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전반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지사였지만 후반에는 민족을 배반하여 일제에 부역한 부끄러운 변절자로 살아야 했던 한 독립운동가의 비참한 생애와 그 후손들이 겪는 비극적인 삶을 유장하게 그리고 있는 장편소설. 작가는, 은폐된 세계와 왜곡된 역사를 분명하게 바라봄으로써 삶의 진상과 인간의 진의를 일구어내고 있다.
[머리말]
일제 시대의 우리 선각자나 지도자들 중에는 한 사람에게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물들이 많다. 춘원과 육당, 최린 같은 분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로서, 기미년 3·1 운동을 전후해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서 싸운 열렬한 독립지사였으나 생애 후반부에는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이른바 반민족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조나 절개는 동양의 여러 덕목들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으뜸 덕목이다. 옳다고 믿어 한번 뜻을 세운 다음에는 그것을 마음속에 굳게 지켜 일생 동안 변함없이 간직하는 것이 지조이며, 그것은 곧 옛 우리의 선현들이 선비라면 꼭 지켜야 될 가장 큰 도덕적 덕목으로 가르쳐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서양의 지성들은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한틀 안에 가두지 말고 항상 크게 열어두어 변화된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하라는, 이른바 자유주의를 지식인이 갖추어야 될 필수 조건으로 가르친다. 결국 불사이군을 외치다가 참혹한 죽음을 당한 세조 시대의 사육신들은 동양적 덕목으로는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킨 불세출의 충신들이지만, 서양의 자유주의자들의 눈에는 자기 사고의 한계에 갇혀 변화된 주변 정세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극렬 보수주의자가 된다.
생애 전반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지사로 아름답게 살았고, 후반에는 민족을 배반하여 일제에 부역한 부끄러운 변절자로 살았던 선조들을, 지금의 우리 역사 속에는 어떤 인물꼴로 수용해야 옳은가? 이 해묵은 질문에는 그러나 아직도 명쾌한 정답이 없다. 독립 운동과 친일 부역 사이에는 서로를 이어주는 도덕적이며 논리적인 접점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반론 제기를 전제로 한 접속사며, 그 반론의 가능성에 대한 유보나 재고를 암시하는 반어적 성격의 접속사이기도 하다. 반론이 많은 사회는 시끄럽고 비효율적이지만 시행착오나 실수가 적고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는 미덕이 있다. 극단적으로 반론을 거부하는 집단으로는, 실수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성과와 속도만을 중시하는 군대라는 조직이 있을 뿐이다.
독립 운동과 친일 부역 사이에 논리적 접점은 발견되지 않지만, 둘의 차이점을 반어적으로 이어주는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암시적으로 존재한다. 두 사물의 대비가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때 대부분의 ‘그러나’는 그 역할과 의미가 더욱 크게 두드러진다. 한때 열렬한 독립지사였던 인물이 훗날 친일파로 변신하여 민족을 배반하는 과정에는 그 극적인 변신에 버금가는 극적 사연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동기와 사연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될 일이기도 하다.
