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상징

원제 Philosophie de volonte

폴 리쾨르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9년 9월 10일 | ISBN 9788932011011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330쪽 | 가격 23,000원

책소개

인간의 원초적 체험인 악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있는 이 책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번역 소개되는 폴 리쾨르의 저서로서, 존재와 언어, 도덕과 신앙, 자아와 세계의 문제에 대한 폭넓고도 근본적인 사유가 담겨 있다.

[폴 리쾨르의 사상과 『악의 상징』]

오늘날 세상은 새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 서양은 서양대로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대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새로운 길이란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을 말한다. 서양으로 말하자면 그 동안 문화의 기틀을 이루었던 현대성(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함께 몇 가지 길이 제시되고 있다. 대개 세 가지 방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탈현대주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자크 데리다와 미셸 푸코, 프랑수아 료타르 등이 그 선봉에 서 있다. 그들은 현대 정신이 고양한 인간의 주체성과 합리성을 제약하고 탈역사를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인간 해방을 모색한다. 그 맞은편에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계몽주의 정신, 곧 현대의 합리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서양의 위기가 기술 합리성에 치우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기술 합리성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초래한 획일화를 치유할 대안으로 상호 행위interaction 곧 커뮤니케이션을 내세운다. 상호 행위야말로 기술 합리성의 일arbeit과 달리 윤리를 낳는 프락시스praxis로서 근대 합리성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제 제3의 길로 폴 리쾨르의 해석학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리쾨르는 해석학을 밀고 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하버마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대를 넘어서는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우리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세계관이 항상 윤리력을 견지하고 있음을 분명히해두어야 하겠다. 그는 여러 세미나에서도 그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윤리라 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분출되는 새로움을 가리킨다. 그 새로움은 새 세상을 넘보고 일군다. 새 세상을 향한 역동성은 리쾨르에게서 줄곧 언어의 상징성과 연관되었지만 비교적 최근에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직접 다루었다. 윤리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작업에 있어서 그가 맞상대로 염두에 둔 사상가는 20세기 최대의 윤리학자라 일컬어지는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다. 여기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소개할 필요는 없지만 리쾨르의 해석학은 윤리 문제로 직접 넘어가면서 레비나스를 만나고, 레비나스를 경청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제3의 길을 간다. 레비나스는 탈현대주의자라 할 수는 없지만(그에게는 언제나 정의론이 핵심이다) 탈현대주의자들에게 다름alterite을 가르친 사람으로 지극히 예언자답다. 리쾨르는 레비나스보다 덜 예언자답지만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인간과 사회를 분석하여 길을 보여준다. 유대인 계통인 레비나스처럼 리쾨르 역시 성서의 영성을 철학의 바탕에 깔고 있다. 여러 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신론 문제를 다룬 책(Heidegger et la question de Dieu, Paris, 1980)의 짧은 서문에서 리쾨르는 “왜 하이데거는 횔덜린을 말하면서 시편과 예레미야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할 만큼 성서의 영성을 중요시한다. 리쾨르가 그리스도교 영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서구의 존재론이 윤리성과 책임성을 비껴가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존재의 문제나 존재 철학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레비나스나 마리온(Jean Luc Marion: 릴 대학의 주목할 만한 가톨릭 철학자·신학자)이나 탈현대주의자들과 다르다. 그들은 독일의 관념론(3H 곧 헤겔, 후설, 하이데거)을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보고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라고 본다. 그리고 보편화 뒤에 숨어 있는 존재론적 구조의 폐쇄성을 파헤친다. 사실 근대 기술과학은 비슷한 것은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발전했다. 현대는 동일성 또는 정체성identity의 철학에 의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정체성의 문제를 ‘la memete’ ‘ipseite’ 나누어 자기 정체성 문제를 폐쇄적으로 볼 수 없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ipseite’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 정체성이다. 그것은 타자 곧 남(가장 다른 것은 다른 사람이다: 레비나스)과의 만남이 원초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은 관념론적 정체성을 배격한다. 동시에 도무지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는 전적 타자성만 말하는 레비나스의 견해도 배격한다. 그러면서 그 둘이 말하려는 것을 모두 존중한 입장이다. 그 점을 직접 다룬 것이 1990년에 출간된 『남 같은 나 Soi-meme comme un autre』이다.

사실 그의 해석학이 항상 그런 구도에 서 있다. 주관 철학과 객관 철학을 넘는다. 넘되 그냥 쉽게 넘지 않는다. 양쪽을 인정하며 그 둘의 긴장으로 그 둘을 넘는다. 한쪽에서는 데카르트 이후 모든 존재 물음을 주체의 의미 물음으로 바꾼 주체 철학이 있다. 그는 후설 현상학의 에포케에서 철저한 학문 방법을 배우고 지향성에서 주체 철학을 배웠다. 그리고 칸트와 장 나베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저쪽에서 오는 존재의 신비를 가브리엘 마르셀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그는 주체 철학을 존중하되 주체의 의식(의식은 의지다)으로 좌우할 수 없는 무엇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사고의 결과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1949)이다.

