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93

김광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0년 11월 5일 | ISBN 9788932004709

사양 신46판 176x248mm · 117쪽 | 가격 8,000원

수상/추천: 편운문학상

책소개

다섯 번째 펴내는 시집 『아니리』에서 그는 그 특유의,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기 쉬운 진실을 되돌려 다시 한번 따져보는, 비판적 정신을 한층 깊이 있게 보여준다.

[시인의 산문]

역마살이 끼었다는 표현은 아마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1970년대초에 고향을 떠나면서 비롯된 이 역마살은 지금까지 나를 쫓아다니고 있다.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여섯 해 동안, 밤에는 울산에서 자고, 낮에는 부산에서 일하고, 주말은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세 도시의 생활을 지속함으로써, 나는 국내 이산 가족의 선구자가 되었다. 1980년 서울로 자리를 옮긴 다음에도, 안산으로 출퇴근하기에 왕복 이백여 리의 일정을 어느새 십 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울산에서 부산 가는 길이나, 서울에서 안산 가는 길이나, 모두 교통사고의 빈도로 전국에서 손꼽는 산업도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역마살이 십육 년에 아직도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흔들리는 찻간에서 책을 읽느라고 눈을 많이 버렸다. 다음에는 차를 타면 졸거나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깐이지, 몇 시간씩 계속해서 낮잠을 즐기는 재능이 내게는 없다. 결국 망연히 창밖을바라보거나, 시선을 차단하고 부질없는 상념에 머리를 맡겨버리는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재빠르게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돈을 벌고, 이권을 붙잡고, 명성을 날리는 사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후반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나는 대부분 교통 체증의 심한 산업도로의 버스 속에서 멍청하게 보낸 셈이다. 본의 아니게 혼자서 멀거니 보낸 이러한 시간이 역설적으로 나의 삶과 문학에서 차지한 몫도 없지는 않다. 독문학 연구에 전념할 실제의 시간을 빼앗아간 대신 몇 줄의 시를 갈고 다듬을 상상의 여유를 주었다고 할까.

작가 소개

김광규 지음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에서 수학했다.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이후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발표하여 제1회 녹원문학상을 수상했고, 1983년 두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2003년 여덟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로 제11회 대산문학상을, 2007년 아홉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제19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시집 『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 『육성과 가성』『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학술 연구서 『권터 아이히 연구』 등을 펴냈다. 그리고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하이네 시선, 페터 빅셀 산문집 등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영역 시집 Faint Shadows of Love(런던, 1991), The Depth of A Clam(버팔로, 2005),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빌레펠트, 1999), Botschaften vom grünen Planeten(괴팅엔, 2010), 중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 등을 간행했다. 독일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문화상(2006)과 한독협회의 이미륵상(2008)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독문학)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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