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팽이처럼』은 1970년대 이래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흐름을 이루고 있는 일상시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산문]
노래를 한번 시작하면 예술 가곡에서부터 최신 유행가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계속 불러대는 친구가 있다. 이런 친구를 내가 부러워하는 까닭은 그의 목소리나 창법이 좋아서라기보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 때문이다. 도대체 그 많은 가사를 어떻게 다 왼단 말인가. 사실 노래를 못 부른다고 나를 음치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한때는 취미란에 음악 감상이라고 써넣었을 만큼 나도 음악을 사랑한다. 다만 가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노래를 부르지 못할 따름이다.
노래를 못하면 시라도 한 수 읊으라는 주문을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텍스트를 못 외기는 노래 가사나 시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나의 시를 글자 한 자 틀리지 않고 낭송해서 좌중을 놀라게 하는 수가 있다. 시인이란 원래 칠현금을 타면서 노래하는 가객이었다는데, 어찌하여 노래는 고사하고 자기가 쓴 시 한 편 외지 못하느냐는 면박에 나는 할 말이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작시를 위시하여 동서고금의 명시를 줄줄 내리외는 시인들이 많은데 왜 나만 이 모양인지 한심하다.
한번은 나의 작품 가운데서 작곡에 적합한 시를 몇 편 골라달라는 부탁을 받고 2백여 편의 시를 뒤적거려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곡을 붙여서 훌륭한 노래가 될 만한 시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곡을 붙일 수 없는 시, 자기의 시를 한 편도 외지 못하는 시인, 아무래도 내게는 노래를 부를 천분이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는 그 자체가 언어의 노래이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