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국 문학의 여러 가지 문제를 체계적으로 구분, 문제와 문제 사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의 제시를 시도하고 있는 한국 문학 연구의 입문서이다.
[책 끝에]
나는 이 책의 끝에 내 존경하는 친구 김병익형에 대한 나의 고마움을 우선 밝혀두고 싶다. 이 글을 쓰도록 나에게 강력히 권고한 것도 그였고, 계간 『문학과지성』에 이 글이 2년 간 연재될 때 내내 나에게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그였으며, 그리고 이 책을 책으로 간행할 수 있게 해준 것도 그이다. 10년이 넘도록 그와 사귀어오면서 나는 그의 신중한 생활 태도와 날카로운 비평 의식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가 기자직에서 떠난 이후에 어쩔 수 없게 출판사 일을 맡아 하면서 보여준 강인한 인내력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그가 출판사를 맡아 하면서 내준 나의 첫번째 책이다. 그런 만큼 나의 고마움은 더욱 크다.
김윤식씨와 『한국 문학사』를 같이 쓴 이후에 나는 우리가 내 세웠던 가설이 가설로만 끝나지 않으리라는 행복스러운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사란 각주가 잔뜩 붙어 있는 논문이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쉬운 개설서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자각이 곧 나에게 생겨났고, 그래서 이왕이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 문학사를 쉽게 써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다. 그 의무감은 그 이전에 쓴 나의 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나로서는 좀 지나치게 과장한 대목이라든가, 덜 설명이 되어 있는 대목을 교정해야 된다는 생각과 겹쳐져서 점차 나를 강하게 짓누르는 압력이 되었다. 그 압력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쓰기 시작한 것이 『한국 문학의 위상-그 전개와 좌표』이다. 이 글은 계간 『문학과지성』 75년 겨울호부터 77년 여름호에 이르기까지 8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글의 기본적 발상은 문학은 억압을 하지 않되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문학을 다른 문화적 장치와 맞설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나의 되풀이된 주장이 생겨난다. 내가 한국 문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밝혀내려 한 것도 이러한 생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 나는 한국 문학을 내 체계에 맞추어 여러 부분으로 나눴고, 그 부분 사이의 관계와 그 부분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선명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나의 노력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이 글을 쓰는 지금 확연하게는 알 수가 없다.
이 글에 나는 내가 애초에 규명하려고 작정했던 몇 개의 주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그것들은 한국 문학의 주류로 인정되고 있는 한,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여성주의와 남성주의, 그리고 해방, 분단, 6 25, 4 19, 5 16 등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의 문화적 의미 같은 것들이다. 한 문제는 다른 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야 효과적으로 규명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여성주의와 남성주의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 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았고, 위의 역사적 사실의 문화적 의미는 행복한 사회에 대한 나의 생각이 좀더 확연해져야 적합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 나의 앎이 익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나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이 삶을 이해하는 과정 그 자체라면, 나는 아직 나의 삶을 끝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여러 사람과 나의 글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토론의 과정에서 나는 지적으로 꽤 성숙해 있는 여러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 오해의 대부분은 나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나에 대한 소문에만 매달림으로써 생기게 된 것들이어서, 나로서는 그 치유 방법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글쓰는 사람을 글로 이해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한 소문으로 이해한다! 나는 그것이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나의 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 할 때마다 나에 대한 소문이 자기식으로 증폭되거나 과장되어 내 글을 읽는 자들의 의식을 방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글을 정확하게 읽으려 할 때마다 나의 감정이 섬세하게 거기에 작용하였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섬세하게 분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책에 나 자신의, 남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삽화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이유이다. 나 자신을 계속 반성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남의 글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나의 또 다른 하나의 수확이다.
아무리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더라도 모든 글은 당대적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인가를 내 글을 읽으면서 혹은 쓰면서 계속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도 하나의 수확이다.
이 책에는 원래 『문학과지성』에 연재될 때 삽입되어 있지 않았던 한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그것은 항목 7의 「문학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이다. 그것은 『문예총감』(문예진흥원, 1976)에 실린 것인데, 나로서는 항목 6에 뒤이어 그것을 삽입하는 것이 한국 문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약간의 중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전재하였다. 항목 6의 제4기의 문학이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어졌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김윤식씨와의 공저인 『한국 문학사』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 1977년 7월, 김현
1. 왜 문학은 되풀이 문제되는가
2.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3. 문학은 무엇에 대하여 고통하는가
4. 무엇이 지금 문제되고 있는가
5. 문학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 한국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
7. 문학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8. 우리는 왜 여기서 문학을 하는가
[책 끝에]
[원문 출처]
이 책이야말로 김현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흥미있는 텍스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군다나 문지의 전략에도 부흥하면서 대중들에게 쉽게 드러나는 그 위상은 결코 빈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더불어 많은 글쓰는 이들이 본받고 계속 갱신해 나가야할 ‘한국 문학’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있어서도 위상이라는 측면으로 많은 부분을 고찰한 이 글은 이제는 다른 시각 또는 다른 문체가 쓰여져야 할 때임을 계속 강조하는 것도 같다.
자신을 계속 반성하고 구태의연한 찌꺼기들에 더럽혀 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문학이 무엇이고 적어도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전개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이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자신이 그것을 알아낼 때 가졌던 호기심과 흥분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잘난체 하지 않고 조용히 풀어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기가 깨달은 것을, 그 생생한 숨결과 빛깔을 바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떨림 그대로 보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작은 책을 단숨에 읽고 떠올린 생각들이다.
김현 선생님은 그 어려운 일은 물처럼 죽 흐르면서 조용히 하고 계셨다. 문학에 대해, 문학이라는 이 도대체 알 수 없는 녀석에 대해 가지고 있던 당혹한 의문과 때론 고통스런 미지를 들려준다.
‘순수함’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어리석음’으로 추락하지 않고 어떻게 힘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