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깊이 읽기
분야 우리 문학 깊이 읽기
이 책은 제1부 ‘나의 시를 말한다’와 제2부 ‘평화로 가는 길,’ 제3부 ‘아름다운 의사 시인’으로 구성되었다. 미국에 사는 동포 의사이자 모국어에 대한 눈부신 침잠으로 순수의 시세계를 열어가는 탁월한 시인 마종기에 대한 다양한 경로가 마련되어 그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책을 내면서]
태어날 때부터 시의 세례를 받는 시인은 많지 않다. 마종기는 그런 희귀한 복을 받은 시인 중의 하나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동요·동시를 발표하였고, 대학 재학중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성장기의 그만을 보자면, 그가 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시가 그를 선택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한데 그는 시인으로서의 외길을 가지 않았다. 생활인으로서 그는 의사의 직업을 택하였고, 거주 영역으로는 모국어가 외국어가 되는 곳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 사연이 어찌 되었든, 그는 존재의 찢김을 자발적으로 의도한 셈이다. 그 찢김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며 동시에 집단적인 것이었다. 개인적이라는 것은 그의 직업 선택, 도미가 순전히 그 자신만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뜻하며, 집단적이라는 것은 그 개인적 선택이 삶의 환경과 접촉하면서 한국인의 공동의 경험과 만났다는 것을 뜻한다. 이 찢김의 경험과 더불어 그는 순수의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시가 만개한 것은 이 추방과 더불어서이다. 그는 시를 버리지 않았으며, 침묵하는 시에 그의 생체험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의 시는 그 숨결에 쐬어 순수의 꽃망울을 열고 복엽의 꽃잎들로 다시 피어났다.
그러니까 마종기의 시를 ‘깊이’ 읽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겹의 봉인된 상자를 뜯어야 한다. 첫째는 분열의 자발성의 의미이다. 둘째는 삶의 성층들 각각(시·의사·이민)의 의미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이다. 셋째는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의 만남과 상호 굴절의 문제이다. 제일 바깥에 있는 상자는 마지막 상자이다. 지금까지의 마종기 시에 대한 이해는 주로 이에 집중되었으며, 그것은 ‘이민자의 유랑민 의식’을 마종기 시의 대표적 표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또한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유랑자의 방황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순수하고 맑은 삶에 대한 소망의 피력이자 그것의 언어적 실천이다. 그렇다는 것은, 시인이 밖으로 분열되어나가는 그 과정을 통해 거꾸로 최초의 순수의 세계로 거듭 귀향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깥이 안이고, 열림이 침잠이다. 진정, 마종기 시의 가장 깊은 비밀은 여기에 있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회상과 관찰과 분석이라는 다양한 연장을 가지고, 저마다의 독특한 도관을 따라, 이 비밀 속으로 잠입한다. 우선 시인이 ‘나’를 말한다. 그리고 시인과 편집자가 나눈 대화와 함께 쓴 연보가 뒤를 잇는다. 이 자술과 대화가 아직 시인의 세계를 비밀의 안개로 감싸고 있다면, 시인의 시에 대한 분석과 해석들이 그의 시로 열고 들어가는 다양한 열쇠를 제공한다. 그 열쇠들은, 동심·유랑·따뜻함·기억·미적 인식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아무튼 이 열쇠들이 지나치게 뻑뻑하거나 투명하다고 느낄 즈음에 그를 옆에서 지켜본 분들이 사람 마종기의 숨결과 살을 덧붙여준다. 그러면, 그때 또 하나의 숨은 마종기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작은 축제를 완성한 것은, 시인 자신과 필자들 모두이다. 시인에게는, 마땅히, 축복을! 필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 1999년 1월, 정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