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소설은 삶의 꼼꼼하고 섬세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작품 전체의 충전된 삶의 우울한 그림자가 있다. 충전의 전원은 우선은 그의 문체에 있다.
[머리말]
첫 작품 「후송」은 1962년 8월 여름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서 무더위와 싸우며 썼다. 신성포와 광양을 잇는 둑을 동생과 함께 자전거로 달리기도 하고 서문밖 수원지 아래의 냇물에서 멱을 감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해 늦여름에 큰 물난리가 났었다. 「물결이 높던 날」은 역시 고향에서 겨울에 쓴 것 같은데, 자세한 기억은 없다. 「미로」는 꿈 이야기다. 무의식의 의미를 의식의 논리로 붙잡으려고 꽤 애를 먹었던 것 같다. 나는 현실의 질서가 완전히 파괴되고 현실이 새로운 은유로서 나타나는 꿈의 세계의 대담함과 선명함을 대단히 좋아한다. 「강」은 동료 교원 두 사람과 함께 김포 학부형 집에 놀러 간 것이 빌미가 되었다. 광주 있을 때 ‘고창떡’이 일하는 밥집에서 얼마 동안 점심을 단골로 먹었고, 도암에 잠깐 있었을 때 식목을 했었던가 안 했었던가 했고, 또 딴 데 있을 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장의 어리석음을 겪었는데, 아마 이런 것들이 「나주댁」에서 묘하게 어울린 모양이다. 「가을비」는 군대 있을 때 부산 오병원에 입원했던 경험과 그때 들은 실어증 환자의 꺼억꺼억 소리가 암시가 되었다. 「우리 동네」는 덕진에 있는 과수원 아랫동네에서 살 때 얻은 얘긴데, 끝 부분에서 주인공이 홍소를 터뜨리는 것에 유의해주었으면 좋겠다. 「산」은 그해 첫여름에 남해 금산에 오르기 위해서 상쾌한 바다 바람을 가르며 몇 시간 동안 통통배를 탄 적이 있는데, 대개 그런 여행길에서는 창백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한둘은 볼 수 있는 법이어서, 아마 그런 것들이 나의 상상력을 건드려서 되었던 것 같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미인이 많다. 「벌판」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서 명절 때면 꼭 성묘를 다녔던 나에게는 퍽 자연스러운 얘기다. 마지막 두 작품은 술집 여자와 도둑놈 얘긴데, 요즘 부쩍 이 두 가지 유형의 인간들이 나의 머리를 출몰한다. 남도여창이라고나 할까.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정작 그들은 가장 비창녀, 비도둑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 한 움큼의 단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들 중의 어느 것을 쓰고 나서도 장티푸스를 앓고 난 듯한 기분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그것들과는 상관이 없는 작품 이전의 이야기들이다. 그것들은 이제 나와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우연히 책방 앞을 지나다가 일금 얼마를 주고 이 책을 산 독자들은 내가 피를 말렸건 살을 깎았건 상관없이 그들이 이 책을 읽는 일 외에 정 할 일이 없을 때 이 책을 읽고 기쁨을 느껴야 한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 책을 펴낼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판단해주신 문학과지성사 여러분의 덕분이고, 반대로 그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본전 생각이 난다면 그것은 전혀 나의 잘못이다.
– 1976년 3월, 서정인
후송
물결이 높던 날
미로
강
나주댁
가을비
우리 동네
산
벌판
남문통(南門通)
밤과 낮
[작가 후기]
[초판 해설] 세계 인식의 변모와 의미·김현
[신판 해설] 소설은 어떻게 눈뜨는가·이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