16세기말과 20세기초의 두 차례에 걸친 침략을 통해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이웃 나라 일본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그들은 부당하게도 우리에게 가끔 친숙한 나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 현지 일본에 찾아가보면 그들은 북구의 라트비아나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처럼 우리에게 전혀 낯선 외국일 따름이다. 가깝고 낯선가 하면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와 같은 태풍권에 있고,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이고, 같은 표준 시간을 쓰고 있고, 같은 동북아에 위치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다. 더구나 문화적으로도 같은 한자권·유교권에 속해 있어서 행동 양식과 언어 습관, 생활 풍속 따위들이 우리와 비슷하거나 닮은 점이 매우 많다. 사실 사석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본 일본인은 그 비슷한 생김새만큼이나 우리에게 친근하고 온순하며 상냥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갑자기 발동되는 열광적인 애국심만 아니라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국민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로 아무런 사후 조처 없이 역사 속에 방치된 일본과 한국의 불편한 관계는, 현재로서는 양쪽 모두 필요하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의 화해나 용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 사이의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지난 역사의 악연이 만들어낸 뒤틀린 국민 감정과, 이기적이며 일방적인 자국 중심의 과열된 애국심에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상대편에 대한 거칠고 난폭한 편견과 오해가 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고, 역사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기적 해석과 일방 논리가 준비되어 있어서, 양국 사이에 이해가 상충되는 어떤 문제라도 발생하면 그 문제에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쉽게 감정과 편견에 격동되는 이상 열기에 휩쓸리기가 십상이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화해 작업의 첫걸음은 반어적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되는 상대편의 이기적 논리에, 다른 한쪽이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여주는 일이다. 비록 그 편견과 논리가 일방적이며 불합리하더라도, 그들이 왜 그런 편견과 잘못된 논리에 함몰되어 있는가, 그 원인부터 헤아려보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논리에 귀기울이기 가장 좋은 방법은 양편이 모두 난폭한 애국심을 자극하는 국가라는 틀을 벗어나 성숙한 시민 사회의 이웃 시민으로 서로에게 다가서는 일일 듯하다. 시민 사회의 이성적·합리적 접근만이 지금으로서는 ‘그러나’ 이후의 이기적인 일방 논리를 누그러뜨리는 최선의 처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상으로 나는 작품 『그러나』가 대충 어떤 얼개 속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를 밝힌 셈이다. ‘그러나’는 『그러나』 이야기 이전의 단순한 반어적인 접속사에 불과하다. 문 앞까지의 유객의 임무가 작품 『그러나』의 책임의 한계일 뿐 그 너머 이해의 세계는 독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반어적 접속사 ‘그러나’가 행복한 화해의 접속사로 기능하기를 바랄 뿐이다.
– 1996년 봄, 홍성원
홍성원 대하장편소설, 『그러나』 일본어판 출간
지난 2008년 5월 1일, 향년 71세로 우리 곁을 떠난 작가 홍성원 선생의 2주기에 즈음하여 그의 대하장편소설 『그러나』의 일본어판 『されど』(원제: 그러나)이 일본 현지에서 출간(2010년 4월 15일)되었다. 출판사는 일본의 혼노이즈미 社(本の泉社, http://www.honnoizumi.co.jp/)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한국의 현대문학을 연구하고 이를 번역 작업 등을 통해 꾸준히 일본 문단에 소개해오고 있는 문학연구가이자 평론가 안우식 선생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이뤄진 뜻깊은 성과이다.
특히나 올해는 4․19 혁명 50주년과 6․25 60주년이 함께 겹치는 해로,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고 그 의미를 점검하는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때, 한국전쟁의 참담함과 개인의 영욕의 역사를 형상화한 대하소설 『남과 북』, 역시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국권피탈이 있었던 1910년으로부터 어언 100년이 지난 오늘에 소설 『먼동』과 더불어 동북아 한․중․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전망이 제시된 장편 『그러나』의 작가인 홍성원의 작품이 바로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깊다 할 것이다.
홍성원 장편소설 『그러나』(전 2권, 문학과지성사, 1996)
생애 전반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지사였지만 후반에는 민족을 배반하여 일제에 부역한 부끄러운 변절자로 살아야 했던 한 독립운동가의 비참한 생애와 그 후손들이 겪는 비극적인 삶을 유장하게 그리고 있는 장편소설이다.
