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에서 시인은 시선을, 이 땅의 세속 세계로 돌리면서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삶 전체를 조명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전히 모순과 결여로 충만해 있으며 기독교적 시선으로 조명할 때 더욱 그렇다. 시인은 여기서 사랑과 평화의 덕성과, 불변의 진리와 소망으로 이 세계가 전환될 것을 꿈꾼다. 그 꿈은 우리의 현실에서 도덕적이다.
[시인의 산문]
본래 문학의 몫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더듬어 찾는 노력이 얼마나 시인을 자기 기만 속에 가두어놓는 일이 되랴! 별과 꽃을 노래한다고 대체 그 별과 꽃보다도 곱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이랴? 별과 꽃, 거기 내버려두면 더 곱다. 그럼 무슨 시를 쓰면 좋을까? 내가 요새 영혼을 찾아가 보았더니, 그 영혼은 개똥벌레처럼 어디로 날아디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그 사람이 다 영혼이었다. 영혼이라는 게 당장 그 사람이라면, 그 물건이라면, 그것들이 차지한 현장성-영원은 그냥 침묵하는 적멸성에 있지 않고, 언제나 현장성의 방식으로 살아 있으니까-의 움직임을 홀대할 수 없다. 옳지, 저렇게 움직이는 세계·관계를 쓰자. 내 마음이 어찌 내 것이며, 내 영혼이 어찌 내 영혼이겠느냐? 숨 넘어가기 전에 저 몸을 아끼자. 안과 밖을 따로 쪼개는 이 ‘主理, 主氣’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구나. 시 따위를 가지고 어찌 ‘洗心’하겠다는 것이냐? 차라리 ‘作心’으로 본다면, 저렇게 살아가는 움직임에 무슨 힘도 되겠다. 그렇다. 우리 시대에 이 힘쓰는 자가 시인이다. 가령 신약 시대에 율법을 만들어 가르친 바울 같은 선생이 시인이겠느냐? 아니면, 메뚜기 먹으며 예수보다 먼저 신발 끌고 온 요한 같은 거지가 시인이겠느냐? 움직이는 힘이라야 그것이 정이 되고 뜻이 되고 나라도 된다. 그런 관계를 터놓는 시를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