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시들에서 강렬하게 나타나는 일상에의 우수와 조직 사회에 대한 비판들을 한 걸음 더 진폭·심화시킨 이 시집은 새로이, 부정의 정신을 짙게 깔면서 오늘의 개인적 집단적 삶에 대한 지적 성찰을 집요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의 산문]
ㄱ과 ㅎ 사이를 오고가는 흔들이가 있다고 하자. 이때 ㄱ을 꿈이나 환상, 또는 감성이라고 하고, ㅎ을 삶이나 현실, 또는 이성이라 한다면 이 흔들이의 운동은 크게는 역사적 사조의 흐름으로부터 작게는 개인적 욕망의 진폭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조화의 원칙과 질서의 공식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문학에 적용해 본다면 흔들이의 위치 ㄱ, ㄴ, ㄷ, …ㅍ, ㅎ들은 바로 문학의 본질적 특성과 시대적 위상 및 사회적 기능을 나타내게 된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는 시가 꼭 ㄱ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ㅎ에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ㄱ과 ㅎ의 중간에서 그 이상적 좌표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는 위치도 흔들이의 운동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씌어진 작품이 있든 그것은 시의 한 형태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시는 옛날에 모두 ㅎ에서 비롯되어 ㄱ 쪽으로 발전해왔다. 우리의 시는 과연 이 흔들이의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ㄱ으로부터 ㅎ의 방향으로 움직여 온 20세기의 우리 시는 1970년대 후반에 ㅅ, ㅇ, ㅈ쯤에 이르렀다가 1980년대에 접어들자 ㅎ까지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완성하지 못한 채 다시 ㄱ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흔들이의 운동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 때 가장 그것답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