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는 거대한 추억의 창고”라는 시구처럼 이 시집은 죽음을 얼핏 보아버린, 생의 낌새를 눈치챈 자의 뼈를 깍는 듯한 자성의 노래이다. 죽음은 현재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지나온 삶을 추억케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추억은 과거 시간의 이미지지만 그 힘은 현재 시간 속에서 발생하고 활동하듯이, 이 시집의 아름다움은 치수가 잘 맞지 않는 시간 속에 들어 있는 덜그럭거리는 존재의 육체를 더 선명하게 감각화시키는 데 있다.
[시인의 산문]
모든 문자로 씌어진 것들은 끝끝내 씌어지지 않은 것들 때문에 깊이를 얻는다. 언제나 돌이킬 수 없이 말해져버린 것들이 이면에 거느리는 깊은 침묵은 하잘것없는 언어의 한 뭉텅이 속에 매몰되어버린 시들을 남루하게 만들어버린다……시는 거듭되는 실패 속에 있다. 시는 모든 씌어지지 않은 것들의 틈새로의 망명, 그 범접할 수 없는 침묵이 서려 있는 空, 혹은 無에로의 영원한 귀속……을 꿈꾼다.
나는 죽음을 살아보지 못했으나 끊임없이 그 빈 것, 없는 죽음의 육체를 만든다.
幻, 그 헛것에 육체를 부여하기.
내 무의식의 표면 위에 날카롭게 그어진 금을 따라 송글송글 돋아나는 붉은 피처럼 맺히는 이미지들…… 시의 크고 헐렁헐렁한 육체, 그 언어의 관능성에 현혹되어 시작한 지난 이십 년 동안의 시쓰기는 시의 ‘창조’가 아니라 시의 ‘해체, 혹은 지우기’였다.
언어의 질료성을 넘어서는 시들.
내 손이 가 닿지 않는 곳에 떠 있는 육체 없는 시들.
내 시는 언어의 영토 저 너머에 있는,
따뜻하게 폭발하는 추억들, 바람의 經典, 기억의 간선도로……로 나아가고 싶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