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에서 시인은 가시적인 세계의 뒤 혹은 밑에서 음흉하게 또아리고 틀고 있는 현대 사회의 치부를 투시하면서 그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비루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싱싱하다. 그것은 그가 참담한 삶의 진상을 똑바로 보면서 스스로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역설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역설의 인식과 드러냄이야말로 병든 시대와 싸울 수 있는 가장 탄력적인 힘이 된다. 최승호의 신선한 시는 여기서 더욱 주목되어야 한다.
[시인의 산문]
동굴 속에서 동굴 밖을 본 적이 있다. 어둠과 고요뿐인 無色의 세계에서 벗어나면서 동굴 입구에 비쳐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을 보았을 때, 나는 서둘러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가고 싶었고 동굴을 벗어나는 순간 내가 본 세계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찬란한 광명의 세계였다. 새소리와 풀섶의 향기와 빛 속에 드러난 하늘과 땅이 그렇게 나의 모든 감각을 흥분시키고 천국에나 서 있는 듯한 기쁨으로 충만한 나를 느끼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변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고. 사실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세계가 눈앞에 있었던 그대로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동굴 체험 뒤에, 세계는 나의 눈에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비쳐왔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개혁함으로써 보다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부정의 문학은 이 믿음 위에서 출발하여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세계를 세울 때까지 현실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려는 ‘노력’ 역시 문학에 필요하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나의 변모는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계는 나를 내포하고 나는 세계를 내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나는 자아와 현실을 부정하면서 詩의 기를 가고자 한다. 이 길이 나에게는 이상적인 中道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自序
Ⅰ. 그리운 시냇가
사람이 하늘보다
밤의 다리
눈
썩는 여자
세 개의 변기
부엌창
1984년
짓밟힌 뼈
자동판매기
오징어 1
그리운 시냇가
희귀한 聖者
Ⅱ. 네모를 향하여
낮과 밤의 발걸음
앵무새
네모를 향하여
코미디
땅에 배를 깔고
인식의 힘
떠내려가는 사람
냉각된 도시에서
미궁
초어
붕붕거리는 풍경
나사가 나사에게
휠체어
무서운 굴비
붉은 고깃덩어리
Ⅲ. 돌들의 서랍
잃어버린 말오줌나무의 詩
하늘의 어둠
부르도자 부르조아
피도앗
코끼리의 슬픔
조명된 남자
아테네 광장
사랑하는 메뉴
雪景
나무말
靈谷에서
오징어 2
오징어 3
밤의 폭풍우
주물럭 혹은 신축성
해바라기
늦게 도착해 본 광경
마을
돌들의 서랍
소리의 칵테일
Ⅳ. 텅 빔과 붐빔
펄럭거리는 소리
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
오징어 4
저울
오징어 5
가을 하늘
터벅터벅 걸어갔던 길
공터
외계인
도둑계로 형상화된 시계
꿈속에서 꿈 밖으로
텅 빔과 붐빔
오징어 6
물벌레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 해설·난폭 시대의 시·유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