소 설은 추앙받는 독립운동가 한동진의 일대기를 쓰려는 주인공이 그의 변절 사실을 발견한 후 일본과 중국에서의 그의 당시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작품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젊은 시절 3․1운동을 주동했으나 일제 말 친일파로 변절한 한동진과 그를 친일파로 끌어들인 관동군 첩보기관의 정보원인 일본인 여자 류코, 이들 사이의 사생아와 그의 딸인 에다 사이코, 한동진의 외손녀를 부인으로 둔 주인공과 그를 사랑하는 에다 등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흔이 빚은 인물 관계의 혼란상이 할아버지-아버지-아들의 삼대에 걸친 가족사로 전개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이고 진정 어린 사과를 받아내려는 한국 정부와 일본의 구태의연한 항변 논리를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양국 젊은이들을 통해 가감 없이 소개하고 있어, 2000년대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을 위한 논의의 한 단초로서 새롭게 주목할 만하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은폐된 세계와 왜곡된 역사를 분명하게 바라봄으로써 삶의 진상과 인간의 진의를 일구어내고자 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의 제목 ‘그러나’ 역시 그 상징하는 바가 깊다 할 것이다. ‘그러나’를 이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작가는, 지금껏 일본문제에 관한 한 흑백논리로만 접근해온 사회적 통념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항일이건 친일이건, 어려운 시절을 같이 겪어온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한국과 일본의 양쪽 논리를 난상 토론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양국 간 새로운 관계 정립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누가 항일의 애국자이고 다른 누가 친일 매국노인가를 가르고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의 꺼풀을 벗기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진상을 헤집어보면, 애국자가 변절자이고 그 친일파가 독립운동가의 후원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애국자와 친일파의 이름들을 고쳐 쓰고, 영예와 치욕을 바쳐야 할 것인가. 작가는, 다시 그러나, 그러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 모두를 껴안아 한몫의 수치와 영예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민족의 현실을 새로이 일으켜 세우고, 그래서 우리의 영욕으로 점철된 핏줄들이 세계로, 세대로 번지고 뻗쳐나가기를 희망한다.
되풀이되는 이 ‘그러나’를 통해, 작가 홍성원은 은폐된 세계와 왜곡된 역사를 분명하게 바라보고, 그리하여 그 진실을 뚫고 들어가는 ‘반어’의 질문과 확인으로 삶의 진상과 인간의 진의를 일구어낸다. 작가의 이 같은 진지한 사유와 열린 정신은 오늘의 우리 문학과 사회가 다시 해야 할 깊은 반성과 밟은 전망의 뛰어난 자료가 될 것이다.
작가 홍성원의 작품 세계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통해 개인이 처한 극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선이 굵은 남성문학을 추구한 작가로 잘 알려진 홍성원은, 스무 살 청년의 나이에 등단하여 그 후 50여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오로지 소설 창작에만 전력투구한 전업작가였다.
주로 개인과 역사의 질곡 어린 내면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복원하고 창조하는 데 바쳐진 그의 작품은, 사료 연구가를 방불케 할 만큼의 정밀한 자료 조사와 특유의 활달하고 굵직한 남성적 필체로 탄탄한 거대 서사의 모범적 사례들로 평가받는다.
이청준, 김승옥, 조세희 등과 함께 4․19 세대 작가군에 속하는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나뉜다. 참담한 전투, 무책임한 죽음, 잔혹한 학살, 무자비한 보복 그리고 생명을 건 피난, 각박한 생활, 무질서·혼란·절망 등 모든 비극적인 이미지와 언어들이 소용돌이치는 한국전쟁의 참담한 체험을 재현한 대하장편소설 『남과 북』(전6권)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달과 칼』, 동학 운동, 의병 운동, 개화 운동, 3․1 만세운동에 걸치는 격동의 근대 사회사를 조명한 『먼동』 등의 묵직한 역사장편소설이 그 한 축이라면, 지식인 주인공의 눈을 통해 삶의 여러 단면 특히 도시 생활자들의 삶을 미학적 수사와 겉치레를 배제한 채 냉혹하리만큼 객관적인 필치로 추적해나간 그의 빼어난 중단편들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작가 홍성원은 역사의 당위나 이념 지향 대신 일반 민중의 질긴 삶과 개인의 패배와 고통을 통해 거짓 없는 인간의 내면과 삶의 진실한 가치를 새롭게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번역자 안우식 약력
1932 년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노문과를 중퇴했다. 조선대학교 교원을 거쳐 문필 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에 『김사량―그 저항의 생애』 『천황제와 일본인』 『김사량 평전』이 있고, 편저에 『김사량 전집』 1∼4, 역서에 『개마고원』(황건의), 『토지』(박경리), 『황혼의 집』 『에미』(윤흥길) 등이 있다. 『에미』로 일본번역문학상을, 『한국문학단편선』(신경숙, 하성란, 조경란 작품 외)으로 2009년 제9회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다.