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그 여름의 끝』에서 그는 연애시의 어법으로 세상에 대한 보다 깊고 근원적이며 보편적인 이해를, 뛰어난 서정을 통해 새롭게 펼쳐 보여준다. 그의 시 세계는 깊이를 획득한 단순함으로, 나를 버리지 않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나와 타자에 대한 진정성의 사랑의 지난함을 지적·수사적 현란함 없이 평이하게 드러낸다.
[시인의 산문]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 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은 범속한 나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에 두루 통해 있는 聖人들까지도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聖人의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對待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친 다음 怒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더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지껏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던 슬픔은 한 장의 덮개 그림처럼 떨어져내렸다. 壁도, 덮개 그림도 허깨비일 뿐이며, 그것들이 비록 양파 껍질처럼 거죽이면서 동시에 속이 된다 할지라도 허깨비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허깨비가 온통 허깨비 전체라면, 허깨비 아닌 실체가 따로 있겠는가.
작가 소개
독자 리뷰(1)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강조-인용자) 찾아가야 한다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
—이성복 시, [산]
*`일부러` 행갈이한 이 시를, 이성복의 `문학적 풍경`을
이해하려면 찾아야 할 문 가운데 하나로,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사이가, 아니 오히려 그 둘이
몸 비비며 섞여있는 자리가 삶이며,
그러므로, 삶은 아름다움과 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면서,
또한 아름다움이나 추함, 그 어느 말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자리에 있다.
그래서, 이성복은 `길`을 깊이 성찰하는 `길`(!)로 걸어가게 되며,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시론을 남겨두고 있다
(그 제목이 [변신]을 쓴 카프카의 것과 같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카프카의 글과 삶에 가까이하려 했는가를 가르쳐준다).
결국, 이성복에게 있어 `길`은 두 겹의 의미를 꽃피워내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삶의 길로서, 동양철학에서의 도(道)의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The road not chosen`(R. Frost)에서의 `The road`이다.
중요한 것은, 이성복에게 그 둘이 완전히 엇갈리거나 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일 수 있다는, 역설의 화법,
혹은 세계인식이야말로, 이성복을 가장 이성복답게 바라보게 하는,
그와 우리 독자의 관점일 수 있다.
이성복이 뛰어난 시인이라는 것은, 그 역설이 인간 삶의 모습을,
슬쩍 감추거나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게(그 새로움은 흔히 당돌한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그 당돌함을 견디지 못하는 독자에게 그의 시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드러낸다는 사실에 있다.
능숙한 시 독자에게 이러한 `역설`은 쉽게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므로, 백발의 노인이 되어도 그 삶의 `역설`은, 아프게도,
그 전모를 모두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성복 시의 해법은, 그가 시(문학)와 삶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낮게 또 낮게 고통하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거치르나 따스한 마음밭을 읽어내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그 고통은 곧 우리가 살면서 치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물음에서 피어나므로 보편적이다
(그가 근래에 시를 쓰지 못하고, 아니 거의 발표하지 옷하는 이유를 나는 이 지점에서 찾는다).
그의 놀라운 직관을 하나 덧붙이며, 덧없는 글 하나, 또, 무서운 세계로,
종이비행기 접어, 날린다 … 사랑이며 아픔인 사람들에게.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 `숨길 수 없는 노래 2`에서
***지하철에서 메모한 이 글을 여기에 다 옮기고 난 후에,
나는 박준하의 [너를 처음 만난 그때]를 들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 가르쳐 줄 수는 없을까? 내가 정말 살아있다는 걸 느낀 건
너를 처음 만난 그때 ……”
노래와 겹쳐져 나에게 드는 상념은,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생각할 시간은 부족하다는 점에 비평가의 고민이 있다는,
김현 선생의 말씀이다.(정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