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해방주의자이면서 문화인류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의 남성과 여성이 이루어온 생활 세계에 대한 재구성적 해체 작업을 통하여 가부장제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억압 체제인지, 그리고 그 체제의 극복이 인류 생존 내지 한국인의 인간적 삶의 회복을 위해 얼마나 바람직한 과정인지를 밝혀낸다.
[책머리에]
이 책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여성과 남성이 이루어가고 있는 삶을 가능한 한 여실히 그려보고자 하였다. 남성과 여성이 단순한 사회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성이 다름으로 해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게 되고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사회 생활의 구조를,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꿈, 좌절과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재구성해보고자 하였다. 그 삶 중에서도 경제나 국가 기구 등 엄격히 제도화된 차원보다 이념과 감성 등 생활 세계의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로 문화적 분석 내지 해석을 통하여 현상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했는데 이는 푸코가 제시한 재구성적 해체(再構成的 解體)의 작업과 비슷한 것이다.
‘재구성적 해체’란 지식의 재생산에 작용하는 선택과 배제의 차원을 알아내고 그 규칙들을 분석함으로써 현상의 왜곡됨을 인지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이러한 왜곡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그것의 인식론적 근거를 파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전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기존 현상 너머를 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인식과 방법론은 여성 해방적 전망과 인류학 및 여성학적 방법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여성 해방 운동은 자신의 체험이 체계적으로 왜곡되고 간과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한 여성들이 그 체험을 되찾기 위해 벌여온 해방 운동이다. 여성은 긴 인류 역사를 통하여 남성과는 대조되는, 그리고 대개의 경우 대립되는 집단으로 인지되어왔다. 온전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란 사회적 노동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는 남성들이며, 여성들은 생물적인, 즉 ‘자연적인’ 노동을 수행하면서 남성을 보조하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지구상에 존재해온 대다수의 사회에서 발견되어온 것이다. 여성 해방주의자들의 가장 급진적인 통찰력은 바로 이렇게 인간을 두 종(種)으로 나누어 보는 시각에 도전을 함으로써 얻어진 것으로 다음의 원리가 그 핵심을 이룬다. (1) 출산을 포함한 여성의 활동은 남성의 활동과 똑같이 ‘사회적’인 것이다; (2) 그러나 남성 지배적 권력 구조 아래에서 이 ‘사실’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런 가부장적 체제 아래 형성된 역사와 사회 이론은 편파적이고 왜곡된 것이다; (3) 왜곡된 인류 역사와 인식 체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그 동안 간과되었던 여성의 체험과 시각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그 동안의 여성의 활동이 재평가되고 여성의 희생이 보상되며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심리적 자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4) 이는 곧 여성을 역사와 문화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작업으로 역사와 사회 이론은 이 ‘여성 중심적’ 인식론을 포용하여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여기서 분명히해둘 점은 여성 해방 운동이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인류사를 통해 일어났던 수많은 의미깊은 해방 운동은 단지 특정한 억압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일어나고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 모순-대개 경제 체제와 문화 구조간의 괴리에서 파생된다-을 해결하기 위해 일어나야 했던 움직임이었고, 따라서 억압자와 피억압자 모두에게 해방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고대 노예 해방이나 근대의 시민 혁명, 그리고 미국의 흑인 해방의 경우를 볼 때 이 점은 매우 분명해진다. 마르크스의 계급 논의도 이러한 인식에서 조명된 사회 이론이었다. 즉, 여성 해방 운동은 작게는 여성의 권리와 자존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며 크게는 경쟁, 조직화된 폭력과 과학 기술주의에 토대를 둔 현대의 남성주의적 문명에 대한 도전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대립 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이 운동이 소속을 불문하고 인간 모두의 체험이 심하게 왜곡되고 박탈되는 시대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특히 여성 해방 운동은 우리를 억압해온 주체가 정체 분명한 ‘큰 폭군’만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폭군’들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밝혀 내어왔다. 작은 폭군들은 일상 생활에서, 언어 생활에서, 감정적 생활에서 우리를 지배하며 제도화된 폭군 체제를 더욱 공고히하여가는 데 주요 몫을 담당하여왔다. 그들은 남성이며, 때로는 여성이며, 나 자신으로, 좀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우리 곁에 수만 년 있어온 것이다. 남성과 여성에 관한 논의는 따라서 거대한 인류사의 흐름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주제이면서, 나 자신의 현재에서 시작되는 문제이다.
여기에 실린 논문들은 궁극적으로 ‘여성 해방론’의 보편적 문제 인식은 무엇이며 한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상황에서 일고 있는, 또 일어야 할 논의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더듬거리며 찾는 과정에서 씌어진 것들로 거창한 진리라기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과학도로서, 그리고 일상인으로서 나 자신이 추구해야만 했고 정리해야만 했던 논의들을 담고 있다. 이는 나 나름의 관찰과 참여와 고민의 산물이며 동시에 이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여 기꺼이 자신의 삶과 생각을 나누어준 학생들과 가족과 벗들의 것이기도 하다.
거의 10여 년에 걸쳐서 쓴 글들이라 다시 읽어볼 때 생각이 모자라는 부분이 역력하여 아예 처음부터 다시 정리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사회 변혁을 위한 토론거리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할 때 그러한 미숙함이 오히려 사고의 흐름을 잘 드러내주어 거리감 없이 함께 느끼고 토론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면 수정은 하지 않고 펴낸다. 대신 서론을 통해 보강을 하고자 하였다.
– 1988년 9월 1일, 신촌 연구실에서,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