나 없는 깨끗하고 하얀 주방은 핏물이 떨어지는 고깃덩이와 결혼 첫날밤 침대에서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고 있던 피와 중첩되어 전개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녀는 남성의 권위와 논리로 지배되는 세상에 의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과 이사벨 아옌데의 『아프로디테』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의 페미니즘을 작품 내에서 구현하고자 시도하는 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틈새」는 현대인이 어느 날 갑자기 겪게 되는 조그만 틈새를 벽의 조그만 틈이 커다랗게 발전하는 것과 연결시키면서, 환상이 현실로 교차하는 과정을 블랙유머를 통해 구사한 작품이다. 한편 루이사 발렌수엘라의 「탱고」는 남성주의 춤의 대명사인 탱고를 통해 현대 아르헨티나 여성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남성주의처럼 보이는 탱고의 주도적인 역할은 파트너를 선정할 권리가 있는 여성임을 시사한다.
이렇듯 이 선집은 라틴아메리카의 환상 문학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는지 보여준다. 주제면에서 살펴볼 때 어떤 작품은 ‘순수 환상 문학’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들은 환상을 현실 비판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라틴아메리카 페미니즘의 특성을 밝혀주기도 한다. 그리고 형식면에서는 초기의 환상 문학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194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 현대 작가들이 쓴 작품은 실험적이거나 비교적 난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와 루이사 발렌수엘라에서는 어려운 환상 구조가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사회 비판을 포함한 리얼리즘 구조와 접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집에 수록된 작가들은 사실 국내에 그리 많이 소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작가들이 단편소설의 대가들이며, 그들의 작품은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유럽 등지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이름이 국내의 독자들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을 수용할 때 주로 미국의 영향권 내에 있거나 서구의 문학 이론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가들만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 선집은 종래의 이런 관습을 버리고, 환상 문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읽히고 연구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선정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 선집에는 다섯 명이라는 비교적 많은 수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흔히 중남미 현대 소설이라고 불리는 ‘붐 소설’을 살펴보면, 여성 작가들이 전무한 실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붐 소설’을 남성주의 문학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1980년대말에 들어서면서 소설의 판도는 바뀌었고, 많은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현실과 환상의 문제를 훌륭하게 조화시킨 작품을 출판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작가들은 “남자들은 역사를 만들고 판도라의 딸들은 역사일 뿐”이라는 종래의 생각을 불식시키고, 라틴아메리카의 여자들도 남자들과 함께 역사를 만들 뿐만 아니라 역사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과 더불어 환상적인 작품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999년 9월, 송병선
[기획의 말]
세이렌의 노래 미겔 카네
아멜리아의 경우 루벤 다리오
깃털 베개 오라시오 키로가
나무 마리아 루이사 봄발
파울리나를 기리며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울리세스 실비나 오캄포
우리에게 땅을 주었습니다 환 룰포
역무원 환 호세 아레올라
연속된 공원 훌리오 코르타사르
요리 강습 로사리오 카스테야노스
틈새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탱고 루이사 발렌수엘라
[역자 해설] 환상 문학이란 무엇인가? 송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