철학의 주제는 언제나 “주체란 무엇인가?”인데, 근대 관념론이 내세운 자신만만한 주체는 그렇게 수정된다. 그러한 수정에는 실존주의 영향도 있고 구조주의의 영향이 있다. 리쾨르는 구조주의의 공헌을 인정하면서 문제삼는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레비-스트로스가 선언한 대로 “주체의 제약”이다. 주체 바깥에 있는 어떤 객관적 구조가 주체의 조건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 구조는 가다머가 말하는 영향사Wirkungsgeschichte에 의한 레벤스벨트에도 들어오지 않는 공시적인 것이다. 통시적인 시대 사건에 따라서도 변치 않는 무엇이다. 그러한 구조주의는 언어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소쉬르는 랑그와 파롤을 구분하고 파롤의 사건성보다는 랑그의 선험성을 언어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것은 기호론을 발전시켜 주체 제약에 들어갔다.

그러나 리쾨르가 볼 때 기호론은 언어를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환원한다. 후설의 주관적 환원과 방향이 반대되는 또 하나의 환원이다. 그리하여 리쾨르의 언어철학은 랑그보다는 파롤에, 낱말보다는 문장에, 소쉬르의 기호론보다는 벰베니스트의 의미론에 더 비중을 둔다. 물론 구조주의의 공헌을 인정한다. 그래서 한 낱말의 객관치 없이 문장이 이루어질 수 없고 랑그 없이 파롤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낱말은 문장 안에서 그 객관치를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파롤은 랑그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딛고 넘어선다. 그리하여 리쾨르는 공시성보다는 역사를, 객관적인 구조보다는 주체가 일으키는 사건을 중시한다. 기호론에서 언어는 차이밖에 없어 한 낱말의 뜻은 다른 낱말과 차이로 이루어지므로 기의(시니피에)가 언어 바깥의 무엇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리쾨르는 언어의 지시성reference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리켜 언어의 존재론적 특성이라 부른다. 그가 말하는 언어의 존재론적 특성은 상징 이론과 연결되면 세상을 바꾸는 윤리성으로 연관된다. 그처럼 리쾨르의 존재 철학은 상징을 푸는 해석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주체를 중시하는 반성 철학의 자리에 서서 주관주의를 넘어서는 역동성을 지닌다. 주체가 주관주의에 갇힐 때 결국 타자성이 배제되고 신비가 사라져 숨막히는 동일성의 이데올로기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의들을 담은 것이 해석학 제1집 『해석의 갈등Le conflit des interpretation』(1970)이며 텍스트 이론을 행동에까지 발전시켜 사회철학으로 발전된 것이 해석학 제2집 『텍스트에서 행동으로Du text l’action』(1986)이다. 한편 그 사이에 나온 『해석에 대하여: 프로이트 연구De l’interpretation: Essai sur Freud(1965)는 의식을 중심으로 전개된 주체 철학을 제약하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상징 이론으로 연결시켜 해석학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살아 있는 은유Le metaphor vive』(1975)는 본격적으로 언어의 상징성을 탐구한 책이다. 한편 말뿐 아니라 행동까지 해석해야 할 본문으로 본 그의 해석학은 마침내 인간의 시간 체험을 이야기와 연결시킨 거대한 시간론을 정립한다. 그것이 세 권에 걸친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ecit』(1983∼1985)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언어철학은 이야기론이 된다. 시간 체험은 삶의 체험이며 삶이란 행위로 이루어지고 이야기는 그런 행위의 모방이다. 행위의 모방인 이야기는 줄거리를 통해 삶의 단편들을 모으고 엮지만 이른바 사실과는 언제나 거리가 있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며 그 점에서 모든 이야기(역사를 포함)는 픽션이다. 픽션이 갖는 거리, 리쾨르에게 있어서 거리는 상징성이고 따라서 창조적 거리다. 이야기는 새 세상을 향한 희망이다. 인간의 시간은 할 얘기와 함께 경험되며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한, 시간 체험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체험이다. 리쾨르의 시간론은 이미 인류의 미래를 위한 귀한 메시지로 주목받고 있으며 20세기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감당한 역할을 21세기에 감당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리쾨르의 정치철학은 두 권으로 된 『강의Lectures』(1992)에 실려 있다.

