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은 순순한 세계로 다가가려는 뜨거운 열망과 그럼에도 그것을 틀어막는 삶의 안타까운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시는 풍요하고 싱싱하며 아름답다. 황막한 것은 세계와 나를 가르는 그곳에 있는 것이며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꿈과, 그 꿈이 지향하고 있는 세계는 풍요하고 싱싱하며 아름다운 것임을 시인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산문]
모리나가 생각난다. C.C.R의 “Morina, where’re you going to?”의 모리나가 아니라 「거미여인의 키스」의 모리나.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기회가 닿으면 꼭 보고 싶다.
운동권 남자와 호모인 모리나가 같은 감방에 수감된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그 남자는 모리나의 꼴과 세계를 혐오하고 경멸했으나 차츰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풍기문란죄 정도였을 모리나는 먼저 석방되어 자기 연인의 일을 대신 하다가 죽음을 당한다.)
모리나의 사랑이 불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모리나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육체를 벽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나 자신을 아름답게,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모리나의 가슴은 평화와 우아함과 미소로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모리나는 진정한 여성이며 진정한 인간이었다. 몸 남자인 사람이 여자의 마음, 여자의 표정으로 애틋하게 세상 남자를 사랑하는 기묘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한 배우의 판토마임을 떠올렸다. 그의 분칠한 얼굴은 정오의 빛처럼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꿈을 꾸듯 사람들은 그이 몸놀림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전신이 눈이 되어, 그의 전신을 바라본다……그리운 모리나.
그-그녀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