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한강 소설집

한강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5년 3월 10일 | ISBN 9788932007502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22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젊은 날의 상실과 방황을 진지하고 단정한 문체로 그려보이는 신예 작가의 첫 소설집. 작가는 세속적 희망을 버리는 대신, 삶의 근원성으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이끌어내고, 운명과 죽음에 대한 어두운 갈망과 그것들과의 때 이른 친화감을 키워낸다.

[머리말]

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 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기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게 갚기 힘든 빚이 있다.

느릿하고 힘 부치는 걸음걸이를 견디어주고 힘을 불어넣어준 분들에게, 부끄럽지만 이 책을 밝은 정표(情表)로 드리고 싶다.
1995년 7월, 한강(韓江)

목차

여수의 사랑
질주
야간 열차
저녁빛
진달래 능선
어둠의 사육제
붉은 닻

[해설] 희망 없는 세상을, 고아처럼·김병익

[작가의 말]

작가 소개

한강 지음

1970년 늦은 겨울 광주에서 태어났다.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을 출간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말라파르테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독자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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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3 =

  1. cactus
    2009.03.04 오전 11:49

    좋아하는 작가의 첫 소설집을 만나는 건 설레는 일이다. 소설가 한강,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의 소설은 언제나 어렵고 읽어내기 힘들다. 하여 다른 책에 비해 다소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도 그녀가 좋다. 더구나 < 여수의 사랑> 이라니, 여수 그곳은 내게 그리움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붉은 동백의 비단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여수의 오동도를 잊지 못할 것이다.

    < 여수의 사랑>속 여수는 슬픔이었고 아픔이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정선, 그 반대로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자흔은 한 방을 쓰고 있었다. 보기에도 너무 다른 두 여자, 그들에게는 여수에 대한 고통과 그리움이 있었다. 부모에게 버려진 자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정선의 가슴속에는 가시처럼 여수가 박혀 있었다. 고향이 어딘지 모르는 자흔은 여수행 서울발 기차에 버려져 있었다. 자흔에게 여수의 바다는 엄마이기에 충분했다. 여수에서 아빠와 동생을 잃은 자흔에게 그곳은 지우고 싶은 공간이었다. 여수항의 밤 불빛을 봤어요? 돌산대교를 걸어서 건너본 적 있어요? 돌산도 죽포 바닷가의 눈부신 하늘을 봤어요? 오동도에 가봤어요? 오동도의 동백나무들은 언제나 껍질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 p28 떠나버리 자흔, 그녀는 분명 여수로 향했을 것이다. 정선도 여수로 떠난다. 가슴에 박힌 가시를 빼내고 여수를 다시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한강은 < 여수의 사랑>외에 6편의 단편에서도 내내 가라앉은 슬픔을 토해낸다. 어린 동생의 죽음은 가슴에 한으로 남고, 언제나 달려야만 숨을 쉴 수 있는 < 질주>의 인규, 식물 인간과 다름없는 쌍둥이 형제의 몫까지 살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 야간 열차>의 동걸에게 방황과 소비의 생활은 없었다. 친구들 모두 떠나는 < 야간 열차>도 탈 수가 없었다. 화자 영현은 동걸의 동생의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현은 이유도 없이 삶이 고통스러웠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며 살고 있었다. 동걸은 얼마나 간절하게 < 야간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고 싶었을까.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틈 무거운 삶의 무게.

    < 어둠의 사육제>도 무척 인상적이다. 고향 선배가 가지고 달아난 전세금은 영진에게 꿈이었다. 4년 동안 모은 꿈이 사라지자 영진은 독하고 모질어게 변해버린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이모의 집에서도 속을 감추고 더 뻔뻔하게 더 많이 웃으며 베란다에서 떠날 날만을 기다렸다. 영진에게 나타난 명환, 자신의 집을 양도하겠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다리 한 쪽을 잃은 명환은 증오만이 가득했다. 가해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와 결국 그들을 내몰고 만 명환은 어둠속에서 건너편 베란다의 영진을 지켜본 것이다. 끝내 명환은 자살을 하고 영진은 월세방을 얻어 이사를 나간다.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 나 여기 숨쉬고 있어,…… 여기도, 여기에도, 나는 여기서 밥 먹고 잠자며 살아가고 있어, 나도, 나도…… p250 영진은 그 불빛의 소리 중 하나이고 싶었고, 명환은 그 불빛이 모두 사라지기를 원했을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명환은 어둠을 택했고, 영진은 그 불빛을 통해 다시금 살아내려는 용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1995년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왜 이토록 깊은 고통과 아픔만을 그려냈을까. 그것이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였을까. 아픔을 껴안고 사는 이들, 누구에게 마음을 터 놓지 못하고 감내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 차례로 발표한 소설에서도 언제나 외로움과 아름다운 슬픔이 고여 있다. 곧 만나게 될 새로운 소설에서 그녀는 어떤 승화된 슬픔을 보여줄까.

    자정이 가까운 시각, 호남선 입석 기차표를 손에 쥐고 기차를 오르던 내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여수, 그곳엔 동백이 피기 시작했을 터이고 붉은 꽃잎은 바다를 향해 날갯짓을 할 것이다. 여수,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