『악의 상징』(1960)은 리쾨르가 본격적인 해석학자로 자리잡기 전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의 서론과 결론이 그 점을 보여준다. 악의 문제를 택한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먼저 현상학적 되풀이를 통해 악의 고백을 찾아낸다. 그 고백들은 사유되지 않은 부르짖음이요, 탄식이요, 두려움의 외침이다. 그처럼 고백을 통해 체험은 언어 속으로 들어온다. 그 언어들은 상징 언어요, 일차 상징들이다. 자기 이해를 물리적인 표현으로 한 것들이다. 그러한 일차 상징의 해석이 신화다. 그러므로 신화는 2차 상징이다. 신화의 해석이 반성 철학의 합리적 진술이다. 그 상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반성된 결론으로는 악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악의 고백이나 신화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차 상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해석의 작업을 한다. 그때에 악의 가능성이 아닌(성급한 반성은 악의 가능성만 알려줄 뿐이다) 악의 현실성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인간의 현실 그것은 해석학을 통해 얻어진다. 그리고 그 해석은 결국 상징을 해석하는 것인데, 어떤 전이해가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해석학적 순환이 생긴다. 전이해가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가 어디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저쪽으로부터의 계시 속에 내가 개입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그처럼 전이해가 있어야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믿어야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 내가 주체적으로 해석할 때 그 전이해가 작동하는 것이다. 결국 해석학적 순환이란 “믿어야 안다, 그러나 알아야 믿는다”고 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의 명제와 같이 간다.

이 해석학적 순환이 어떻게 근대의 합리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까? 해석도 생각으로 하지만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각나는 생각’이 있고 ‘생각하는 생각’이 있다. 근대 이후 주체 철학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요리했다. 그것은 자율적 인간의 책임성을 고양하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상징의 해석은 생각나는 생각이 없이 불가능하다. 상징이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일으키는 직접적인 생각 없이 생각하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후자는 믿음의 차원 곧 존재가 내게 말하는 차원이다. 전자는 반성의 차원 곧 존재 물음이 의미 물음으로 바뀌는 차원이다. 결국 리쾨르의 상징론은 근대 합리성의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존재의 신비를 실존의 또 한 축으로 삼아 둘 사이의 역동적 순환을 본다. 그리하여 결론에서 말하는 대로 그의 해석학은 현대의 산물이지만 현대를 극복하게 해준다.

한편 그러한 해석학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이 책은 악의 문제에 관한 고전으로 꼽힌다. 그 방면에서 우리의 지식을 넓혀주고 인식을 새롭게 해준다. 물론 서구인의 체험을 다룬 책이다. 그러나 악의 세 차원의 문제는 우리의 경험에도 상당히 비슷하게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흠le suillure과 죄le peche와 허물la culpabilite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악의 체험에 섞여 있다. 흠은 금기와 터부로 이루어진 원시 종교의 악체험이다. 죄의식은 인격적인 존재와의 관계 단절의 체험으로 누구에게나 ‘들어 있는 악’이다. 허물은 죄가 내면화되고 세분화되어 ‘저지르는 악’이다. 그것은 합리성의 차원에서 측정되는 악 곧 사회 규범을 어기는 문제다. 그러므로 죄와 달리 허물은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윤리는 죄의식에서부터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악의 문제를 주로 흠의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아직 원시 종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때에는 자신의 깊은 회개 없이 겉에 붙은 때를 제거하듯 주술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한편 허물은 죄의식의 발전이다. 그러나 죄의식 없는 허물 의식은 율법주의의 폐쇄성에 빠진다. 도덕 규범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서로 정죄하고 정죄받는 피곤한 사회가 된다. 그러므로 내게 ‘들어 있는 악’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때에 민족의 뿌리깊은 회개가 가능하다. 죄의식은 우리의 뿌리깊은 악을 드러냄으로 회개도 뿌리깊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뿌리깊은 회개는 뿌리깊은(래디컬한) 개혁의 요청을 듣는다. 자신과 사회의 개혁이다. 물론 개인화된 허물 의식의 발달 없이 죄의식은 잘 발달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문제도 거기에 있다. 잘못한 사람의 잘못을 가려 그에 합당한 벌을 주려고 할 때 “주머니 털어서 먼지 안 날 놈 있나?”는 논리로 바라본다. 재수 없어 걸렸다는 생각이 짙다. 그것은 오랫동안 사회 정의가 왜곡된 데서 오는 반발이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있는 뿌리깊은 죄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회개의 차원으로 발전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차원으로 발전된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삶의 토양이 척박해진다.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사회 규범을 의식하는 책임적 허물 의식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래디컬한 개혁성을 잃지 않기 위해 종교적인 죄의식이 필요하다. 전자는 도덕의 문제요 후자는 신앙의 문제다. 신앙은 도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자신과 우리 사회를 위한 이러저러한 중요한 통찰력을 얻으리라고 믿는다.

– 1994년 2월 잠실에서 양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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